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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17화 (117/226)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3) >

이훤은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어려졌다고?”

호사가들은 절대지경의 고수가 되면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검에 강을 뒤집고, 일도에 산을 자를 수 있단다. 환골탈태(換骨奪胎)로 인해 머리카락이 검게 변하고, 반짝이는 치아가 새로 솟아나며, 피부가 탱탱해질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나 현실은 달랐다.

강을 뒤집는 것도, 산을 자르는 것도 불가능했다.

환골탈태 또한 노화를 조금 늦추거나, 또래보다 어려보이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할 터였다. 하나 없던 것이 있고, 있던 것이 없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아닌 말로 칠순을 넘긴 이가 환골탈태 했다고 해서 누런 이빨이 뽑힌 자리에 새 이빨이 나는 건 불가능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닌가.

한데 어려졌단다.

보통 회춘이라고 표현하지만, 정도가 달랐다.

강호에서는 반노환동(反老換童)이라 칭했다.

“백 세가 넘었을 텐데······.”

탈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말끝을 흐렸다.

“아.”

악설은 자신보다 피부가 좋고, 멀끔하게 생긴 할아버지를 보고 탄성만 내뱉었다.

“훗,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반면 이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악재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악설은 이훤의 말투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더 대단한 일을 본 것처럼 말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벽력창 악재도 그러했다.

“문을 열어줬다고 해서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네.”

외형만 스물 살 남짓일 뿐 목소리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더불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공터 전체가 혹한의 대지처럼 서늘했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술맛 떨어지는 곳에서 환영받고 싶지는 않소.”

악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저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동질감을 느꼈다.

신마의 무공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한데 탈마와 악설은 명확하게 느껴졌지만, 이훤은 애매모호했다.

“설아, 이쪽으로 오너라.”

악재는 턱짓으로 악설을 불렀다.

한데 악설이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이훤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무기력해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렇게 가면 안 되지.”

“뭐하는 짓이더냐? 여인의 몸을 함부로······.”

악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훤이 손을 내젓는 순간 그의 기세가 바람처럼 흩어졌기 때문이다.

“여자로 보지 않아. 아주 귀한 물건이지. 아!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구해줬을까? 네가 말해봐.”

악설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이훤을 노려봤다.

진정 자신을 물건처럼 여겼다는 사실에 분노한 게다. 하나 구해준 것은 사실이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청의인이 뭐라고 했는지 이야기하면 보내주지.”

이훤의 제안에 악재는 미간을 좁혔다.

진법 밖의 무리라고 알려주니 그제야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네가 알아서 무엇 하려고?”

“그 새끼들 다 죽이려고.”

“능력은 되는가?”

“시험해 보시게?”

악재는 대답 대신 악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그녀를 옥죄고 있던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졌고, 황급히 악재의 곁으로 달려갔다. 악재는 악설을 뒤로 보낸 후 여전히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차라리 무림맹으로 갈 걸.”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정황 상 악재가 아니라 청의인이 남긴 말이 분명했다.

불현 듯 소룡대연에서 자폭한 혼무대주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종남파에 소천뢰를 빼돌렸냐는 말에 무림맹을 거론하지 않았던가.

‘소천뢰를 납품하는 건 황보세가와 군부, 그리고 무림맹이라고 했지.’

이훤은 웃었다.

“이 새끼들은 쥐새끼가 맞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끊이지를 않으니 말이야.”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인 줄 알았는데 일처리가 그렇지 않더군. 하면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던 겐가?”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악재는 정확한 용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채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전했다. 이훤이 전후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말인가 싶었으리라. 실제로 악설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의구심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알면 골치 아플 텐데. 능력은 되시나?”

악재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했다.

“시험해 보게.”

이훤은 두 팔을 늘어트린 채 앞으로 나섰다.

“좋아.”

악재를 대함에 있어서 예의나 공경은 찾아볼 수 없는 행위였다. 하나 이훤은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악재에 대하여 예의를 갖출 생각이 전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상황을 보라.

‘신마의 깨달음을 전하지 말자는 약속이야······.’

