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탈마, 무공을 얻다! >
46, 탈마, 무공을 얻다!
진법이 만능이었다면 천하제일의 간판은 제갈세가나 모산파, 또는 신공부와 같은 곳이 차지했으리라.
하나 고수에게 진법이란 가시밭길에 불과했다.
막대기로 가지를 걷고, 넝쿨을 밀치면 길이 열리지 않던가. 그만큼 대상자의 무위가 강해질수록 진법의 영향력은 약화됐다. 고강한 무위란 곧 심신의 조화를 바탕으로 했고, 평정심을 자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독이나 암기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지경의 고수라면 독과 암기, 진법 따위가 무의미했다.
이훤은 절대지경의 고수가 아니다.
하나 천공혈륜겁이라는 사기적인 신공으로 인해 그들의 흉내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 혈륜으로 인해 심신의 조화가 이뤄지고, 평정심이라는 비료를 무한대로 뿌려댔기 때문이다.
끼이이이이이익-
귀신의 울음이 귀를 찢을 것처럼 꽂혀든다.
이훤은 인상을 쓰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안개가 슬쩍 걷히며 허공에 매달린 대나무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을 파낸 대나무의 겉면에 불규칙한 구멍을 파놓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를 통해 기이한 소리가 울리는 구조였다.
“진법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거기서 거기로구먼.”
회귀 전 제갈세가의 양조장을 숨어들어갔을 때가 자연스럽게 뇌리를 스쳐갔다. 평범한 양조장이었음에도 온갖 진법과 기관을 도배를 해놓지 않았던가.
물론 술은 맛이 없었다.
“어이쿠!”
이훤은 발을 디디려다 슬쩍 뗐다.
아니나다를까 손가락 한 마디만한 풀밭 사이사이에 침을 꽂아놨다. 침을 뽑아서 맛을 보니 혀가 얼얼하다. 아마 마비독을 발라놓은 듯했다. 주변 풍광과 함정의 상태를 살펴보니 이곳에 들어선 자는 늪에 빠진 듯한 환영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번잡스러워. 차라리 그곳이 좋았어.”
이훤은 진법 속의 주원경을 떠올렸다.
술만 생각하면 무한대로 튀어나오던 세상.
그리웠다.
쉬익!
후기지수 중 한 명에게 빼앗은 검을 휘두르는 순간 좌우에서 꽂혀드는 작살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그리워.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
그렇게 네 개의 진법을 돌파했다.
이훤은 날이 나간 검을 돌려준 후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희들은 언제까지 쫓아오려고?”
그에게 필요한 건 악설 정도다.
십여 명의 후기지수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연회장에서 황보태웅에게 아부를 할 때처럼 비굴하게 웃음을 보였다.
“대협의 신위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황송해서······.”
“이런 진법을 펼쳐놓았다면 분명 사마외도이겠죠!”
“그리고 이것도······.”
이훤은 후기지수들이 짊어지고 있는 술항아리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다섯 걸음.”
“네?”
“그 이상 붙지 마라. 친한 것처럼 보이잖아.”
후기지수들은 어정쩡한 자세로 거리를 벌렸다.
이곳에서 이훤의 말은 곧 신의 한 마디와 같았다.
“탈마야.”
“왜요?”
고천락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태산에만 올라오면 당장 엄청난 무공을 익힐 것처럼 띄워놓더니 아무 소식이 없어서 골이 났나 보다.
이훤은 그런 녀석을 잡아끌고 진법 앞에 세웠다.
“여기다.”
고천락은 음산한 숲속의 작은 길을 마주하고 진저리를 쳤다. 하나 이곳을 지나가면 무공을 깨우칠 수 있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가면 되요?”
“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할 수 있어.”
이훤은 고천락을 격려했다.
‘라고 회귀 전 네가 그랬단다.’
회귀 전 고천락이 태산에 오른 건 무림맹이 진법을 깨고 등정할 때였다. 일곱 개의 진법은 벽하원령칠채대진(碧霞元靈七彩大陳)이라 불렸단다. 무림맹이 네 개의 진법을 깨고, 다섯 번째를 깼을 때 무인들 앞에 거대한 절벽이 등장했다.
그곳에 홍천기공이 새겨져 있었다.
- 네 번째까지는 몰래 따라갔지요.
- 한데 다섯 번째를 보는 순간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 훔칠 게 있다! 이건 내 것이다!
그렇게 다짜고짜 들어갔단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홍천기공을 발견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일부러 무공도 가르치지 않고, 그 때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게 만들어놨으니······.’
