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여태껏 이런 파해법은 없었다. >
45, 여태껏 이런 파해법은 없었다.
태산(泰山).
오악 중 동쪽에 있다 하여 동악(東岳)이고, 혹은 신선의 집터라는 뜻으로 대종(垈宗)이라고도 했다. 한때 나라를 세운 이들은 태산을 천하제일이라 여겨 산꼭대기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하나 강호에서 평가하는 동악은 달랐다.
오래 전 태산파가 멸문한 이후 오악 중에서 유일하게 강호 방파가 터를 닦지 않은 유일한 명산이다. 그만큼 태산파의 몰락이 흉험했기에 풍수지리를 따져 태산을 멀리했다.
한 마디로 주인 없는 산이다.
모두가 눈치를 보던 곳에 뿌리를 내린 게 바로 산동악가였다. 산동악가가 산기슭에 자리를 잡은 이후 태산은 그들의 것이 되었다.
당연히 봉선 의식을 치르던 정상도 통제됐다.
한때 태산부군의 딸인 벽하원군(碧霞元君)의 위패를 모신 옥황묘(玉皇廟)는 도가의 성지라고 불릴 정도였다. 하나 무림맹조차 옥황묘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바로 벽처럼 자욱하게 퍼져 있는 안개였다.
“이 빌어먹을 안개를 언제까지 봐야 하는 겁니까!”
말만 들으면 화가 잔뜩 난 사람이다.
하나 휘어진 눈매와 호선을 그린 입매, 거기에 더하여 목소리는 옥구슬이 굴러가듯 낭랑하기만 했다. 웃음을 제외한 모든 감정을 지우고, 사색사도만이 내비칠 수 있는 기괴한 표정이었다. 푸른색으로 두건부터 신발까지 맞춰 입은 청의인은 철옹성처럼 막아선 벽옥 빛의 안개를 보며 한 숨을 흘렸다.
푸르스름한 안개.
일견하기에도 자연의 섭리와는 무방했다.
“아무래도······.”
초로의 산지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쪽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청의인의 눈에서 묵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는 손을 펴고 산지기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
하나 정수리에 닿기 전 멈춘 채로 눈을 질끈 감더니 한 숨을 연이었다.
“하아, 이제 몇 놈 남지도 않았으니 죽일 수도 없군요.”
지금까지 안개를 뚫기 위해 동원된 인력만 해도 천여 명에 이르렀다. 눈앞의 산지기는 수십 년 간 태산에 살았기에 눈을 감고도 막힘이 없는 귀한 존재였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온다 해도 산지기보다 낫다는 보장은 전무했다.
“누가 설치했는지는 몰라도 이것이 마지막 결계입니다. 이것만 뚫으면 그대에게 삼대가 먹고 살 수 있는 금은보화를 내릴 것이에요. 알겠습니까?”
죽다 살아난 산지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의인은 잠시 물러섰다.
그러자 장막처럼 펼쳐진 벽옥의 안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미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안개 근처를 돌아다니며 연구를 하는 상태였다.
산지기, 약초꾼, 신공부의 학사, 기관진식의 대가를 비롯해 결계나 진법과 관련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모았다. 세뇌를 하고, 돈으로 매수하고, 야밤에 납치까지 해서 모아온 인력이 아닌가.
십 년에 걸쳐 뚫고 있는 진법도 이제 마지막이다.
하나만 뚫으면 수십 년 간 세상에서 지워졌던 벽하원군의 옥황묘가 나타날 터였다.
‘그 마지막에 칠 년 동안 매달릴 줄 누가 알았을까?’
청의인은 호흡을 골랐다.
거꾸로 생각하면 진법이 존재하기에 그도 존재할 터였다.
절명곡의 여섯 생존자 중 한 명.
산동악가 출신의 벽력창 악재가 목표였다.
‘산동악가의 급격한 성장은 악재가 신마의 깨달음을 전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악가가 황보세가를 단박에 뛰어넘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산동악가가 오대세가의 일원이 되었을 때 태산에 진법이 늘어났다. 본래 외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간략한 진법이 전부였거늘 어느 순간부터 제갈세가도 뚫지 못하는 절진이 겹겹이 생성된 게다.
하여 감각사도들마저 벽력창 악재를 포기했다.