애초에 절명곡의 생존자들끼리 맹약을 했다지만, 지켜질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정파인이라고 해서 모두 청렴하고, 공정하며, 대의를 추구하고, 협의지심을 갖췄을 리 없지 않은가.

‘망아취자가 특별했을 뿐이야.’

이훤은 회귀 전 탈마와 술을 마시며 정파를 논했던 적이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좋은 기회를 노리기 위해 본성을 숨기고 있을 뿐인 위선자라고 평가했다.

결국 결과를 보라.

누군가는 몰래 엿듣고, 천룡전을 만들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 비급을 만들어 뿌렸다.

누군가는 아예 처음부터 세가를 키웠다.

‘남은 건 형산파의 축융노도와 제갈세가의 제갈삭, 남궁세가의 남궁천운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신마의 깨달음을 고이 지닌 채 은거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쩌면 천룡전에 합류했을 수도 있고, 더한 짓거리를 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데 악재의 꼴을 봐서는 절명곡에서 헤어진 이후 곧장 깨달음을 갈무리한 듯했다.

“그러니 내게 선배 대접은 기대하지 마라!”

이훤이 이를 갈며 외치는 순간 붉은 기운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혈광이 번뜩였고, 이내 신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상대는 신마의 깨달음을 오롯이 갈무리한 고수다.

망아취자보다 윗줄이라는 생각에 처음부터 천공혈륜겁을 최대치로 끌어냈다.

파팟!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듯했으나, 한순간 악재의 곁에서 뭉쳐들었다. 주먹의 형태를 취한 혈륜이 악재의 관자놀이를 향해 꽂혔다. 하나 악재는 주먹을 쥐지도 않은 채 손등으로 이훤의 주먹을 막아냈다.

콰쾅!

기의 충돌로 인한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듯 퍼져나갔다.

“허미! 씨발!”

탈마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엄청난 기파로 인해 나무와 돌을 튕겼고, 모래 바람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솟아올랐다.

하나 이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없었다.

처음부터 일격에 끝내지 못함을 알았던 것처럼 튕겨나가는 힘을 활용해 그대로 반대편 손을 흩뿌렸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두 사람은 코가 맞닿을 만큼 지척인 거리에서 박투를 이어갔다. 팔꿈치와 어깨는 물론이고, 무릎과 머리까지 활용해 서로를 공격했다.

‘이 새끼! 분명 절대지경에 올랐어.’

‘이 놈은 도대체 무엇인가? 구궁벽력공이 흩어진다.’

공수를 이어감에 있어서 우열을 논한다면 미세하게나마 이훤의 약세였다. 하나 천공혈륜겁의 신묘함으로 자신보다 윗줄인 고수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천공혈륜겁의 성취는 팔 성에 불과했고, 상대의 무공은 이미 완성됐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훤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 했다.

‘나는 성장할 수 있고, 넌 여기가 끝이야!’

꽈드득!

주먹에 강기가 맺혔다.

이훤은 탄강보다 직접 악재의 얼굴을 노리며 주먹을 내질렀다.

쩡-

지금까지와 달리 악재가 처음으로 밀렸다.

악재는 양 손의 저릿함에 표정을 풀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인지하고 양손으로 막았음에도 밀려날 것이라고는 예상도 못한 표정이다.

“후우.”

이훤은 주먹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언제까지 빈 손으로 상대할 거지? 산동악가는 창으로 유명하잖아. 아니면 강해지고 싶어서 뿌리조차 버린 건가?”

“크흑! 건방진 놈! 뿌리조차 밝히지 못하는 놈에게 무기를 쓸 필요도 없다!”

“아! 정파인의 고고한 자존심 같은 건가?”

“닥쳐라! 너 같이 경박한 놈을 상대하는데 이 주먹으로도 충분하다!”

악재는 주먹을 들고 외치다가 미간을 좁혔다.

이훤의 손에는 팔황과 무극이 덧씌워진 채 번쩍거리고 있었다.

“너! 이!”

