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술을 다오! (2) >
금주 끝, 음주 시작.
이것은 살육을 의미했다.
화산파의 연례 비무로 회귀했을 때만 해도 이번 생은 느긋하고, 평안할 것이라 여겼다. 한데 이쯤 되면 사람을 죽이기 위해 회귀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분노를 조절하기 어려웠다.
이훤은 이것을 세상의 탓으로 돌렸다.
“강호가 이따위니! 정파가 그따위니! 힘없는 자들이 고통 받고,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거잖아.”
그들을 대신해서 복수를 하고,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눈꼽 만큼도 없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개 같은 짓거리에 울화가 치밀 뿐이다.
복면인들은 이훤의 울부짖음에도 검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동료들이 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리라. 그만큼 이 통로는 은밀한 장소였고, 이곳까지 찾아온 상대방을 경계하는 것일 터였다.
그래, 더 부르고, 더 뭉쳐라.
‘한 번에 쓸어버리면 편한 건 이쪽이니까.’
이훤은 공동의 천장을 올려다봤다.
있는 힘껏 뛰면 겨우 닿을 만큼 높다.
일견하기에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이것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텐가. 생각만으로도 욕지기가 일었고, 취기로 인해 호흡이 거칠어졌다.
“돌파해서 동굴의 입구를 막아라. 그리고 모두 죽여라!”
적의 수장이 외치는 한 마디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나도 그렇게 해주마!”
이훤은 일 장 아래의 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적들은 이훤이 내려서는 순간 공세를 펼쳤다.
하나 이훤의 신형은 붉은 안개처럼 퍼지더니 이내 좌우로 흩어진 채 자취를 감췄다.
“헙! 놈이······.”
“여기다!”
복면을 쓴 놈의 허리를 후려쳤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여!”
수장이 있는 힘껏 외쳤지만, 수하들에게는 공허한 염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였고, 막상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퍽! 퍽!
처음에는 한 방에 한 명씩 쓰러졌다.
하나 붉은 안개가 뭉쳐서 핏덩이가 되는 순간 서너 명씩 튕겨나갔다. 피를 토한 채로 나뒹굴던 이들은 단 한 명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저, 저게 사람의 몸놀림인가?”
생존자 중 한 명이 장내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산동성은 강과 산, 그리고 바다로 인해 남쪽을 제외하면 꽉 막힌 지역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 곳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곳이 바로 황보세가요, 산동악가요, 신공부였던 셈이다. 한데 생존한 후기지수들은 동네 왕에게도 미치지 못할 만큼 어쭙잖은 세력의 후계자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신위를 목도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다, 다행이다.”
누군가 밑도 끝도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후기지수들은 왜인지 모르게 덩달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하나 예영영과 악설만은 후기지수들처럼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없었다.
‘예전 아버지의 상행을 따라 남궁세가에 갔을 때에도 저런 고수는 보지 못했어.’
예영영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황보세가와 산동악가라는 거대한 벽으로 인해 동해에 갇혀 있던 청도대상단이다. 하여 지근거리인 남궁세가나 무림맹을 가려고 해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했다. 한데 이훤으로 인해 만약 황보세가가 무너진다면 대륙으로 나갈 길이 열리는 셈이다.
‘더 잘 보여야겠어.’
그녀는 이곳을 빠져나가면 당장 구할 수 있는 술 목록을 떠올렸다.
반면 악설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강하다. 너무 강해. 마치······.’
지금은 세상을 떠난 조부가 떠오를 만큼 강맹한 신위에 호흡을 가다듬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사람 대여섯 명이 목마를 타야 닿을 법한 동굴의 천장을 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정말 이곳 위에 태산이 있는 건가?’
산동성의 땅은 대부분 황보세가의 것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산동성에 군림했고, 모든 것을 독차지했다. 오직 한 가지 얻지 못한 것이 바로 태산이었고, 산동악가의 본거지였다.
땅에 황보세가가 있으면 하늘에 산동악가가 있다.
오대세가를 논할 때 늘 듣던 말이 아닌가.
만약 천룡전이라는 신비 조직이 태산 아래 땅굴을 팠다면 산동악가를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악설은 철창을 만지작거리며 부르르 떨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결심을 내렸다.