이번에도 고천락은 탈마로 훌륭하게 태어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그럼 먼저 갑니다!”
녀석은 옆집에 놀러가는 것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마치 어둠의 장막을 지나친 것처럼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헉! 탈 대협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요?”
예영영의 해괴망측한 호칭에 대한 타박은 둘째치고라도 자세가 요상했다. 소룡대연에서만 해도 소 닭 보듯 하던 악설의 곁에 찰싹 붙어서 언니동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넌 머리가 좋은 것 보다 생존력이 좋은 것 같아.”
이훤의 말에 예영영은 방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칭찬 감사해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니 화답을 해줬다.
“너도 다섯 걸음 뒤로.”
“네? 갑자기 뒤로 빠지라니요.”
“응. 빠져.”
이훤이 냉정하게 손을 내젓는 순간 관자림이 끼어들었다.
“형님, 그런데 탈마를 저렇게 들여보내도 되는 겁니까?”
예영영의 생존력이 뛰어나다면 관자림은 친화력이 엄청났다. 어느 순간부터 호칭을 바꾸더니 고천락과도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고천락은 개미굴에서 만났던 종초홍을 꺼려하지 않았던가.
하나 관자림과는 마치 회귀 전의 친분이 이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관자림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색마라 칭했고, 고천락을 탈마라고 불렀다.
하여간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천락, 아니지! 탈마는 그래도 돼.”
“형님께 무슨 복안이 있는 거군요. 역시 예상대로 대단하십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예상하지 말아다오.
이러다 온천이나 연못이라도 발견하면 함께 목욕을 하자고 달려들지는 않을까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일단 쉬자.”
이훤의 말에 후기지수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그들은 저마다 제 덩치만한 항아리를 짊어지고 있었다. 대부분 술이었고, 음식도 제법 쌓였다.
모두 적들의 식량 창고를 털어서 모은 것이다.
“형님, 술 한 잔 하실까요?”
“어, 그래.”
색마는 후기지수들을 향해 외쳤다.
“술을 다오.”
후기지수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항아리를 먼저 비울수록 몸이 편안해진다.
그렇기에 남은 이들 중 가장 세력이 큰 방파의 후기지수가 슬쩍 나섰다.
“잠깐!”
색마는 후기지수를 제지하더니 술을 먼저 맛봤다.
이훤은 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못 본 걸로 하자.’
잠시 후 색마가 빙긋 웃으며 술병을 건넸다.
술을 한 모금 들이키려는데 색마의 일갈이 들려왔다.
“신공부나 그쪽 방계 출신이 있는가?”
후기지수 중 두어 명이 손을 들었다.
“잘 됐네. 우리 형님이 즐겁게 드실 수 있도록 시를 읊어봐. 기왕이면 술을 좋아하던 명사로 부탁해.”
이훤은 표정을 굳혔다.
‘눈치 빠른 거 보소.’
입안의 혀처럼 구는 녀석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다. 희대의 간신을 데리고 있는 황제가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편하기는 한데 불편했다.
이내 후기지수의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고,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이훤은 혀를 차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사이 예영영이 방긋 웃으며 관자림에게 다가섰다.
“조금 전에 이 대협께서 저를 멀리하시려 할 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나 관자림은 불결한 것을 마주한 것처럼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언제요?”
이훤은 그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미안함이 존재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녀석만은 살리고 싶었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나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시킬 것이다.
설령 천룡전의 개종자들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삼 일이 흘렀다.
더 이상 읊조릴 시가 없었고, 재주랍시고 보여주던 춤도 시큰둥해졌다.
이훤은 술잔을 내려놨다.
“안되겠다. 들어가야겠어.”
“형님! 조금 더 탈마를 믿고······.”
색마가 만류했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색마를 내려다봤다.
“이 녀석아, 탈마가 먼저야. 그러니까 적당히 해. 옛 인연이라고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누가 뭐라 해도 회귀 전의 인연은 탈마가 우선이다.
심지어 회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색마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 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진법이 해제되면 따라 와.”
이훤은 그 말을 남기고 진법 안으로 뛰어들었다.
솨아아아-
음산한 바람이 진법에 들어선 것을 환영했다.
하나 뜬금없는 외나무다리와 죽창을 거꾸로 꽂아놓은 대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은 광풍이 부는 절벽 사이에 놓인 다리를 보면 일단 멈춘다. 죽창을 거꾸로 꽂아놓았다면 본능적으로 진저리를 칠 것이다. 하나 애초에 흔들림이 없으니 환영 너머의 진체가 훤히 보였다.
