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12화 (112/226)

< 46, 탈마, 무공을 얻다! (2) >

탈마는 아이 취급하느냐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홍천기공(弘闡氣功)을 선보이고자 자세를 취했다.

“기다려 봐.”

이훤은 억지로 탈마를 앉혔다.

그리고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천공혈륜겁은 천하에 다시없을 정순한 기운이다.

도가의 정종이라고 자부하는 화산의 내공보다 윗줄이었고, 소림의 심법이 아니라면 비견하기 어려우리라.

“입 열지 마. 지금 중요한 때다.”

이훤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탈마는 평소와 다른 이훤의 목소리에 입술을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정수리의 백회혈을 타고 흘러들어간 혈륜 한 줄기가 기경팔맥을 헤집었다. 막힌 곳, 끊긴 곳, 상한 곳을 찾아 빠르게 휘몰아쳤다.

‘이 새끼, 이거!’

미소가 절로 나왔다.

탈마는 내공을 익힌 적이 없으니 혈맥에 노폐물이 잔뜩 쌓여 있어야 했다. 하여 혈륜으로 홍천기공을 자극한 후 임맥 타통을 시켜줄 예정이었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미 황도로 향하는 관도처럼 뻥 뚫려 있지 않은가.

먹었다는 과일도 평범한 종류가 아닌 듯했다.

하긴 탈마는 회귀 전에도 홍천기공을 얻자마자 천하제일의 대도라고 불렸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가 없다. 오히려 회귀 전보다 더 강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훤은 노폐물을 정리하는 대신 탈마의 혈도 곳곳을 자극했다.

“대답하지 말고 잘 들어. 기경팔맥 중 임맥과 독맥은 주요······.”

탈마는 무공에 대한 자식이 종잇장처럼 얇다.

명칭을 설명하고, 전문 용어를 늘어놓아도 이해할 리가 없다. 결국 주의 사항과 반드시 파악해야 할 지식을 눈높이 교육으로 전달했다.

“턱 끝에서 고추가 있는 곳까지. 그리고 뒤통수에서 똥꼬가 있는 부분까지가 요혈이다. 다른 곳은 다쳐도 치료가 가능하지만, 척추를 중심으로 앞과 뒤는 자칫 잘못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회생불가의 상황에 처할 수 있어.”

명문혈을 자극하면서 말을 덧붙였다.

“여기 누르는 거 많이 봤지? 혈도라고 해서 다 같은 혈도가 아니다. 여기야 말로 잘못 찍히는 순간 기본이 반신불수야. 풍에 걸린 것처럼 된다고.”

머리에 든 건 없어도 한 번 넣은 건 흘리지 않는 녀석이다. 대략적으로 설명한 후 서서히 내력을 거두려는 순간 숲속에서 색마와 후기지수들이 등장했다. 색마는 이훤과 탈마의 자세를 보고 후기지수들의 입을 막았다.

잠시 후 이훤이 정수리에서 손을 떼자, 색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탈마는 어떻습니까?”

“뜻대로 되었다.

“참으로 잘 됐습니다!”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색마의 반응은 탈마의 기연보다 이훤의 기쁨으로 인한 대리 만족일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는 사이 후기지수들은 절벽에 새겨진 글귀에 사로잡혔다.

“아······. 홍천기공이라고?”

“저게 무슨 글자지? 어디서 본 듯한데.”

떠드는 놈들은 서체를 제대로 모르는 녀석들이다.

그리고 몇몇은 호흡도 아까운 것처럼 입을 다문 채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복장만 봐도 신공부와 관련이 있는 자들일 터였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서체를 배웠으니 뜻을 해석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리라.

‘그래봤자 의미 없지만······.’

글자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러니 저들은 의미 없는 행위를 기연이라고 인식한 후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잠깐! 그 때도 이랬을 텐데?’

회귀 전 탈마는 이곳에서 홍천기공을 익혔다.

한데 만약 그처럼 글을 읽지 못하고, 운이 좋은 자가 있다면 글귀가 아니라 그림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 않은가. 결국 누군가 또 기연을 얻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탈마를 바라봤다.

‘제 것을 쉽게 나눠줄 놈이 아닌데······.’

의문은 금세 풀렸다.

운기조식에서 깨어난 녀석은 히죽 웃으며 귀엣말을 했다.

‘형님 오기 직전에 소천뢰를 몇 개 묻어놨어요.’

‘그건 또 언제 훔쳤냐?’

‘황보태웅 같은 놈이 평소에 소천뢰를 소지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녀석들은 꼬리를 말 텐데.’

결국 연회장에서 사라졌을 때 소천뢰도 찾았다는 소리였다. 과연 도둑질에 관한 행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 분명했다.

‘언제 터지는데?’

탈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도 처음이라 잘.’

콰콰콰콰쾅!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절벽이 부풀어올랐다.

동시에 분진이 흩날리며 폭발이 연이었다.