‘그래, 저들은 악이다! 그리고 잠재적인 본가의 적이야. 나도 도와야겠어!’
창을 고쳐 잡고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이었다.
피로 물든 일진광풍이 몰아치더니 장내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이훤만이 홀로 우뚝 서서 반대편 동굴로 향하고 있었다.
“탈마야!”
예영영은 낯선 호칭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고천락이 반대편 입구에서 돌아왔다.
언제 저곳에 갔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예, 형님.”
“술 다오.”
“아까 그게 마지막인데요.”
“그럼 찾아와.”
고천락은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사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예영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 이훤은 스스로를 가리켜 취마라고 했다. 한데 고천락은 탈마란다. 그렇다면 두 사람과 함께 있던 관자림도 별칭이 있을 터였다.
“색마야!”
관자림이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예영영은 개마나 걸마와 같은 별칭을 생각하다가 색마라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나 그녀는 더욱 놀라게 만든 건 관자림의 표정이다.
‘나랑 대화할 때와는 딴판이야.’
왜인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색마라며! 색마라며 왜 나를 무시해?’
예영영은 눈에 불을 켜고 세 사람의 뒤를 쫓았다.
이렇게 된 이상 세 명 모두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결의도 덩달아 다짐했다.
“아는 대로 다 말해봐.”
관자림은 침을 흘릴 것처럼 헤벌쭉 웃었다.
“예! 이 대협. 그런데 저도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 까요?”
*
황보세가의 외단주인 황보철조는 통로를 발견한 이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매화군자는 예상 외로 강했고, 좁은 곳은 소수에게 유리했다. 그렇기에 기관에 능한 혼무대와 경공에 능한 패룡대원 몇몇을 차출하여 정찰을 보낸 상태였다.
“전서구는?”
“준비 됐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작은 쪽지를 살폈다.
- 매화군자 삼상(三上)
- 태산 향방 통로
매화군자의 무위가 대단하니 정보망에서 세 단계 올리자는 뜻이고, 태산 쪽의 통로를 발견했으니 뒤쫓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삼상이면 오대세가의 가주 급이다.
하나 황보철조는 그것도 부족하다고 여겼다.
멀리서 얼핏 본 것만으로도 눈으로 좇기 힘들만큼 빨랐다. 전력을 다해도 백중세를 유지하지 않을까 어림짐작할 뿐이다.
‘정중동이라 했다. 오히려 좁은 곳이라면 내가 유리해.’
황보철조는 수십 년 간 수련한 자신의 무공을 신뢰했다.
그렇기에 함정이 아니라는 것이 파악되자, 가장 먼저 통로에 발을 들였다.
*
무림맹 산동 지부는 때 아닌 귀빈을 맞이했기에 더없이 분주했다. 무인들은 지부장이 직접 나서서 맞이한 귀빈의 정체를 궁금해 했지만, 섣불리 입에 담지 않았다. 강호만큼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명언처럼 회자되는 곳이 어디 있으랴. 하나 그런 그들조차 산동지부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회의 내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크흠! 맹에 몇 번이나 투서가 올라왔소. 이것이 그 내용이외다.”
중년인이 십여 통의 밀지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 산동악가가 사파의 비전을 얻었다.
- 양민들을 납치하여 태산에서 음모를 꾸민다.
- 보물 창고가 남아 있다.
한 마디로 산동악가는 때려죽일 놈들이고, 배신자였으며, 좋은 걸 홀로 독차지하려는 욕심쟁이였다. 오대세가의 한 곳인 산동악가를 비방하는 내용이었지만, 좌중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밀지를 내던진 자의 정체 때문이다.
무림맹 내원에서도 서열 십이 위인 극양도군(極陽刀君)이 아닌가. 맹의 서열 삼십 위 권이면 구파오가의 주인과 독대하는 것이 가능할 만큼 높은 위치였다. 한데 극양도군의 곁에는 비슷한 무위를 갖춘 다섯 명이 함께 했다.
청성파의 천풍삼군(天風三君)과 사천 당가의 독린왕(毒鱗王)만 해도 산동지부장이 절절 매는 위치였다. 하물며 마지막 존재는 극양도군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명사가 아니던가. 천하를 통틀어 다섯 명 밖에 없는 검제(劍帝) 중 일익(一翼)이었다.
창무검제(蒼戊劍帝) 남궁채린.
