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육대괴마의 시작.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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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물과 같다.
손가락을 있는 힘껏 붙여도 수면 위로 떠내는 순간 흘러내리는 것이 순리였다. 하나 바가지나 그릇을 준비했다면 물을 채우는 것이 가능했다.
깨달음이란 이와 같다.
평소에는 개소리처럼 허황되게 들리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해도 준비된 이에게는 대오각성하게 만드는 진언(眞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이훤은 준비가 충분했다.
천공혈륜겁이라는 희대의 무공을 수십 년 동안 익혔고, 회귀 후에는 올바른 방향으로만 급격하게 성장을 이뤘다. 그러니 사기 그릇이 아니라 철로 된 그릇을 들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문제는 물이다.
이훤에게는 물이 없었다.
사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사부에게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팔황무극존은 자신의 무공에 신마의 깨달음을 더하여 천공혈륜겁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러니 때가 되면 어련히 성장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려야 했다.
‘이게 다 노군의 술을 훔쳐 마신 날로부터 시작된 셈이지.’
아마 화산의 수련관에서 평범하게 지냈어도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칠 성까지는 빠르게 올랐으리라.
회귀의 힘이었다.
하나 팔 성이나 그 이상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평생의 시간이 필요했을 터였다.
가르침을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데 그랬던 그가 계절이 바뀌기 전 팔 성의 경지에 올랐다. 바로 종남파에서 진산노도의 소천뢰를 마주했을 때였다. 그것도 육 성에서 팔 성까지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만년한철로 만든 커다란 그릇을 지녔어도 그 안에 담을 깨달음이 없다면 무의미했다. 그 깨달음의 근원에 대하여 몇날며칠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찾아냈다.
망아취자였다.
나아가 망아취자의 깨달음이었다.
더 나아가 망아취자에게 깨달음을 남긴 신마의 의지였다.
이야기 속에나 나오던 것처럼 주변 사람을 챙기고, 사람답게 살았다고 해서 깨우친 것이 아니었다.
‘신마가 남긴 깨달음은 과연······.’
신마가 망아취자에게 남긴 깨달음을 받아들였기에 진산노도와 생사를 다툴 무렵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섯 명 모두에게 동일한 것일까?’
솨아아아아아아-
진법이 해제되고 안개가 흩어진 자리에 백여 명의 복면인이 모습을 보였다. 마치 사색사도 중 청의인의 수하임을 자랑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파란 색 일색이다.
‘고금제일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라면······.’
복면인들이 두 줄로 나뉘어 빠르게 접근했다.
그들이 펼치는 경공만 봐도 절정의 수준을 넘어선 고수들이다.
‘모두에게, 그것도 동시에 각기 다른 깨달음을 남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훤은 적을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그가 보는 건 절명곡의 풍광이다.
수십 년 전 절명곡의 풍광이 눈앞에 그려졌고, 거기에 모인 생존자들이 떠올랐다. 생존자들은 당시 최강자가 아니었다. 갓 장로가 되었거나, 문파의 막내라 불렸다. 무소불위나 다름없는 신마라면, 그리고 생각보다 약한 생존자들이라면 각기 다른 내용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으리라.
그 증거 중 첫 번째가 망아취자였다.
그의 깨달음은 팔황무극존이 전한 천공혈륜겁과 조금도 겹치지 않았다.
두 번째 증거라면 탈마였다.
탈마가 익힌 홍천기공은 벽력창 악재가 남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마의 깨달음을 절벽에 새겨놓았다. 한데 이훤은 탈마가 홍천기공을 수련하는 과정을 도우며 한 번 더 깨우쳤다.
팔황무극존과 망아취자, 그리고 악재까지.
“모두의 깨달음이 다르더라.”
이훤은 지척에 이른 청의인이 검사를 흩뿌리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러니 며칠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현재까지 밝혀진 생존자는 모두 일곱.
이훤은 세 가지 깨달음을 모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천공혈륜겁의 성취는 여전히 팔 성이지만, 손가락 사이사이로 물드는 혈륜의 농도는 지금까지와 격이 달랐다.
“그러니 꺼져라.”
혈륜이 얇게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방패와 같았다.
복면인의 검에서 올올이 솟아오른 검사가 광풍과 함께 혈륜을 후려쳤다.
쩡-
그 순간 검이 엄청난 반탄력으로 튕겨나갔다.
복면인은 호구가 찢어지며 검을 놓쳤고, 검은 도리어 주인의 목을 꿰뚫었다.
푹!
