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18화 (118/226)

<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악재의 처소는 훌륭했다.

가재도구라고는 침상과 허름한 탁자가 전부였다.

하나 십여 개의 술병과 뒤뜰에 꽂아놓은 푯말로 인해 훌륭한 장소로 격상됐다.

‘저 푯말만큼만 술을 묻어놨어도······.’

태산에 온 보람은 충분할 터였다.

일단 탈마와 악설을 내보냈다.

이훤과 악재는 낡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저간의 사정을 알려 줄 수 있겠는가?

악재의 진지하면서도 거친 목소리였다.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성격이 살짝 오락가락하시는 것 같네요.”

숫제 미친 사람 취급을 하니 화를 내도 무방했다.

하나 악재는 말을 아꼈다.

“······.”

“사실 당신의 욕심을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 했어. 아무래도 세월은 무시하기 힘드니까. 그런데 도발을 한 것치고는 너무 격하게 반응하더군요. 마치 처음 검을 잡은 무인이 피를 그리워하듯 격동하는 모양새가······.”

악재가 말을 끊었다.

“나잇값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길게도 하는구나.”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악재를 응시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연방 빈 잔을 채웠고, 이내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악재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술 향기를 음미했다.

“화산의 후예인가?”

화제가 바뀌었다.

그만큼 쉽게 토설할 수 없는 내용일 터였다.

이훤은 기꺼이 악재의 뜻을 따라줬다.

그도 그럴 것이 존중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희박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술은 진짜였다. 화산의 망아취자가 이르길 악재의 술 빚는 솜씨는 천하에 손꼽힌다고 하지 않았던가.

“화산의 그분과는 깊은 연이 있지요. 부자, 사제, 친우, 어느 걸 가져다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기는 합니다.”

“네 보법에서 화산의 그림자를 보았다. 암향표를 전해 받았음에도 제자가 아니라고? 하면 신마의 무공은 어떻게 익혔는가?”

“그건 술 한 병으로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요?”

이훤의 느긋한 대꾸에 악재는 침음을 흘렸다.

“하면 천룡전에 대해서 알려다오.”

그 정도는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하나 천룡전의 구성과 역사, 절명곡의 이야기를 대충 뭉뚱그려서 전했다. 모든 것을 알려주기에는 정파인에 대한 신뢰가 그리 깊지 않았다.

“하아······. 하긴 그때의 우리는 근처에 누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살아있음에 놀랐을 때였다.

주변을 살필 여력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악재는 장탄식을 흘리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릴 때의 나는 항상 불만이 가득했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술을 홀짝였다.

‘갑자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야기가 길어질 듯했다.

악재 모르게 손을 흔들어 창가에 놓인 술병들을 끌었다.

다섯 병 정도면 이야기를 듣기에 충분하리라.

첫 번째 병의 마개를 뽑았을 때 악재가 눈을 감았다.

“악가의 위치, 상태, 무공,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내륙으로는 황보세가가 막고 있었고, 바다 쪽으로 나아가기에는 지닌 것이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고 싶고, 그로 인해 강자들과 인연을 맺고 싶었다. 그러기 위채 동참한 신마토벌전이었다.”

‘하아! 이건 산미가 좀 강하기는 한데, 뒤끝이 좋네. 이 술 이름은 뭐지?’

하나 낙안봉에서 망아취자가 보여준 악재의 술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놓인 술병들도 주조 시기와 재료만 푯말에 적혔을 뿐 명칭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이훤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호기심에 입술을 달싹였다.

하나 술 이름을 묻기에는 악재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절명곡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결심했네.”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나 보다.

‘이럴 줄 알았음 뭐라도 만들어 오라고 할 걸.’

이훤은 허리를 등받이에 붙인 채 조금 더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안주를 걱정하는 사이에도 악재의 회한 가득한 이야기는 이어졌다.

*

악재(岳宰)가 처음부터 욕망의 화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정파인이라는 자부심을 지녔고, 협의지심을 품고 약자를 도우며 살아왔다. 하나 가문의 힘이 곧 자신의 힘이 되는 정파의 세상에서 몇 번이나 좌절해야 했다.

‘세상은 진짜 더럽게 넓구나.’

그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강호에는 기재와 천재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산동악가의 창술보다 고절한 상승 무공을 익혔다. 출발선 자체가 달랐으니 기연이 있기 전에는 따라 잡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신마와의 만남은 기연이었다.

‘신마가 조금만 요령 있게 행동했다면 공적이 됐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했기에 공적이 됐던 것이다.

