<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2) >
악재는 새로운 이름을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마(童魔)나 노마(老魔), 창마(槍魔)와 같이 몰개성적인 별칭을 지어주는 바람에 짜증이 치밀 정도였다.
“그럼 하산해서 내가 벽력창! 악재다! 이렇게 자랑이라도 하려고요?”
이훤의 말에 악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현재 죽어가는 중이고, 가솔들 또한 언젠가 그렇게 될 터였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건 하산한 후 가솔들을 막는 것이다. 한데 탈태환골도 아니고 반노환동까지 했으니 씨알이나 먹힐까 싶다.
“곧 죽어도 젊어지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거늘. 기왕 내려놓기로 마음먹었으면 모두 버립시다.”
악재는 한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어쩌란 말이더냐?”
“악재의 제자 정도로 합시다. 그가 말년에 거둔 제자이며 죽을 때도 곁을 지킨 걸로. 어때요?”
“그게 의미가 있을까?”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답답하네. 산속에 숨어 살아서 그런가. 왜 이렇게 꽉 막힌 거야. 종이라도 한 장 가져와 봐요. 거기다가 유언을 쓰는 겁니다.”
악재는 빙긋 웃으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하! 그 수가 있었구나.”
확실히 심신의 조화가 무너졌기에 감정의 기복이 상당했다. 일희일비 하는 모양새가 일견하기에도 강호초출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문의 안위가 백척간두에 이르렀다며 한탄을 하더니 지금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흐음, 뭐라고 써야 할까?”
이훤은 종이에 붓을 놀리는 악재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된 이상 벽력창 악재의 깨달음도 흡수하고 싶었다. 한데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니 기회를 엿봐야 했다. 분명 더 친밀한 사이가 되면 신마의 깨달음에 대해서 논할 시기가 있을 터였다.
“그럼 악재의 제자가 되기로 했으니 말은 편히 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 예전 감성 살리려고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어려졌으면 어리게 살아야지. 새장가도 가고. 어때?”
악재는 인상을 썼다가 마지막 이야기를 듣더니 헛기침을 했다.
“크흠!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정상이 아닌 자들에게 정도를 바랄 수야 없지.”
새장가 이야기에 눈이 번쩍 뜨여놓은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맹약을 제일 먼저 깬 사람이 정도 같은 소리하네.”
이훤이 비아냥거리자, 악재는 얼굴을 붉혔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콧김을 뿜는 그의 귓가에 더듬거리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돌아가신 걸로 하다니요.”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악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마 악재와 탈마도 그랬으리라.
탈마가 대뜸 초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되니 이 안에 남겨놓고 갑시다.”
“흐음! 술도 관리하고, 집도 청소하려면 나쁘지 않은 생각인 걸?”
악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손녀다! 이 빌어먹을 개종자들아!”
이훤은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쉽게 토설해서야 악재의 제자 흉내를 낼 수 있겠어? 이래서야 하산하자마자 걸린다고. 정신 안 차릴 거야?”
악재는 겸연쩍은 표정을 보였다.
“아하, 나를 시험한 것이로군. 설아에게는 내가 이야기를 하겠네. 가문을 위한 일이니 이해해 줄 것이야.”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탈마가 슬쩍 이훤의 곁에 섰다.
[시험한 것 맞아요?]
탈마의 전음이 들려오는 순간 감회가 새롭다.
하나 전음 자체는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희미했다.
[겸사겸사. 그런데 날뛴 것에 비해 전음이 혼탁하네?]
[몸뚱이를 바꿔서 흉내를 내는 형식이다 보니 외부의 기를 조율하는 게 쉽지 않네요.]
[너는 강기를 날리거나, 암기를 쏘는 건 안 되겠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일초반식의 무공도 익히지 않았던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 한데 탈마는 그것을 또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소리 없이 다가가서 살짝! 푹! 그럼 됩니다.]
[그래, 뭐가 됐든 도둑질을 하듯이 해라. 그럼 뭐든 안 되겠냐?]
이훤과 탈마는 히죽 웃으며 술잔을 나눴다.