절대지경의 고수나 선 보일 호신강기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이미 청의인의 강림혼요술에 세뇌가 된 복면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놈! 일대종사의 흉내는 거기까지다!”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노인이 쌍검을 늘어트린 채 질주했다. 일대종사를 거론한 노인이야 말로 새외에서 일대종사라 불리던 고수였다.
쌍익검종(雙翼劍宗) 위태태.
삼십 년 전 대막을 종횡하던 고수가 주인 없는 산에 문파를 꾸리니 무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검익재(劍翼齋)다.
위태태가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추행진의 형태로 쇄도했다. 두 명의 제자가 새의 날개처럼 검을 뻗었고, 허공으로 솟구친 제자가 꼬리가 된 듯 검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정중앙에 위치한 위태태의 검에서 강기가 솟구치는 순간 네 명의 신형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훤을 짓눌렀다.
“흥! 쥐새끼들이.”
이훤은 쌍수를 늘어트렸다.
그 순간 혈륜이 길게 늘어져 검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가 예(乂)의 형태로 양손을 몇 번이나 교차하자, 세 명의 제자는 팔다리를 잘린 채 허물어졌다. 마지막에 이르러 양 손을 모아 거검(巨劍)을 쥔 것처럼 내리치니 강기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아!”
이훤이 탄성을 흘렸다.
그 사이 복면인들이 진형을 재정비했다.
세뇌가 됐을 뿐 바보는 아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죽이겠다는 결의는 있으나, 무턱대고 돌진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경계심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팔황, 그리고 무극이다.”
이훤은 양 손을 들어 팔찌를 바라봤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팔 성에 이르니 혈륜이 움직일 때마다 팔찌가 진동했다. 마치 기와 기로 연결된 것처럼, 혹은 몸뚱이에 무언가 달라붙은 기분이다.
지금껏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나, 이 정도라면 이름을 지어줄 정도는 될 터였다. 팔황무극존의 일지가 담겨 있던 목합의 이음새를 연결하던 쇳덩이가 아니던가.
하여 팔황(八荒)과 무극(無極)이라 칭했다.
“놈이 정신이 팔린 틈을 노려라!”
진형을 재정비한 복면인들은 마치 응축했던 기세를 폭발시키듯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다.
“쯧쯧, 숨어 있지 않다면 너희만큼 편한 적도 없다.”
이훤이 오른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손목에 걸려 있던 팔치가 녹아내리더니 덧씌워졌다.
콰콰콰쾅!
주먹 끝에서 혈륜으로 뭉쳐진 강기가 튕겨나갔다.
탄강의 위력에 팔황이 더해지니 마치 군부에서나 사용한다는 포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일 장이나 뻗어간 혈륜에 휩쓸린 복면인 중 멀쩡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섯 치만 튕겨 나와도 탄강이라 불렸다.
한데 일 장의 거리를 격하고 공간을 뭉개버린 탄강의 위력에는 복면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희들 같은 꼭두각시만 상대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
이훤은 혀를 차며 먼저 다가섰다.
그것은 곧 양떼 무리에 호랑이가 뛰어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목을 베고, 팔다리를 찢고, 심장을 터트리면서 수십 명을 죽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강림혼요술에 대한 해법이 있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상황이거늘 세뇌당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절명곡 이후 수십 년.
천룡전은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다.
회귀 전은 더더욱 암중의 세력이었다.
이훤은 죽기 전까지 천룡전이나 절명곡의 생존자들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천룡전은 수십 년 동안 악행을 저질렀고, 그대로 두면 앞으로도 계속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이런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그렇다면 그 새끼도 천룡전이다!’
이훤의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순간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펼쳐졌다. 한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치 창처럼 뭉쳐들더니 고슴도치가 가시를 발사하듯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푹푹푹푹푹푹!
동정호의 낚시꾼으로 유명한 월천조객도, 장성을 오가며 노략질을 하던 마적떼의 두목도, 군부의 인재로 명성이 드높던 사품의 장수도 모조리 죽었다.
천룡전이라는 이름 아래.
이훤이 까칠한 입술을 핥으며 손을 내밀자, 색마가 황급히 달려와 술병을 건넸다.
꿀꺽! 꿀꺽! 꿀꺽!
중원의 명주만 골라 마시던 그와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화주였다. 하나 쓰레기를 치운 후 마시는 술에 고하가 어디 있으랴.
이훤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탄성을 가감 없이 발사했다.
“꺼어어.”
색마는 이훤의 애기(噯氣)마저 향기로운 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예영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오만상을 짓더니 혀를 내둘렀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야.”
