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16화 (116/226)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2) >

이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산동성을 찾아온 이유는 탈마에게 홍천기공을 주기 위함이다. 하나 그 과정에서 천룡전의 개입을 알게 되었고, 청의인을 죽이기 위해 진법을 통과하는 귀찮음을 감수했다.

한데 벌써 죽었다.

벽하원령칠채대진의 마지막 진법 앞에서 죽었으니 흉수는 불을 보듯 뻔했다.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 숨어 있으려면 끝까지 그러고 있어야지. 왜 기어 나와서 남의 먹잇감을 빼앗는 건데?”

이훤은 평소와 달리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미 천룡 휘하 열여섯 명의 감각사도를 모조리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 중에서도 회귀 전 자신을 조종했던 소마만은 더더욱 비참하게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한데 소마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사색사도 중 청의인을 빼앗겼다.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이훤은 씩씩거리면서 청의인을 들어올렸다.

이미 호흡은 끊긴 지 오래였고, 극심한 고문을 당한 듯 상(相)도 깨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훤은 진법을 응시했다.

청의인 또한 다른 감각사도처럼 죽기 전 무언가를 남겼으리라. 그리고 그 말은 진법 안에 숨어 있는 늙은 괴물이 들었을 터였다.

“장난삼아 올라왔는데, 진심으로 뚫어야겠네.”

하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청의인에게 단서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분풀이를 하는 건 시체라도 가능하지 않던가.

퍽! 퍽! 퍽! 퍽!

이훤은 청의인의 멱살을 쥔 채로 수십 대를 때렸고, 고깃덩이처럼 뭉개진 시신을 절벽 쪽으로 차버렸다.

예영영과 악설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중원에서, 특히 산동성에서는 신공부의 영향이 매우 컸다. 유가가 중흥한 지역에서 사자를 모욕했으니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산동악가의 뒤편이 나오겠지?”

“아! 네, 네.”

악설은 더듬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색마야, 네가 전마와 후기지수를 이끌고 산동악가로 내려가라.”

“무슨 이유에서인가요?”

“아래쪽에서 외단주가 올라온다며? 그럼 가주라는 놈은 정문에서 시위를 하고 있겠지. 네가 전마와 후기지수들을 데리고 가서 합류하면 황보세가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을 게다.”

색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보면 볼수록 단순히 술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완벽해!’

반면 악설은 표정을 구겼다.

“제가 가는 편이 가장 나을 텐데요.”

이훤은 입꼬리를 올린 채 진법 쪽을 바라봤다.

“넌 나와 함께 들어가야지.”

“저기를요? 저는 본가에 일이 생기지 않게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악설이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이훤은 피식 웃은 후 지풍을 날렸다.

그녀가 마혈을 잡힌 채 통나무처럼 넘어갔다.

“나는 지금 부탁을 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네 미친 늙은이가 내 먹잇감을 선수 쳤다고요. 즉! 너는 인질이다.”

악설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활로를 모색했다.

하나 예영영은 물론이고, 후기지수들마저 시선을 돌렸다. 이미 이훤이 죽은 청의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지켜본 상태가 아닌가. 목숨이 두 개가 아니라면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내가 진법을 깰 테니 탈마가 길을 열어라. 뭘 해야 하는지 알지?”

탈마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훤이 악설과 대상자의 시선을 끌 때 탈마는 뭐가 됐든 쓸 만한 것을 찾아오리라.

그는 탈마를 진법으로 보낸 후 예영영의 곁에 섰다.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겠지?”

예영영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마가 뭔지 보여드릴 게요. 악설의 안위와 악가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대가가 그리 적지는 않을 거예요.”

“오냐, 나는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따라가마.”

이훤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예영영은 소리 없이 전마라는 두 글자를 읊조렸다.

‘산동악가를 오대세가의 한 축으로 격상시킨 존재를 만나러 가는데······.’

조금의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심지어 위험해보이지도 않는다.

예영영, 아니 전마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이 도박이라면 자신은 최고의 패를 뽑은 듯했다.

“놀면 뭐해? 갑시다!

전마와 색마를 필두로 후기지수들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옥 같은 태산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 산동악가에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리라.