오대세가라 묶여 불리지만, 남궁세가의 위치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그런 곳의 삼대 검호로 꼽히는 남궁채린이 수천 리 밖 산동성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부터 산동지부는 비상을 선포하고, 외부에 나가 있는 모든 무인을 불러들이시오.”
“예! 도군.”
산동지부장은 말단 무인처럼 각 잡힌 자세로 외쳤다.
“또한 황보세가와 신공부의 무인들을 불러들여 산동악가에 대한 공동 조사에 참여하도록 하시오.”
“예! 도군.”
극양도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좌중에 앉은 이들을 살폈다. 산동지부장이 믿을 만한 수하들이라며 불러 모은 지부의 정예 무인들이다.
“황보세가와 신공부가 합류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비밀로 부친다. 알겠는가?”
십여 명의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힘차게 외쳤다.
“예! 도군.”
극양도군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말했다.
“이틀 후면 맹의 무인들이 변복을 한 채 합류하게 될 것이외다. 이틀 후부터 바빠질 것이니 이만 나가서 볼 일을 보시오.”
지부장 휘하 무인들이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극양도군은 남궁채린을 보며 목례를 했다.
“검제께서 함께 해주신 덕분에 제 말이 더 잘 먹힌 듯합니다.”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함께 했으니 밥값은 해야지요.”
느긋한 한 마디였지만, 우연을 강조하면서 내비치는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극양도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하,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에 유명한 고인들이 없는지 물어본 것은 맞습니다. 하나 검제의 길과 달랐다면 굳이 제가 찾아가지 않았을 겁니다.”
남궁채린은 여전히 묘한 눈빛을 내비친 채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잠시 함께 하도록 하지요. 그럼 질녀가 기다리고 있으니 다음에 봅시다.”
“지부장이 연회를 준비했다니 저녁에 뵙도록 하지요.”
“알겠소.”
극양도군은 회의를 끝마쳤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떴지만, 한 사람만이 자리를 지킨 채 하품을 했다.
“후암! 저 놈들이 과연 얼마 만에 소문을 퍼트릴까요?”
“클클, 지부의 무인들이 지역 방파들과 암암리에 돈을 주고 받는 건 비밀도 아니지. 게다가 보물창고가 있다는 정보면 먼저 파는 놈이 임자일 게야.”
“내일만 되어도 태산 곳곳에 무인들이 가득하겠군요.”
극양도군과 독린왕 당창은 폭소를 터트렸다.
소문이 퍼지면 산동악가가 황보세가를 누르고 오대세가에 등극한 이유가 밝혀지는 셈이다. 산동성은 물론이고, 주변 지역의 방파들까지 똥을 본 파리처럼 달려들 터였다.
“모두 주작의 뜻대로 되는 게지.”
“당연하지요. 산동성을 피바다로 만들고, 산동악가가 꽁꽁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내면 되지 않습니까?”
당창은 슬쩍 입구를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겸사겸사 저 계집애 이름 같은 검제도 무덤에 같이 넣어버리면······.”
극양도군도 창무검제의 죽음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나 보다.
“클클, 장강의 남북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겠군. 하지만 실수가 없어야 가능한 일이야.”
당창은 혀를 찼다.
“도군, 너무 몸을 사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개미굴이나 화청궁의 덜떨어진 놈들과 궤가 다릅니다. 정파의 고명한 명숙이거늘 누가 우리를 의심한단 말입니까?”
극양도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지. 하나 잊지 말게. 우리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주작께서 홀로 남아 천룡의 후인이 되는 것이야. 그러니 창무검제를 묻을 때 태산의 주재자인 청의인도 함께 묻어야 함을 잊지 말게.”
“창무검제와 청의인이라니. 좋은 상대가 되겠군요.”
*
같은 시각.
이훤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색마와 탈마가 나타났다.
“아······.”
한데 그 옆으로 검마와 한마가 모습을 보였다.
“나랑 칼 한 번 맞대 보지 않겠소?”
“복수할 거야!”
회귀 전 지겹도록 들었던 목소리가 아닌가.
“씨발.”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놈이 빙긋 웃으며 나타나더니 손을 모았다.
“대형, 저와 재밌는 일 한 번 해보시지요.”
소마였다.
< 44, 술을 다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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