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08화 (108/226)

< 44, 술을 다오! >

44, 술을 다오!

황보세가의 외단주인 황보철조는 잿더미가 된 장원을 앞에 두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다. 하나 소가주인 황보태룡은 입이 댓발로 나온 상태였다.

“쳇! 그 놈을 내 손으로 정리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지나간 일이다.”

“하지만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황보철조가 고개를 돌려 황보태룡을 응시했다.

“약속? 아니지. 네게 베푸는 선물이자, 호의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구나. 그럼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마. 내게 있어서 너희들은 차이가 없다. 그저 황보세가의 부흥을 위해 알맞은 자가 필요할 뿐이야. 가주가 너를 택했기에 호의를 베풀고자 한 게다. 만약 네가 장원에 있었고, 황보태룡이 본가에 있었다면 가주의 선택이 어땠을 듯싶더냐?”

황보태룡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살아남고, 선택받은 건 운이 좋았다는 말이 아닌가. 무슨 대답을 하더라도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존심에 사처가 될 터였다.

“시신이라도 찾겠습니다.”

“그것까지 말리지는 않겠다.”

황보철조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에 서서 검을 만지작거릴 뿐이다. 황보태룡은 검을 뽑아들고, 황보태웅의 시신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더 비정하고, 더 교활하고, 더 치밀해야 한다.’

황보철조는 훗날 가주가 된 황보태룡이 자신을 해치려고 해도 개의치 않으리라. 자신을 죽일 능력이 된다는 건 그만큼 세가가 부강해졌다는 의미일 터였다. 한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패룡당주.”

“예, 외단주.”

“시신이 너무 적군.”

패룡당주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꾸했다.

“굉천뢰와 소천뢰가 모조리 폭발했습니다. 시신을 남기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적다. 너희들이 게으름을 피운 것이 아니라면 저것보다는 많이 나왔어야 해.”

“지금 당장 시신을 헤아려보겠습니다.”

“혼무대도 투입해서 잔해를 걷어내고, 시신을 발굴해라!”

“존명!”

황보철조는 미간을 좁혔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는 장원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려 했다.

한데 그 순간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장원은 본 가의 것이 아니군.’

황보태웅이 또래보다 많은 돈을 사용할 수 있다지만, 이처럼 거대한 장원을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씀씀이가 헤픈 황보태웅이 돈을 모았을 리도 없지 않은가.

“설마!”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장원으로 다가설수록 경공까지 펼치며 뛰었다.

그런 그를 패웅당주가 맞이했다.

“외단주. 후기지수들은 모두 연회장에 모여 있었습니다. 한데 저희가 입수한 참석자 명단에 비해 스무 명 정도가 부족합니다.”

“패웅당은 시신을 수습하여 산동쌍화와 황보태웅의 시신을 확보해라. 패룡당은 뭉쳐 있는 시신 말고 연회장 외곽에 따로 떨어져 있는 시신들을 찾아라.”

여전히 황보세가의 외단은 오백 명 정도의 규모를 유지했다. 두 부류로 나뉜 무인들이 내공까지 사용하며 시신을 살폈다. 그러던 중 패룡당주가 연회장 밖에 떨어진 시신들을 찾아냈다.

“이쪽입니다!”

외단주는 시신들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연회장 내부보다 시신의 상태가 괜찮았다. 특히 폭발의 여파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듯한 창고 근처로 향할수록 깨끗했다.

‘연회장 쪽에 여자가 많고, 창고 쪽으로 향할수록 사내가 많다 한데 사내들의 복장을 보면 무공이 강해보이지는 않아. 뒤쳐진 게로군.’

그는 당장 혼무대의 대주를 불렀다.

혼무대주의 사망 이후 부대주는 임시 대주가 되었고, 호기롭게 대꾸하며 달려왔다.

“이곳 어딘가에 은밀한 공간, 내지는 통로가 있을 것이다. 찾아라.”

그 사이 패룡당주가 달려와 짜증 나는 소식을 전했다.