이훤은 예영영에가 다가갔다.
“전마.”
“네?”
“돈을 더럽게 밝히니 전마다. 어때?”
예영영은 갑작스런 초빙에 눈을 반짝였다.
취마와 탈마, 그리고 색마.
하나 같이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일신의 능력만은 진짜였다. 특히 스스로를 취마라고 칭하는 이훤의 신위는 산동성 내에서 비교할 사람이 없을 만큼 대단했다.
‘정사지간의 느낌이 살짝 있지만, 어쨌든 이번 일은 황보세가의 잘못이야. 게다가 천룡전을 저렇듯 손쉽게 처리하는 걸로 봐서는 무림맹도 대놓고 밀어내지 못하겠지. 저런 사람과 의자매로 맺는다면······.’
중원 진출은 문제가 아니었다.
중원의 상계를 모조리 씹어먹을 수 있을 터였다.
탈마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 감수하는 사람이니 전마를 위해하는 자가 있다면 무림맹이라고 해도 적대할 사람이 아닌가. 무엇보다 전마(錢魔)는 취마나 탈마, 색마에 비해 어감도 좋았다.
행운은 길게 끌어서 좋은 적이 없다.
하여 그녀는 다짜고짜 수락을 하려 했다.
한데 이훤의 뒷말이 그녀의 결심은 송두리 째 뭉개버렸다.
“뭐라고요? 한 번 더 말해주세요.”
“내 술이 네 술이듯, 네 돈도 내 돈이다.”
장밋빛 환상은 안개처럼 흩어졌고, 냉철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천성이 장사꾼인 그녀는 돈을 위해 홍천기공조차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에게 가진 돈을 모두 내놓으라는 건 그 어떤 치욕보다 심했다.
“그건 싫은데요.”
이훤은 예영영의 단호함에 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탈락.”
“잠깐만요. 거래라는 건 원래...”
“형제끼리는 거래 안해.”
“그래도 한 번 더······.”
촤아아아악-
예영영은 이훤에게 다가서려다 황급히 물러섰다.
그녀 앞에는 세 치 깊이로 파인 금이 존재했다.
“우리의 동행은 여기까지. 각자 살길을 찾아보자고.”
이훤은 빙긋 웃은 후 색마에게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마. 살펴보다가 혼자 튀는 놈이 있으면 바로 알려줘.”
“예! 대형.”
색마는 금을 넘기 전 예영영을 힐끔 보며 히죽거렸다.
예영영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영문 모를 패배감에 허우적거려야 했다.
“넌 뭐해?”
“네?”
악설이 눈을 끔뻑였다.
“따라와. 너는 나와 갈 곳이 있잖아.”
태산의 정상인 옥황묘를 거론하는 것일 게다.
악설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선을 넘었다.
이훤의 말대로 벽력창 악재가 스스로 진법을 설치하고 숨었다는 건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산동악가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조부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가자!”
예영영은 이훤과 일행이 자취를 감추자 허망함을 금치 못했다.
‘아······.’
그런 그녀의 곁으로 후기지수들이 다가왔다.
“예 소저. 아까 그 구절이 조금 애매한데요.”
“저도 한 번만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후기지수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예영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위에는 천룡전이고, 아래에는 황보세가가 살의를 품고 있는 형국이다. 한데 이 천둥벌거숭이들은 지옥문 앞에서 여유롭게 수련이나 할 생각인 듯했다.
‘쳇! 조금 더 부드럽게 거절을 했어야 했나.’
그녀가 울상을 지으려는 순간 땅에서 솟구치듯 탈마가 나타났다.
“악!”
탈마는 예영영이 엉덩방아를 찧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주변을 살폈다.
“형님은?”
“올라갔어요.”
후기지수 중 한 명이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동행은 더 이상 하지 않으실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고로 이곳에서 조금 더 수련을 할까 생각중입니다. 한데 황보세가는 모두 물리치신 건가요?”
탈마는 미친 놈 보듯 후기지수를 바라봤다.
“오백 명이 넘는데 물리치기는 뭘 물리쳐? 놈들이 한꺼번에 들이치고 있으니 너희들도 어서 살 길을 찾아라.”
예영영은 우왕좌왕하는 후기지수들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올라갑시다!”
“예 소저. 이 대협께서 따라오지 말라고······.”
“설마 눈앞에 있는데 모른 척 하겠어요.”
탈마는 예영영을 필두로 황급히 여섯 번째 진법을 통과하는 후기지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쯧, 아직 형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 47, 육대괴마의 시작.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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