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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113화 (113/226)

< 47, 육대괴마의 시작. >

47, 육대괴마의 시작.

이훤은 홍천기공에 적응해가는 탈마를 보며 몇 번이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의 그 어떤 무공이 이처럼 빠르게 습득하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천공혈륜겁조차 이렇게 빠른 성장은 불가능했다.

‘물론 천공혈륜겁은 고금 제일의 무공이니까 그럴 만 해.’

탈마의 성장을 지켜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벽력창 악재는 악가의 비전인 창술을 익혔으리라. 하나 그가 신마의 깨달음을 전해 받고, 깨우친 것은 창술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진법(陳法).

한데 진법이란 결국 자연을 응용하여 변화를 보이고, 인간을 기만하는 행위였다. 나쁘게 보자면 그렇지만, 좋게 보자면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한데 산동악가의 무공은 그대로란 말이지.’

오대세가의 한축이 된 산동악가는 여전히 창술을 익혔다. 다만 열 번으로 정해진 무공의 한계를 백 번으로 늘린 듯했다. 그렇다면 진법을 단순히 지형지물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진법의 묘의를 사람에게 응용한다는 건 곧 잠재력의 개방을 의미했다.

‘아마 저건 신마의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연히 얻어걸린 부산물 같은 거였겠지.’

이훤은 지금은 허물어진 절벽을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무공의 주인이 된 탈마를 응시했다.

‘결국 네 잠재력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의미가 아니겠냐?’

기특했지만, 칭찬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고만장하여 후기지수 전부를 손가락 하나로 쓰러트리겠다고 너스레를 떨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적이 난입하고 있다니 하늘이 도우는 듯했다.

“정말 탈마에게 저들을 맡기시겠다고요?”

“응.”

“제가 본 것이 틀리지 않다면 저분도 여기 후기지수들처럼 절벽에 적힌 것을 익혔잖아요. 며칠 일찍 오기는 했다지만, 그 이전에는 무공 자체를 익힌 적이 없고요.”

“역시 기억력 좋네.”

이훤의 시큰둥한 반응에 예영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밑에서 오는 건 황보세가라고요. 이 대협에게 당했으니 칼을 갈았을 거라고요. 그런데 이 대협은 빠지시겠다고요?”

이훤은 술병을 기울이며 코웃음을 쳤다.

“무슨 소리야? 위에 진법 열릴 것 같다는 소리 못 들었니? 내가 그거 뚫을 거야.”

막는 것도 아니고 뚫어버리겠단다.

예영영은 황당한 상황에 도움을 청했다.

“색마. 아, 색마.”

자신이 부르고도 어색했나 보다.

“크흠! 색마께서도 뭐라고 하셔야지요? 우리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요.”

“모든 것은 형님의 뜻대로.”

색마는 오히려 이훤의 신위를 지켜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들뜬 상태였다.

예영영은 악설을 바라봤다.

하나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벽력창 악재의 무공을 익힌 탈마가 위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한데 자신이 그것을 반대한다면 곧 악재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였다.

“저도 도울 게요.”

기껏 생각했다는 것이 돕겠단다.

예영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이곳에 모인 후기지수들에게 받아낼 것만 해도 중원으로 진출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한데 이곳에서 후기지수들이 모조리 죽는다면 지금껏 헛수고를 한 셈이 아닌가.

“모두 모여! 정신 차려! 이러다 죽으면 개죽음이라고!”

그녀에게 있어서 개죽음이라는 의미였다.

후기지수들은 예영영의 낯선 모습에 웅성거렸지만, 빠르게 집결했다.

“우측에 숲이 있으니 그곳에 피하도록 해요.”

“나도 싸우겠소!”

홍천기공을 며칠 익혔다고 기고만장해진 후기지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개소리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피해요!”

그런 그녀의 다급한 외침 사이로 탈마의 들뜬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형님! 먼저 가서 조지면 안 돼요?”

“괜찮겠어?”

이훤의 물음에 탈마는 기다란 혀로 아랫입술을 할짝거렸다.

“오늘은 뭘 훔쳐도 다 성공할 것 같은 날이에요.”

본능으로 사는 녀석이 잠재력을 개방한 후 도둑질을 예로 들었다. 그렇다면 녀석의 말은 예언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미 이뤄진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라.”

파팟!