그러니 악재는 신마의 깨달음을 받아들이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마의 무공을 익히려고 노력을 했다.

문제는 생존자였다.

악재가 봤을 때 자신을 포함한 여섯 명의 생존자 중 궁핍한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다. 가장 처지는 것처럼 보이는 형산파의 축융노도는 본가가 오대세가 중 한곳이 교룡세가였다. 한 마디로 형산파와 교룡세가를 모두 한손에 쥘 수 있는 권력자였고, 장강 이남에서는 손꼽히는 명사로 유명했다. 그러니 생존자들은 신마의 깨달음을 봉인하자고 주장할 수 있었으리라.

저들은 먹고 살만 했으니까.

지킬 게 많았으니까.

하지만 악재는 아니었다.

‘맹약 따위는 깨라고 있는 것이지!’

어차피 모두 은거할 거라면 누가 와서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기에 악재는 산동악가로 돌아오자마자 두문불출했다.

“난해했고, 뜬 구름을 잡는 것 같았고,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았지.”

처음에는 제대로 된 무공이 아니라 기관진식의 오의를 전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하나 십 수 년을 파고든 끝에 진법처럼 보였던 것은 실제로 인체의 재구성임을 깨우쳤다.

사람의 몸을 진법처럼 재구성한다니.

본래 임맥타통을 필두로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행할 수 있었던 탈태환골이 자유롭게 진행됐다. 그러니 초절정에도 미치지 못했던 무공은 웅혼한 내력과 완벽한 육신을 토대로 한 단계 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네.”

그 후로는 자신 뿐 아니라 세가의 가솔들을 대상으로 수련을 했다. 소가주였던 악오춘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며 탈태환골을 시켜줬다.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을 가주에게 구결로 알렸다. 산동악가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고, 마침내 황보세가가 주춤한 틈을 타 오대세가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데 그 때부터 조급증이 생기더군.”

그는 자신이 신마의 깨달음을 받아들였기에 다른 생존자들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그들은 본래부터 악재보다 명가였고, 고수가 아니던가.

그들에게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또한 산동악가가 중흥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생존자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두려워했다. 어찌됐든 배신하는 순간 모두가 힘을 모아 죽이자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죽음을 가장한 후 태산의 정상에 진법을 설치했지.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욕심이 났던 나는 그 때부터 신마의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네. 그게 가장 큰 패착이었지.”

악재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그렇기에 진법을 몇 겹이나 둘러서 안전을 확보한 후 한계를 깨고자 했다. 하나 시간이 흘러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았다.

“늙어서 그렇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조금만 더 젊었다면! 그 추악한 욕심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

진법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꾸미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악재가 만든 구궁벽력공(九宮霹靂功)은 진짜를 만나는 순간 언제든 깨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클클, 태생적으로 자질이 부족했거늘······.”

망아취자와 같이 깨달음으로 인한 성장은 부작용이 있을 리 없다. 대자연의 순리에 맞춰 때가 되었을 때 나아갔기 때문이다. 하나 인체를 완전하게 재구성하여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가 되는 행위는 곧 역리(逆理)였다.

“반노환동을 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내 손 안에 있는 듯했다. 하나 곧 알게 되었지. 내 머리가 이상해졌고, 내 말투가 이상해졌고, 내 생각이 이상해졌다.”

이훤은 침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강호초출처럼 도발만 하면 죄다 걸려들었군.’

“처음에는 어려졌으니 어리게 생각하는 게 옳다고 여겼어. 그래서 개의치 않았지. 하나 어느 순간 몸이 망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악재는 허공을 응시하며 장탄식을 흘렸다.

“아니지.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되돌아가려 한다고 해야겠지.”

한 마디로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의미다.

“그럼 때가 되면······.”

이훤이 말끝을 흐리자, 악재는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자네는 표정에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군. 그게 아니라면 일부러 드러내는 것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지요.”

“죽을 때 곱게 갈는지가 궁금한 겐가?”

이훤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닌 말로 당신 같은 사람이 주화입마에 빠져서 폭주하면 그것만큼 큰일도 없지요.”

악재는 쓴웃음을 지었다.

“주화입마에 빠질 자격도, 폭주할 자격도 없을 게야. 때가 되면 하늘이 이 몸을 흔적도 없이 가져갈 것이네.”

그럼 다행이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술잔을 비웠다.

“내가 자네에게 진법을 열어준 이유를 알겠는가?”

“제가 무슨 독심술이라도 익힌 줄 아십니까?”