그리고 일각 후 악설을 포함한 네 사람이 하산을 시작했다.
*
태산의 꼭대기가 봄바람처럼 훈훈했다면 중턱은 당장 혈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피이이잉-
산동악가의 담장을 넘어 명적이 날아왔다.
땅에 꽂힌 화살에는 서찰이 묶여 있었고, 그것은 곧장 수뇌부에 전달됐다. 무림맹 산동지부 소속의 무인이 서찰을 들고 달렸다.
“답이 왔습니다.”
화려한 막사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모여 있었다.
무림맹에서 대표로 내세운 극양도군을 필두로 좌측에는 천풍삼군과 독린왕, 창무검제가 앉았다. 우측에는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태와 군사, 그리고 신공부의 부주인 공대위가 마뜩찮은 듯 표정을 굳혔다.
“정분이 난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필담을 주고받아야 한단 말인가.”
신공부주는 유가의 명사답지 않게 짜증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인 공소가 소룡대연에서 행방불명되지 않았던가. 만약 그에게 자체적인 무력이 존재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산동악가보다 강했다면 벌써 월담을 했을 터였다.
“무림맹이 나섰으니 금방 해결될 게요.”
황보태가 신공부주를 다독이듯 말을 건넸다.
하나 그의 표정도 부주와 다르지 않았다.
세가의 무력 중 절반에 해당하는 외단을 모조리 파견한 상태였다. 한데 적의 공세에 막혀 숲을 넘지 못한다는 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없다.
‘크흑! 이런 식으로 주변에서 머물면 득을 볼 수 없거늘.’
그는 죽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 황보태웅을 욕하는 것으로 울분을 달랬다.
“어허.”
극양도군이 침음을 내뱉으며 이목을 끌었다.
“이제 조금 진도가 나갔나 보군요. 악가에서 뭐라고 합니까?”
독린왕 당창은 극양도군과 잘 어울렸지만, 그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에 지친 건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의 무인들까지 합류하여 세력의 규모는 일 천에 이르렀다. 한데 아직도 산동악가의 담을 넘는 건 고사하고, 가주인 악오춘의 얼굴도 보지 못한 상황이다.
하나 극양도군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느긋했다.
어차피 주작의 명령을 받고 나선 길이 아닌가. 그러니 명령이 내려오기 전에는 성급하게 싸움을 벌일 까닭이 없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서찰이 오히려 반가웠다.
“일단 황보태웅과 공소의 죽음은 확실하다더군요.”
황보태와 공대위가 벌떡 일어났다.
극양도군은 두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며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쯧, 황보세가는 이미 알고 있었군.’
하나 이것은 모를 게다.
그는 안타까움을 담아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청도대상단의 여식인 예영영과 후기지수 십여 명이 살아서 산동악가에 합류했다고 하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을 비롯한 후기지수 수십 명이 살해당했고······.”
중인은 살해라는 말에 모두 탄식했다.
극양도군은 상황을 즐기듯 말끝을 늘였다.
“흉수는 황보세가의 외단이라고 하는군요. 황보가에 혼무대라는 곳이 있나요? 그곳에서 소천뢰를 활용해 후기지수들을 죽였다는데······.”
“개소리요!”
황보세가주가 발작을 하듯 일갈을 내질렀다.
반면 신공부주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사이 황보세가주가 소리쳤다.
“혼무대는 얼마 전 본가의 사정 상 외부로 파견을 내보낸 상태이외다. 아니! 그런 건 상관이 없지. 어째서 내가 내 아들을 죽이려고 혼무대를 보내겠소이까? 설마 아들이 셋이라 하나쯤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죽어도 된다고 여겼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나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외부인들이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극양도군은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지요. 허허, 한데 어째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겠소이다.”
“이게 다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수작이외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려는 게지. 그러니 도군은 더 이상 적의 수작질에 놀아나지 말고, 당장 공세를 취해야 하오!”
“흐음, 산동악가에 혐의가 있는 것은 확실하나, 무림맹의 사정 상 대규모 살상 행위를 벌이는 건 부담스럽구려.”