악재는 진저리를 치더니 손을 쥐락펴락 했다.

콰직!

그 순간 초옥의 창이 산산조각 나더니 묵빛의 창이 빛살까지 날아왔다. 허공섭물의 경지는 기를 쏘아내듯 조율하여 물건을 드는 행위였다. 하나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던 물건을 창까지 부숴가며 끌어오는 신위는 듣도 보도 못했으리라.

쇄애애액!

한데 이훤은 창이 날아오는 그 순간을 노렸다.

“비겁한 놈!”

악재는 쌍수를 휘저으며 장풍을 쐈다.

보이지 않는 기의 물결이 퍼져나갈 때마다 사내의 허리만큼 두꺼운 나무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창은 멋들어지게 날아온 것과 달리 땅에 박혔다.

“그러게 애병이라면 들고 다녀야지!”

이훤이 조롱을 할 때마다 악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망아취자처럼 한평생 구도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면 이런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악재는 절명곡 이전부터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던가. 지금껏 누구에게도 무시당한 경험이 없으니 이훤의 한 마디가 더없이 뼈에 사무쳤다.

“크아아아아!”

악재는 결국 창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대지를 들어 올리듯 창을 올려쳤다.

촤아아아악!

초승달 형태의 강기가 공간을 짓이기며 꽂혀들었다.

탄강(彈罡)의 일종이다.

하나 제아무리 만근의 무게를 지녔다고 해도 맞지 않으면 무의미한 힘자랑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훤은 지금껏 진법 안에서 숨어살던 악재와 달리 수많은 싸움을 회귀 전부터 이어왔지 않던가.

강한 자, 약한 자, 그리고 더 강한 자.

모두와 싸우는 법에 능숙했다.

“아이고! 피했네!”

이훤이 경망스런 자세로 탄강을 피해내는 순간 악재의 신형이 지척에 이르렀다. 그가 빠르게 십여 번의 창을 찔러넣고, 허공을 휘저으며 창대로 짓누르는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하나 이훤은 섬전과도 같은 공세에도 고갯짓으로만 투로를 피해내며 악재의 배후를 점했다.

‘강하다. 하지만 망아취자와 달라.’

망아취자는 신마의 깨달음을 흡수하기 전부터 강자였다.

아마 신마와 연관이 된 자들을 배제한다면 천하에 손꼽히는 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런 그가 신마의 무위를 습득한 것과 애초부터 욕망에 휩싸였던 악재의 성장은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이런 경박한 새끼!”

“흥! 나는 몸이지. 하나 당신은 마음이 경박해!”

이훤의 신형이 한순간 여덟로 흩어졌고, 제각기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멀쩡하던 나무의 나뭇잎이 비바람에 휩쓸린 것처럼 흩날렸다.

쇄애애애애액!

이훤의 잔영이 각기 공세를 펼치는 와중에 진체가 주먹을 내질렀다.

악재는 콧방귀를 낀 후 창대로 주먹을 막았다.

다섯 치의 거리.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권풍에 휩쓸려 절명했으리라.

하나 악재의 기본 능력은 이훤보다 윗줄이다.

‘창대를 그대로 내리치면!’

창 끝은 그대로 이훤의 정수리를 쪼갤 것이다.

하나 악재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존재했다.

팔황의 기능이다.

주먹이 창대에 막히는 순간 손끝에서 황금빛 물결이 뭉쳐들더니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마치 협봉검의 형태로 뻗어나간 팔황이 악재의 귓불을 찢었다.

촤악!

악재는 귓불이 찢겨나간 고통보다 거리를 허락했다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신마의 깨달음도 말이 안 되거늘. 더 한 것이 없겠소?”

이훤의 담담한 한 마디에 악재는 미간을 좁혔다.

하나 장탄식을 내뱉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째서냐?”

만약 이훤이 살의를 품었다면 팔황의 끝은 귓불이 아니라 목을 향했으리라. 악재는 창끝을 내리고, 힘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째서냐고 물었다.”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히죽거렸다.

“칠대괴마도 어감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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