탈마가 손을 휘젓자 먼지가 저절로 밀려났다.

녀석은 그 광경이 신기한 듯 헤죽거리며 말했다.

“지금이네요.”

“치밀한 새끼.”

회귀 전에도 이랬으니 홍천기공을 얻은 자가 아무도 없었으리라.

이훤과 탈마가 키득거리는 사이 후기지수들은 난리가 났다. 누군가는 바위와 돌 조각을 모아서 글귀를 조합하려 했고, 누군가는 넋이 나간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또한 누군가는 조금이라도 더 해석하고자 기억을 더듬었다.

유일하게 냉정함을 유지한 사람이 예영영이다.

그녀는 이훤에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이 대협께서는 저거 보셨나요?”

“난 서법을 잘 몰라.”

이훤의 대꾸에 예영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가 알려드릴까요?”

“······.”

“이미 다 외웠어요.”

똑똑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이훤은 피식 웃으며 후기지수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들에게도 알려줘.”

예영영은 잠시 아쉬워했으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차피 무공이 일천한 그녀는 홍천기공을 제대로 익히기 어려웠다. 또한 무공에 큰 관심이 없기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이훤의 조언을 따라 후기지수들에게 빚을 지워두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제가 알려드릴 까요?”

예영영의 한 마디에 후기지수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예영영의 입만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아니! 우리 사이에 조건이라니요?”

“이런 상황에서도 거래를 하려 하다니 역시 상인의 욕심은 강호의 큰 해가······.”

하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불만이 잦아들었다.

본래 무인도에서는 밥 가진 놈이 대장이고, 함정에 갇혔을 때에는 탈출 방법을 아는 자가 신인 셈이다.

“장 소협. 연회장에서 제일 가까이 있었으면서 가장 먼저 도망가셨네요.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자신이 한 행동이 있다면 책임도 지셔야지요. 또! 왕 공자는 평소 서법에 능통하다며 자랑을 일삼았잖아요. 그런데 조금 전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홀로 글귀만 해석하시더군요. 그런 분이 욕심을 논해도 될까요?”

단체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지금부터 개별 조건을 제시할게요. 장 소협. 충진검문은 태산 동부에서 반 마장 정도 떨어진 곳에 전답이 있지요? 그걸 넘기세요. 두 해 전 생일 선물로 받으신 걸 알고 있어요. 다음은 유소협입니다. 반 년 전 강제로 진평표국을 흡수하셨지요. 그거 청도대상단에 넘기세요. 이번 일이 끝나면 중원으로 나아가야 하니 표국은 큰 쓸모가 있겠네요.”

개개인에 따라 세부적으로 조건이 제시됐다.

심지어 후기지수가 가부(可否)를 결정할 수 있을 수준의 조건이 아닌가. 마치 속옷 색깔과 수저의 개수까지 알고 있을 법한 정보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녀석도 징글징글하네.’

강호인이라면 비급 한 줄을 위해 가족도 버리고, 형제의 등에 칼을 꽂는 작자들이다. 한데 무공마저 내준 채 돈을 챙기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아! 저 정도면 전마라도 시켜줘야 하는 건가?’

어차피 회귀한 이상 소마를 찢어죽일 예정이 아닌가.

만약 빈자리를 채울 생각이라면 전마(錢魔)도 좋은 후보감이 되리라.

이훤에게는 예영영의 용도를 재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후기지수들에게 신경을 끊고, 탈마에게 집중했다. 저들끼리 놀고 있으니 이쪽도 마냥 쉴 수는 없지 않은가. 한데 탈마를 불러들이는 순간 홀로 동떨어져 있는 악설이 눈에 띄었다.

“벽력창 악 대협의 필체지?”

악설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하나 이내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법에 능하신 줄은 몰랐지만, 그분의 필체가 확실해요.”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

이훤의 물음에 악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생명의 은인에게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으리라. 하나 당사자인 이훤은 그다지 크게 궁금한 상태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꼴을 살펴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상황이 그려졌다.

‘산동악가가 하루 아침에 황보세가를 넘어섰다면 악재가 신마의 깨달음을 모조리 전했다는 뜻과 마찬가지지.’

무당파의 천문진인은 죽기 직전 신마의 깨달음을 비급으로 만들어서 남겨놓았다. 하나 그것을 후회했기에 쌍선에게 일러 회수를 명하지 않았던가. 한데 악재는 아예 가감 없이 깨달음을 전한 듯했다.

이해는 갔다.

무당파는 언제나 강했고, 악가는 약자였다.

전자는 가진 것이 많으니 자제할 수 있었고, 후자는 그렇지 못했다. 절명곡의 여섯 생존자들이 끝까지 맹세를 지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전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서 무슨 일이 생겼겠고······.’

아마 벽력창 악재는 천룡전의 접근을 막기 위해 벽하원령칠채대진(碧霞元靈七彩大陳)을 설치했으리라.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청의인이라는 새끼는 저기 있겠네.’