“흥! 그게 그렇게 두렵다면 본가만이라도 해결을 보겠소.”
극양도군은 황보태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응수하자, 오히려 표정을 굳혔다. 주작의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서전을 부담스러웠다.
그 때 예기치 못한 상황이 연이었다.
“지부장!”
산동지부의 무인이 들어서더니 지부장에게 귀엣말을 했다.
산동지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무인들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지부장의 입이 떨어졌을 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산동악가가 문을 열었답니다.”
“흥! 이제 와서 무릎이라도 꿇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죄인을 처단하겠답니다.”
죄인으로 지목될 것이 분명한 황보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극양도군의 귓가에 한 줄기 전음이 흘러들어온 것도 그 때였다.
[시작하세요.]
*
“시작하라고 했어.”
주작의 한 마디에 흑의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태산 아래 유명한 주루의 별실을 잡아놓았다.
사 층 짜리 주루의 꼭대기는 사방이 탁 트여서 앉아만 있어서 가슴이 시원해질 정도였다.
주작은 스스로 잔을 채운 후 한 입에 술을 털어넣었다.
“크하! 나야 즐기기만 하면 그만이라지만, 자네는 이래도 되는 건가?”
“무엇이 말인가요?”
“산동성의 일은 청의가 벌였으니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한데 이제 와서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으니 이상해서 하는 말이지.”
흑의인은 보기 좋은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주인이 있을 때 들어가면 강탈이지만, 주인이 없을 때 들어가는 건 소유입니다.”
“흐음, 청의인이 죽었다는 의미겠지?”
“훗, 어차피 오래 살 관상은 아니었어요.”
주작은 흑의인의 말에 박장대소를 했다.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끼리 그리도 박정해서야 되는가?”
“주작께서도 청룡, 백호, 현무를 정답게 대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던데요?”
“그거라면 나도 할 말이 없지. 그나저나 저대로 그냥 싸우게 둬도 되는 건가?”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개미나 쥐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저들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산동악가에서 필요한 건 벽력창 악재, 한 사람이니까요. 다른 이들은 어찌 되어도 좋습니다.”
“하면 자네가 싸움을 명했다는 건 악재의 등장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겠군.”
“옥황묘의 진법이 걷혔습니다.”
주작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태산의 정상을 올려다봤다.
초절정을 오래 전에 넘어선 그라고 해도 구름을 뚫고 솟구친 태산의 꼭대기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곳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최초의 감각사도.”
“다 같은 사도끼리 그렇게 부르실 필요는 없지요.”
주작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자네는 도대체 우리와 얼마나 다른 거지?”
하나 흑의인은 주작의 말을 귓등으로 흘린 채 화제를 전환했다.
“그가 내려오고 있어요. 곧 즐거워질 겁니다.”
주작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은 겐가?"
흑의인은 그런 주작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한 채 말을 건넸다.
“그게 뭐가 중요할까요? 당신은 즐거우면 되는 거잖습니까.”
결국 눈을 먼저 돌린 쪽은 주작이었다.
*
흑의인은 즐거움을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무림맹, 나아가 황보세가의 가주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기 때문이다.
“아니, 이게 무슨?”
황보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룡장(靑龍掌) 안소풍은 장로원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그가 익힌 장법에 적중당하면 푸르스름한 멍이 들고, 멍이 든 부위의 내부는 독에 당한 것처럼 녹아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내보내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그가 성명절기를 뽐내기도 전에 심장을 꿰뚫렸다. 피가 분수처럼 샘솟고, 안소풍이 비명과 함께 쓰러지지 않았다면 눈으로 보았어도 믿지 않았으리라.
"한, 한 방에 죽다니."
"흐음, 오대세가는 오대세가라는 건가요."
황보태는 극양도군의 비아냥거림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리고 안소풍을 죽인 산동악가의 가솔을 보고 이를 갈았다.
"저 때려 죽일 놈!"
하나 이십 대의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철창을 빗겨든 채 손을 까딱거릴 뿐이다.
“황보세가의 개종자들은 가주부터 다 튀어나와라!”
<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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