“하아.”

악설은 그 광경을 보며 한 숨을 흘렸다. 어느새 마혈이 풀려서 팔다리를 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뾰족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대체 본가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으시기에!”

“나 아니었으면 죽었을 계집이 말하는 본새 좀 봐라.”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잖아요.”

악설은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이훤의 말투가 더 심했고, 탈마 또한 먹물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이다. 하나 속의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뭘 해도 이득을 보기 힘든 것을 경험했기에 자포자기한 셈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이미 악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새로운 화제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나저나 이 놈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개미굴이나 종남파만 해도 패거리가 상당했잖아요. 한데 청의인은 주변에 아무도 없네요. 세뇌를 당했으니 도망쳤을 리도 없는데 말이지요.”

이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진법을 바라봤다.

“한 우물만 파는 놈이었네.”

“네?”

“생각해 봐. 다른 생존자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명확하게 몰랐단 말이야. 그런데 악재는 스스로 칩거함으로서 거주지를 밝힌 셈이야. 하지만 일곱 겹의 진법으로 인해 다른 감각사도들은 포기했을 거야. 그런데 이놈은 포기하지 않은 거지. 주야장천 이것만 들이 판 거야. 그럼 뭐가 제일 필요하겠냐?”

탈마는 탄성을 흘렸다.

“아! 고수보다 진법가나 학자들을 세뇌했군요.”

“그래, 일단 뚫어야 써 먹을 수 있잖아. 그런데 악재가 먼저 문을 열고 나와서 대가리를 쪼갤 줄은 생각도 못했겠지. 그리고 나머지야 몇 백 명이 됐든 문제 될 게 없잖아.”

“쯧쯧, 이렇게 허망하게 갈 거면 형님한테 한 대 맞고나 가지.”

“그러게 말이다.”

악설은 참다못해 일갈을 내질렀다.

“지금 조부께서 무공도 익히지 않은 학자들을 수백 명이나 학살하셨다는 건가요?”

탈마가 미간을 좁혔다.

“제 할아버지한테 막말 하는 것 좀 봐요.”

“쯧쯧, 이래서 오냐오냐 하며 키운 것들은······.”

악설이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창을 고쳐 잡는 순간이었다.

이훤이 진법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다.”

탈마 또한 무언가를 본 것처럼 수긍했다.

“그런 것 같네요. 좌우로 흐르는 기가 저곳부터 위아래로 흘러요.”

“위아래로 흐르는 기의 중간 지점이 통로일 게다.”

악설은 자신도 모르게 창을 잡았던 손의 힘을 풀었다. 저들의 말대로라면 신비 조직이 수년 동안 풀지 못했던 진법을 말장난이나 하면서 해제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무슨 능력을 지녔기에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녀 역시 산동악가의 장중보옥이고, 여인이기 이전에 무인이었다. 자신으로서는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높은 곳에 이른 자들의 언행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아, 내게는 그저 뇌기가 가득한 죽음의 진법으로만 보이는 걸.’

악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단한 고수가 대단한 진법을 파해하는 광경이다.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진풍경일 터.

그녀가 온 신경을 집중했을 때 일갈이 터져 나왔다.

“안 열어주면 부숩니다!”

이훤의 우렁찬 일갈에 한순간 정신이 혼미했다.

열어달라고 해서 열어줄 것이라면 진법의 존재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한데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이훤과 탈마가 가리킨 부위가 한 순간 뻥 뚫렸다.

마치 무언가 존재하는 것처럼 바람마저 휘어져서 돌아갈 만큼의 공간이 드러난 것이다.

“크큭, 내가 뭐라고 했냐? 늙으면 애착이 강해진다니까.”

“형님이 언제 그랬어요?”

“이 새끼! 무공까지 얻게 해줬는데 변했네. 눈빛만 봐도 형 마음을 읽어야지.”

탈마는 이훤을 따라 진법 내부로 들어섰다.

“형님한테 훔칠 게 생기면 마음까지 읽어드리리다.”

악설은 마치 옆집에 놀러가듯 무방비하게 진법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따라 황급히 걸음을 놀렸다.

‘정말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신 건가?’