‘어려운 길을 택했을 때의 달콤함은 나 혼자만 맛볼 수 있지.’
강호에는 여전히 다섯 명의 생존자가 존재했고, 악재보다 확보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청의인만은 십 년 넘게 벽력창 악재를 쫓았다. 단순히 기억만하고 있는 자들과 다를 것이라 여겼다. 이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응용이 된 깨달음일 것이니 확보만 한다면 천룡전의 가장 높은 자리도 꿈은 아니리라.
한데 청의인의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하의 물음에 절로 한 숨이 흘러나왔다.
이러다가는 시름에 잠겨 상(相)이 깨지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될 정도였다.
“또 뭡니까?”
“무림맹이 개입했습니다.”
“갑자기요?”
“극양도군을 필두로 천풍삼군과 독린왕이 산동지부에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창무검제도 보였다는군요. 하여 외곽에 수하들을 풀었더니 변복을 한 무리가 태산의 초입으로 집결 중이랍니다.”
청의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지을 수 있는 표정 중에서 가장 화가 났을 때에나 볼 법한 웃음이리라.
“흑의, 그 개종자가 십 년 공든 탑을 무너트리려고 하는군요. 백의나 사군사도처럼 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외곽의 진법을 강화하라고 명하세요.”
청의인을 비롯한 무인들은 이미 여섯 개의 진법을 돌파한 상태였다. 그리고 단순히 돌파했을 뿐 아니라 완벽한 운용이 가능했다. 제갈세가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학자들의 힘이었다.
한데 수하가 표정을 더욱 굳혔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 첫 번째 진법에 들어섰습니다.”
“뭐라고요? 아래쪽에서 아무 보고도 없었잖아요.”
“아무래도 비밀 통로를 통해 중턱까지 오른 듯합니다.”
청의인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하하하하! 하늘이 이런 시련을 내려주는 걸 보면 조만간 진법이 입구를 열어줄 듯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하나 맑은 웃음과 달리 목소리는 서늘하기 짝이 없다.
오랜 세월 보조를 맞춘 수하는 청의인의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
“지금 당장 전력을 투입해서 진법을 파해한다! 죽어도 좋으니까 그냥 밀어 넣어! 그리고 이미 실패한 자들은 아래쪽의 진법을 극상으로 운용하라! 단 한 놈도 여기까지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산 중턱을 휘감고 있는 안개가 더욱 짙어졌고, 이내 귀기가 감돌며 귀곡성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솨아아아아아아아-
*
육대괴마(六大怪魔).
좋은 녀석도 있었고, 나쁜 녀석도 있었고, 귀찮은 녀석도 있었다.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다. 하나 회귀 전 대부분의 삶을 함께 보낸 이들을 손꼽자면 육대괴마가 전부였다.
그랬던 녀석들이 한 자리에 나타났다.
그래서 단칼에 베어버렸다.
“다 꺼져라!”
그도 그럴 것이 풋풋한 고천락 대신 삶에 찌든 탈마였고, 생기발랄한 관자림 대신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색마가 나타났다. 검마와 한마도 그랬고, 심지어 소마조차 백의인이나 흑의인과 달리 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 소마였다.
가짜다.
기억 속에서 재구성 된 환영에 불과했다.
하여 이훤은 괴마들이 나타날 때마다 망설임 없이 베었다. 그러던 중 회귀 전 치고 박고 싸웠던 고수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친했던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지 않던가. 그랬기에 또 망설임 없이 죽였다.
만약 가족이라도 있었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걸 위한 진법이었으리라.
“귀찮네.”
이훤은 혀를 찼다.
진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파해는 별개의 문제였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묶여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심지어 색마와 탈마에게 진법 따위는 아무 위해가 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까지 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며칠 만에 술을 마셨더니 기분이 너무 좋아진 듯했다.
“대형! 내가 새로 초식을 만들었소!”
호기롭게 달려오는 검마를 베었다.
녀석은 어찌 자신에게 검을 휘두를 수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래도 될 관계였다.
“아! 혹시 망아취자도 나오나?”
이훤의 중얼거림에 안개가 심하게 요동을 치더니 망아취자가 등장했다. 술을 마시며 목검을 휘휘 젓는 모양새가 낙안봉에서 보았을 때와 똑같았다.