그는 숲 너머로 우뚝 솟은 봉우리를 올려다봤다.

안개 사이로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였다.

그 말인즉슨 천룡전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진법 사이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까지 진법이 흩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깨진다고 해도 신마의 깨달음을 오롯이 지닌 자가 천룡전의 하수인에게 당할 리 만무했다.

‘재밌네. 아주 재밌어.’

고개를 돌려 아래쪽을 바라봤다.

수해를 방불케 할 만큼 우거진 수풀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황보세가든 누가 됐든 저곳을 지난다면 흔적이 남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이야 말로 최적의 요충지가 아닌가 싶다.

며칠 쉬었다가 가도 될 만큼 말이다.

“탈마야!”

그렇게 수련을 시작했다.

영과(靈果)로 인해 단전을 가득 채운 내공의 운용부터 가르쳤다.

“튕겨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건넸다.

파직!

탈마가 튕기는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녀석은 자신의 무위가 대단하다며 좋아했다.

뒤통수를 후려쳤다.

“조절을 해야지. 숨을 쉬는 것처럼. 딴 짓을 하면서도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수발이 되어야 해.”

“그게 무슨 말인지?”

“주머니에서 물건 훔칠 때 온 신경을 집중 하냐?”

“아니죠. 그 때야 말로 무념무상의······. 아! 그렇구나.”

탈마의 장점은 본능이자, 감이다.

그렇기에 방향만 맞춰주면 알아서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 색마는 그 사이 아래쪽의 수풀을 오가며 적의 동태를 살폈다. 개방의 비전인 취팔선보는 바위산이나 나무 위를 오가기에 제격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지가 좋은 곳만 밟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믿고 맡겼다.

그 말 한 마디에 색마는 잠도 줄인 채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후기지수들은 며칠 전 연회장에서 일어난 혈겁을 잊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예영영의 설명과 무인들이 머리를 맞대니 어려운 구결이 술술 풀려 나왔다. 집단지성의 힘이라며 자화자찬 하는 꼴을 보니 우습기만 했다.

‘저거 익혀봐야 별 쓸모없을 텐데.’

애초에 필체가 뒤섞여서 어려웠을 뿐 구결 자체의 내용은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것처럼 손쉬웠다. 벽력창 악재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익힐 수 있다면 숨겨둔 오의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여긴 듯했다.

오히려 탈마가 관심을 보였다.

“신경 쓰지 마. 내가 해봤는데 의미 없다.”

“언제요?”

이훤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로 다 익혀봤어. 네가 익힌 것과는 천양지차의 위력이니 쓸데 없는 곳에 심력 낭비 하지 마라.”

진짜 홍천기공은 일반 무학과 궤가 달랐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수리의 백회혈로 양기를 받아들이고, 사타구니의 회음혈을 통해 음기를 뽑아 올렸다. 그것을 몸뚱이라는 그릇에 담아 뒤섞는 것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일주일 사이에 절정을 그냥 넘겨 버리다니······.’

신마의 깨달음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악재의 노고에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탈마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산동악가는 얼마나 많은 발전을 이뤄냈겠는가.

‘이제 슬슬 실전을 해봐야 하는데.’

이훤은 후기지수들 중 쓸 만한 녀석을 고르기 시작했다. 기왕이면 탈마가 기분 좋게 이길만한 녀석으로 말이다. 한데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전 색마가 황급히 돌아왔다.

“형님, 아래쪽에서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황보?”

색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규모는 그대로?”

“아직 확실히 모르겠어요. 동굴을 통해서 개미떼처럼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이훤은 입술을 오므렸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하나 색마는 다급한 기색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위쪽도 동향이 심상치 않아요. 여섯 번 째 진법이 지금까지와 달리 변화를 보입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안개가 거꾸로 흐르고 있어요.”

그 말인즉슨 누가 진법을 통과하는 중일 터였다.

예영영이 눈치를 보다가 묘수랍시고 말을 건넸다.

“위아래에 적이 있으나, 다행히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듯해요. 그러니까 적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절벽 위로 올라가는 것이 어떨까요? 잘만 하면 저들끼리 양패구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색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습니다. 양 쪽 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닐 테니 대화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일은 없을 듯해요.”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탈마를 향해 손짓을 했다.

“준비해라!”

“무슨 준비요?”

“오늘부터 실전이야.”

탈마는 희희낙락하며 양 손을 연이어 내뻗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군요!”

예영영은 두 사람의 치기 어린 언행에 진저리를 쳤다.

“위에서 오는 건 천룡전이라며요? 황보세가야 이 대협의 신위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천룡전까지 더해지면 문제가...”

하나 이훤과 탈마는 술병을 기울이며 저들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난 위, 넌 아래.”

탈마가 은은한 기운을 흩뿌리며 입맛을 다셨다.

“좋지요! 드디어 강호출도로구나!”

< 46, 탈마, 무공을 얻다! (2)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