*

예영영은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전마(錢魔)가 되었고, 원군(元君)이 됐다.

그녀를 따르는 십여 명의 후기지수는 옥황회의 이름 아래 묶여 있는 수하였다. 그러니 제대로 하산을 한 후 청도대상단에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을지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데 색마가 그런 그녀의 소매를 낚아챘다.

“인기척이야.”

그리고는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소매를 놓더니 슥슥 닦는 것이 아닌가. 서로가 서로를 더 더럽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산길의 모퉁이를 지나는 일련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적당하게 거리를 벌린 채 이동하는 무인들은 태산의 지리에 능했다.

“바로 하산하여 일조와 이조는 소룡대연이 열렸던 장원으로 간다. 삼조와 사조는 개방과 하오문을 통해 후기지수들의 행방을 알아 봐.”

산동악가에서 악설을 구하기 위해 파견한 용휘대였다.

“용휘대네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 개방도요.”

“색마라면서요?”

“색마가 되면 머릿속에 있던 정보가 다 사라집니까? 멍청한 소리 하지 마시고, 손이라도 흔들어요.”

예영영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색마의 말대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손을 흔든다고 해서 용휘대가 그들을 발견할 리 만무했다. 결국 돌을 던져 시선을 끈 후에야 합류할 수 있었다.

“아가씨는 어디 계십니까?”

용휘대는 다행히 후기지수들의 말을 믿어줬다.

무엇보다 색마는 개방의 산동 분타 내에서도 유명한 관자림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보태웅! 그 개 같은 새끼가!”

“모두 진정해라. 그럼 아가씨는 태산 정상에 계신다는 말입니까?”

“네.”

“이훤이라는 사내와 함께?”

예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휘대주는 일조장과 이조장을 손짓해서 정상으로 보냈다.

“옥황묘 인근의 진법을 둘러보고,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라. 나는 예 소저와 관 소협을 데리고 가주께 가겠다.”

“존명!”

예영영은 용휘대주를 뒤따르는 색마를 잡아끌었다.

“내 뒤로 빠져요.”

“무슨 짓이지?”

“지금부터는 전마가 활약할 시간이니까!”

그녀는 용휘대주와 대화를 나누며 산동악가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가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이 완성됐을 때 진득한 미소를 보였다.

‘오십만 냥 따위! 오늘 만들어주겠어!’

*

진법 내부는 고요했다.

평범한 나무였고, 풀이었으며, 길이었다.

‘아마 그것 때문이겠지.’

이훤은 탈마와 악설을 힐끔 쳐다봤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정도의 차이일 뿐 신마의 깨달음을 건너건너 전해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진법을 만든 벽력창 악재야 말로 신마의 기운을 가장 빠르게 느낄 수 있는 존재였다. 마치 이훤이 처음 낙안봉에 올라갔을 때 망아취자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저기 초옥이 있는데요.”

악재가 있는 곳은 이야기에 흔히 나오던 고수의 거처와 달랐다. 이야기 속에서야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기화이초가 가득하며, 신수가 뛰어놀지 않던가. 하나 눈앞에 보이는 공터는 황량하기만 했다.

“문도 열어줬으면서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겁니까?”

대답이 없다.

“당신 손녀가 왔으니까 나와서 대화나 합시다. 아! 협박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탈마가 입술을 뻥긋 거렸다.

‘아무리 봐도 협박 같아요.’

이훤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크흠! 어르신! 악 대협! 제가 화산에 계신 그분과 아주 친하거든요. 그러니까 나와서······.”

문이 열렸다.

이훤은 초옥 내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

그도 그럴 것이 초옥의 문을 열고 나온 건 이훤의 또래로 보이는 미청년이었다. 탈마가 초옥 내부를 힐끔거린 후 미청년에게 턱짓을 했다.

“그쪽 사부는 어디 갔나 보네?”

차마 죽었냐고 물을 수 없어서 돌려 말하는 게다.

그 때 악설이 눈을 끔뻑이더니 더듬거리듯 읊조렸다.

“할아버지.”

미청년은 장탄식을 하더니 가뭄에 전답이 갈라진 것처럼 메마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악재다.”

< 48, 태산(泰山)의 절대자. (2)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