그가 안면몰수 한 채 득달 같이 달려들었다.
검풍과 검기가 수백 개로 흩어지고, 검강이 낙뢰처럼 쉼 없이 내리꽂혔다.
하나 약했다.
이훤은 회귀 전부터 수많은 함정과 진법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기관이나 진법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한 가지를 익혔다.
진법으로 만들어낸 환영의 핵심은 기억의 변형이다.
한 마디로 대상자의 기억이나 성향, 마음 상태로 인해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였다. 절대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의 약한 면을 파고드는 것이 진법의 핵심인 셈이다.
그러니 이훤에게 있어서 진법이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첫 째가 바로 천공혈륜겁이다.
이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평정심을 얻지 않았던가.
둘 째가 바로 이훤의 성향이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자신의 위로 둔 적이 없다. 애매하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으니 결국 상승불패(常勝不敗)였다.
결국 진법 내에서 망아취자의 강함은 의미가 없다.
그저 이훤의 평가가 곧 환영의 수준인 셈이다.
“어이쿠! 반만 베면 징그러우니까 완전히 베어드릴 게요!”
혈륜에 휘감긴 검이 반만 베여서 덜렁거리던 망아취자의 목을 완전히 쳐버렸다.
“어!”
이훤은 땅에 떨어진 망아취자의 머리가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음에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조용히 좀 해 봐요.”
검이 언제부터 있었더라?
그는 빈손으로 진법에 들어섰다.
한데 분명 낙안봉에서나 들고 다녔던 검이 오른손에 존재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망아취자가 등장했을 때 낙안봉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나도 검으로 상대해야겠다!’ 라고 중얼거렸으리라.
“아······.”
이훤은 빙긋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방팔방에서 온갖 귀곡성이 울리고, 귀기가 쉴 새 없이 피부를 찔렀어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어디 보자.”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읊조렸다.
“육태천화서봉주.”
화산의 수련관에서 머물던 당시 노군동주의 술을 훔쳐 마시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노군과 망아취자를 알았고, 화산과 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손에 병이 잡혔다.
비록 구멍이 난 술병만 보았었지만, 이것은 완전한 술병이다. 마개를 뽑는 순간 익숙한 주향이 흘러나왔고, 이내 극락세계에 온 것처럼 미소가 지어졌다.
“크하!”
시냇물에 섞인 술을 마시면서 얼마나 아쉬웠던가. 그리고 비록 깨졌지만, 온전한 술을 발견하여 마셨을 때에는 얼마나 기뻤던가. 육태천화서봉주를 마시는 순간 그 날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크아! 좋다.”
도연명의 시가 뇌리를 스쳐간다.
이훤은 술병을 기울이며 시를 읊었고, 주변을 날뛰던 잡귀들의 공세는 춤처럼 분위기를 돋웠다.
“가짜라고 했던 것 취소! 이건 진짜여야 해!”
몇 병의 술을 마셨을까?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마셔봤던 명주라는 명주는 죄다 소환하여 마셨다. 비록 술이라고 마셔봤자 머릿속에 남은 기억일 것이 분명했다. 하나 눈앞에 형상화 되어 있으니 진짜 취기가 오르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훤은 회귀 전 무림맹주가 먹다 남겼다는 비전의 술을 떠올리며 소리를 질렀다.
“주원경이 따로 있더냐!”
취마(醉魔)가 앉으면 그곳이 주원경이다.
느낌 상 취기는 한없이 올랐고,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하나 정신은 더욱 맑고, 눈은 더욱 또렷했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팔 성에 이르렀으니 혈륜이 휘돌수록 자연지체에 버금가는 평정심이 갖춰졌다. 그 순간 손에 쥔 술병도, 악귀도, 육대괴마도 하나둘 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아! 잠깐!”
이훤은 소마가 사라지기 전 전력을 다해 찢어발겼다.
환영이지만 갈가리 흩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진득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말도 안 되는 방식을 통해 자욱했던 안개가 사라졌다.
“아쉽네.”
탈마와 색마가 뒤늦게 안개가 있던 곳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숲처럼 보였던 곳이 천 길 낭떠러지임을 알고 대경실색했다.
“형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찼다.
“진짜 주원경을 보고 왔느니라.”
< 45, 여태껏 이런 파해법은 없었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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