“클클, 신마의 깨달음을 두 개나 받아들인 자네라면 왜인지 모르게 알 것 같군.”

이훤은 입맛을 다셨다.

술을 한 잔 입안에 털어 넣은 후 말을 건넸다.

“신마가 각기 다른 깨달음을 전했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그라면 뭐든 불가능했을까.”

“그리고 자식들이 당신처럼 될까 두려운 겁니까?”

악재의 눈빛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가 전한 무공으로 인해 산동악가는 천하에 손꼽히는 방파가 되었다. 하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자신과 달리 자식들은 절반의 깨달음만 깨우쳤을 뿐이다. 그러니 때가 되었을 때 악재와 달리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도와주겠는가.”

“당신이 뭘 줄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요.”

악재는 눈을 부릅뜬 채 이훤을 바라봤다.

마치 이훤의 속내를 파헤쳐 진심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칠대괴마. 농담 아닙니다.”

이훤의 말에 악재는 눈을 감았다.

칠대괴마가 뭔지는 모르지만, 이훤에게 종속된다는 사실만은 눈치로 보아 알고 있었다.

“뭘 하려는가?”

“천룡전. 가장 위부터 말단까지 씨를 말려버릴 겁니다.”

악재가 손가락을 튕겼다.

창밖의 텃밭에서 특이한 모양의 병이 딸려 나왔다.

“누군가의 비사를 전해 듣기에는 이만 한 술이 없지.”

그는 이훤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을 덧붙였다.

“자네의 이야기를 해주겠나?”

“으음, 그럼 저도 어린 시절부터······.”

“장성했을 때부터 하게.”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러다 악재가 다섯 살 아이처럼 떼라도 쓰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

탈마는 악설을 향해 손짓했다.

“악 소저. 내가 이상한 게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이미 이각 이상 초옥 밖에서 멀뚱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이다. 특히 악설은 죽은 줄 알았던 악재가 살아있는 것도 모자라 어려지기까지 했으니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네?”

“창으로 공격 좀 해봐요.”

“아! 비무를 하자는 건가요?”

탈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설을 향해 손짓했다.

악설은 잠시 초옥과 탈마를 번갈아보다가 한 숨을 흘렸다. 넋이 나간 채로 있는 것보다는 몸이라도 풀어두는 게 좋을 듯했다.

“진짜로 할까요?”

탈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이훤의 의제라서였을까.

탈마를 대할 때마다 마치 더 경박한 이훤을 보는 듯했다.

“후회하지 마세요!”

악설은 상한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창을 고쳐 잡고 대지를 박찼다. 철창임에도 창끝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휘어져서 꽂혀들었다. 심지어 잔영이 십여 개 이상 남을 만큼 빠른 공세였다.

하나 후회한 쪽은 탈마가 아니었다.

쉭쉭쉭쉭쉭쉭!

탈마는 고갯짓만으로 창끝을 피하더니 이내 뜀뛰기를 하듯 깡충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익!”

악설은 얼굴을 붉히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푸르스름한 기운에 휘감긴 창이 공간을 꿰뚫고 짓쳐들었다. 한데 그 순간 탈마의 신형이 햇볕을 마주한 눈처럼 녹아내렸다. 그리고 악설의 등 뒤에서 탈마의 느긋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흐음, 이런 방식인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탈마는 이훤이 악재의 공격을 피했던 상황을 재구성하는 듯했다.

“크흑! 다, 다시 해요!”

악설이 발작을 하듯 외쳤다.

하나 탈마는 자세를 풀고 초옥을 응시했다.

“그만 합시다. 갈 때가 됐네요.”

그 순간 초옥의 문이 열리며 이훤과 악재가 나왔다.

“탈마야! 동생 받아라.”

“뭐라고? 그런 말은 없지 않았는가!”

이훤은 투정을 부리듯 인상을 쓰고 있는 악재를 가리켰다.

“칠대괴마 한다고 했잖아요.”

“거듭 말하지만 며칠 전만 해도 더 쌩쌩했네. 그럼 자네는 내앞에서 무릎을 꿇고 옛 이야기를 들었어야······.”

악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탈마가 다가와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 막내야.”

“뭐라?”

악재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악설은 휘청거렸다.

하나 무공이 없을 때에도 노군에게 형님 소리를 하던 녀석이 아닌가. 악재가 찢어발길 것처럼 노려봤음에도 당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넌 이름이 뭐니”

< 49, 내 손으로 부수겠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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