그 순간 탈마의 신형이 숲속으로 스며들 듯 자취를 감췄다. 예영영과 후기지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똑같은 것을 익혔거늘 전혀 다른 방식의 무위가 아닌가.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저게 홍천기공인가요?”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홍천기공은 없다. 이제 탈마만 있을 뿐이지.”

*

황보세가의 외단주인 황보철조는 치밀한 성격이다.

그렇기에 안전이 확보된 비밀 통로에 들어섰음에도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던 중 이훤에게 몰살당한 시신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정찰을 내보내 통로의 끝이 태산의 중턱으로 연결됐음을 알게 됐고, 진법에 막혔음을 파악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물러섰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만전을 기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황보세가로 돌아가 가주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고, 기존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수정되었다. 한데 여유롭던 황보세가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무림맹이 움직인 게다.

비록 산동악가 쪽으로 움직였지만,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결국 황보세가는 곧장 외단을 재편한 후 소룡대연이 열렸던 연회장으로 파견했다. 거기에 더하여 장로원을 열고, 무위도식하던 장로들을 모조리 합류시켰다.

- 무림맹이 산동악가의 비전을 탐낼 수도 있다.

- 가능하다면 먼저 확보하라.

- 더불어 공소와 예영영의 살해 혐의를 악설에게 뒤집어씌워라.

그들이 그렸던 그림이 조금 더 커졌다.

하나 황보철조는 자신과 함께 하는 장로들의 면면을 보면서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놈들 중에서 쓸만한 건 매화군자 이훤뿐이다. 칠륜무절과 기기팔노가 번갈아 공세를 취한다면 나머지는 갈대처럼 쓸어버릴 수 있을 게요.”

칠륜무절(七輪武節)과 기기팔노(奇技八老).

일곱 명과 여덟 명이 묶여서 불렸으나, 본래 저들끼리는 안면이 없었다. 다만 황보세가에 의탁한 후 함께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집합체가 되었을 뿐이다.

칠륜무절은 무공이 뛰어났고, 기기팔노는 별호처럼 개개인이 다른 기술(奇術)을 지녔다.

“외단주의 명을 따르겠소.”

열다섯 명의 무인은 절정의 끝에 이르러 초절정을 앞뒀다. 초절정의 고수인 황보철조라고 해도 칠륜무절이 상대라면 수백 초를 상대해야 했고, 기기팔노가 적이라면 아차 하는 순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속도를 올려라!”

황보철조는 태산에 설치된 진법이 사라진 것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다행히 정상 쪽에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절진이 위용을 뽐냈다.

‘분명 그 근처에 모여 있으리라.’

그 순간 정찰을 내보냈던 이가 돌아왔다.

이상했다.

스무 명을 보냈거늘 돌아온 녀석은 혼자였다.

“무슨 일이냐?”

패룡당의 무인으로 절정의 반열에 올랐으니 고수라고 해도 무방했다. 한데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횡설수설하더니 앞으로 꼬꾸라졌다.

등에는 대침이 꽂혀 있었다.

아마 아슬아슬하게 돌아올 수 있을 만큼만 찌른 듯했다.

“이게 무슨······.”

패룡당의 무인이 대침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외단주! 저것은 패룡당 이대의 삼 조장이 애지중지하던 암기입니다.”

황보철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숲을 바라봤다.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숲을 뒤흔들었다.

숲이 흔들리는 모양새가 마치 어서 들어오라며 유혹을 하는 듯했다.

솨아아아아아아아아-

*

탈마는 자신이 강해졌음을 실감했다.

단순히 홍천기공을 통해 몸뚱이가 재편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음가짐 자체가 불과 며칠 전과 비교하면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고천락은 죽었어.’

그가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검을 늘어트린 채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무인이 보였다. 상대방은 고요한 주변이 신경 쓰이는 듯 잔뜩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만 해도 평소 상태와 달랐다.

탈마는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발끝만 놀려 전방으로 이동했다. 하나 제멋대로 울고 있는 풀벌레는 소리를 그치지도 않았고,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저 발에 밟혀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짓밟혔다.

기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

탈마의 움직임은 유령과 같았다.

처음 죽인 무인에게 빼앗음 검을 부러트려 손바닥만하게 만든 상태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물건을 훔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건을 쥐고, 빼내면 훔치는 것이 끝난다.

사람 또한 요혈을 가볍게 찌르면 끝났다.