‘진법을 파해한 건 아니라고 했어.’
그렇기에 진법의 구조가 훤히 보였음에도 망가트리지 않고 내달렸다. 진법을 관통하는 내내 탈마를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무공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고천락이다.
귀호영체술이라는 희대의 술법이 아니었다면 저자의 양민과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한데 그런 녀석이 무림맹의 진법가들도 며칠씩 붙잡혀 있어야 할 진법을 파해했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훤은 탈마의 진짜 힘은 귀호영체술보다 다른 것이라고 여겼다.
바로 본능이다.
훔치겠다는 욕망.
고천락의 욕망은 이훤의 술 욕심보다 한 수 위였다.
최소한 이훤은 목숨을 걸고 술을 훔치지는 않았다.
결국 욕망을 제외한 모든 감정을 뒤로 한 채 훔치는 것에 열중하니 그 또한 다른 의미의 평정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훔칠 것이 있을 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이훤은 그렇기에 나쁜 결말을 생각지 않고, 진법을 돌파했다. 한데 그가 나아갈수록 진법의 영향력이 옅어졌다.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서서히 소멸했다.
솨아아아아-
자욱하던 안개가 한순간 걷혔다.
진법이 해제된 게다.
‘설마 녀석 때문에?’
이내 거대한 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앞에 탈마가 앉아 있었다.
“형님! 왔습니까?”
생각보다 멀쩡했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무공은?”
“다 얻었죠.”
홍천기공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무공이었던가. 무공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고천락이 며칠 사이에 홍천기공을 익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그렇고, 그럼 왜 안 나왔어?”
탈마는 이빨이 모두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었다.
“형님한테 자랑하려고요.”
“뭘?”
이훤의 반문에 녀석은 절벽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절벽을 향했다.
“아······.”
절벽을 마주하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수천 자로 이뤄진 비결이 빼곡하게 적혀 있지 않은가.
“연자여, 홍천기공이란 광활함을 열어 기를 받아들이니······.”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오래 전 즐겨보았던 영웅담의 기연처럼 전형적인 문구로 시작됐다. 한데 글자는 제대로 새겨놨으나, 필체가 다양하여 쉬이 읽을 수가 없었다.
“예서체. 아닌가? 행서체인가?”
필체(筆體)란 대중적인 것도 있지만, 명사가 개인적으로 만들어낸 후에 유행하는 경유도 존재했다. 그렇기에 필체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였고, 그 중 유명한 것을 손꼽아 십여 개에 이르렀다.
한데 이훤은 회귀 전부터 서체에 큰 관심을 둔 적이 없다. 육대괴마 중에서 소마나 한마 정도가 시문을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절벽에는 보통 열 글자마다 필체가 바뀌었다.
“이거 신공부의 유명한 학자가 남긴 건가?”
하나 싱글벙글 웃고 있는 탈마를 보고 있자니 그건 아닐 터였다. 이훤은 무공에 대한 지식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종잡을 수 없고, 탈마는 며칠 만에 익혔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혹시 이거 그림이냐?”
탈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마 곤란해 하는 이훤을 놀려주려고 이 모든 걸 계획한 듯했다. 녀석은 재미없다고 몇 번이나 투덜거리더니 이훤의 곁에 섰다.
“어떻게 알았어요?”
“너, 글자 못 읽잖아.”
탈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회귀 전의 기억을 지닌 이훤에게는 단순한 정보였지만, 탈마에게는 너무나 큰 비밀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 그러고 보니 개미굴에서도 제가 무당파의 비급을 들고 뛰었는데도 의심하지 않더라니.”
이훤은 탈마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형은 다 알아. 임마!”
“아! 무슨 엄마도 아니고! 쳇! 이번 일로 겨울까지는 놀려먹으려고 했는데.”
하나 알고 있는 것과 이해는 별개의 문제다.
이훤은 절벽을 한참동안 쳐다봤지만, 그림으로 보이는 원리를 찾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을 알고 있으니 아무리 그림이라고 생각해도 머리는 뜻을 해석하고 있었다.
“하여간 제대로 익힌 건 맞고?”
“네. 겸사겸사 과일도 있기에 다 먹었어요.”
제대로 된 기연이다.
이훤은 영과가 분명했을 과일이 하나도 남지 않았지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탈마의 미래가 바뀌지 않았음에 안도했을 정도였다.
‘나를 만나서 패가망신하는 건······.’
화산의 반덕구로 족했다.
이훤은 탈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잘 됐다.”
< 46, 탈마, 무공을 얻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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