굳이 멋있게, 힘 있게, 깊이 찌를 필요가 없었다.

‘형님의 말처럼만 하는 거야!’

스윽-

품자 형태로 경계하며 나가던 정찰조 중 좌측에 있던 자가 두어 걸음 더 움직였다. 그리고 세 걸음 째 비틀거렸으며, 네 걸음 째 ‘어어!’ 하는 허망한 신음과 함께 주저앉았다.

목 뒤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베인 상태였다.

“씨발! 뭐야? 귀신이야?”

“이거 진법 해제된 것 맞아?”

둘만 남은 무인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뭉치자!”

서로 등을 맞댄 채 외곽을 경계하려던 찰나였다.

“끄으.”

무인은 가슴이 후끈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홀로 남은 무인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동료의 심장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을 했다.

“으아아아아!”

촤악-

하나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나자빠졌다.

어느 순간 발목 뒤가 잘렸고, 엎어지는 순간 허공에서 그림자가 내려서더니 목 뒤를 찔렀다.

“하아.”

탈마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묘한 자세를 취했다.

홍천기공은 정해진 규칙도, 제약도 없다.

그저 대상자의 가장 편안한 상태, 즉 자연지체의 완성을 추구할 뿐이다.

그리고 덩달아 탈마의 마음도 달라졌다.

그는 천애고아였고,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도벽이라는 본능에 의지하여 살아왔기에 뿌리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이훤이 고향에 집착하여 화산에 정착했듯 탈마 역시 누군가 의지할 사람을 갈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천락이라는 이름을 애써 숨겼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를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처럼 지켜왔다. 언젠가 도둑질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을 때 고천락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한데 오늘 고천락이라는 이름을 버렸다.

이훤 때문이다.

그가 하라는 대로 했더니 살 길이 열렸고, 정착할 곳이 생겼고, 웃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약속했던 것처럼 딱 맞는 옷과 같은 무공을 익혔다. 강해졌다는 사실보다 이훤이 틀리지 않았음에 더 기뻐했다.

“고천락은 죽었어.”

잠시 후 십여 명의 무인들이 숲을 헤집으며 다가왔다.

탈마는 마치 몸의 색이 변한 것처럼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오직 그가 남긴 한 마디만이 귀곡성처럼 주변에서 아른거릴 뿐이다.

“나는 탈마다.”

*

색마의 취팔선보는 참으로 묘한 보법이다.

개방의 진짜 비전이야 말로 유수의 무공이 아니라 취팔선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사결 제자였지만, 후개에 버금갈 만큼의 성취를 자랑했다.

“스무 명 이상이 죽었어요!”

“정찰조가 물러갔습니다.”

“이차 정찰조가 몰살당했어요.”

“적이 멈췄습니다. 전열을 정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색마의 마지막 보고는 희열로 가득 찼다.

“황보세가의 외단주와 장로들이 전면으로 나섰어요! 탈마가 홀로 칠백 명을 막아냈다고요!”

예영영과 악설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후기지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가부좌를 틀거나, 초식을 수련했다. 홍천기공의 위력이 드러난 이상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익히고 싶었으리라. 어차피 아예 다른 무공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이것까지 예상하셨나요?”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탈마라고 했잖아.”

예영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이훤이 말하던 탈마의 모습이 회귀 전임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이훤은 회귀 전 탈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후훗, 탁 트인 평야가 아니라면 너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지.’

녀석이 돌아온다면 술을 나눠 마셔야겠다.

분명 지금까지 마셨던 술과는 맛이 완전하게 다를 것이 분명했다.

“방심하면 안 됩니다! 운이 좋았어요. 저곳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적들도 작은 것에 놀라서 경계하는 상황일 거예요. 아마 머지않아 대규모로······.”

예영영은 이훤이 조소를 흘리자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시나요?”

이훤은 술 병을 마주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까지 감안해서 상대하는 거다. 멍청아! 책상 앞에서 읽은 병법서나 되뇔 거라면 군부에나 투신해.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답답하니까.”

그는 등을 보인 채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세요?”

“내가 왜 대형인지 보여주러 간다.”

그 순간 정상으로 향하던 길을 막고 있던 여섯 번째 진법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진법을 휘감고 있던 안개가 핏빛으로 물들더니 서서히 옅어졌다.

< 47, 육대괴마의 시작.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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