산동삼화는 물론이고, 삼공자의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고였다.

“크흑!

다행히 혼무대주는 임시라는 직함을 떼기 위해 수하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 아래 놓인 철문을 발견했다.

“열어라.”

“잠겨있습니다. 한데 폭약을 모두 사용한 상태라······.”

외단주는 혼무대주의 말에 두 당주를 불러들였다.

“수하들에게 내공을 모조리 사용하게해서라도 뜯어내라! 지금 당장!”

*

고천락이 찾아낸 곳은 비밀공간이 아니라 통로였다.

횃불이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까지 사용된 장소가 분명했다.

이훤은 동굴의 상태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한데 대답해 줄 사람이 없다.

“쯧.”

그는 혀를 차며 통로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폭발의 여파에서 살아남지 못한 시신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황보태웅도 있었다. 애초에 가장 먼저 통로에 들어왔음에도 녀석은 지옥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천룡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주변의 생존자들을 살폈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면 예영영이고, 많은 정보를 지닌 건 관자림일 터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게 있었다.

“킁킁.”

예영영은 연방 코를 벌름거렸다.

관자림에게 안겨서 비밀통로에 들어선 것은 좋았지만, 퀴퀴한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생명의 은인을 앞에 두고 할 짓이 아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개도 아니고 그만 킁킁 거리세요.”

그녀는 관자림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게 평소에 씻고 다니시지요.”

“소저의 몸에서 나는 악취만큼 나겠습니까?”

관자림은 시큰둥한 어조로 타박을 한 후 콧구멍을 후비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게다가 개방의 사결제자라고 해봤자, 본업은 거지가 아니던가.

“지금....”

그녀가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쏘아붙이려는 찰나였다.

이훤이 그녀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걷어찼다.

퍽!

볼품없이 나뒹구는 그녀에게 싸늘한 한 마디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이 년이 쳐 돌았나? 냄새가 나는 건 맞아. 나도 저 새끼 냄새 때문에 함께 다녀야할지 정말 고민했거든.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이 코를 막아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이훤의 두 눈에는 붉은 기운이 아른거린다.

예영영은 더듬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이훤은 그녀의 말을 끊고 읊조렸다.

“냄새? 어차피 죽을 몸이었으니 내가 똥통에 박아주랴? 똥독 올라서 뒈질 때가 되어야 후회할래?”

“말, 말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예영영은 시뻘건 얼굴로 발악을 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훤은 그런 예영영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 마디를 남겼다.

“죽은 사람은 심한 소리도 못 들어.”

“······.”

예영영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참혹했던 광경이 이제 와서 다시 떠올랐나 보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과 먼지가 잔뜩 묻은 옷을 털지도 않고, 관자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면을 보였네요.”

하나 관자림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이 대협. 그나저나 이곳에 계속 있는 건 위험합니다. 폭발이 컸다고 하나 시신을 모조리 날려버릴 정도는 아니었어요. 황보세가는 산동강호에서 유일하게 정마대전을 겪었던 방파입니다. 오래지 않아 이상한 점을 눈치챌 겁니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보태웅이 이 장원을 샀을 리는 없겠지. 그 이전에 누구의 소유였는지 알고 있나?”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영영은 묻지도 않았는데 모르겠다며 사과를 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어도 문제라고 하더니 예영영이 그 짝이다. 죽다 살아나는 순간 외모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고, 집중하려는 표정이 강렬했다.

“제가······. 알고 있어요.”

의외로 악설이 나섰다.

생각해 보면 악설의 산동악가는 황보세가와 앙숙이 아니던가. 물밑으로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었을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니 무남독녀인 악설이 참석하는 소룡대연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 장원의 소유자는 황보태웅이 아니에요. 그저 육칠 년 전부터 갑작스레 이곳을 드나들었다고 하더군요.”

이훤의 시선이 고천락을 향했다.

“육칠 년 전 황보태웅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 점은?”

관자림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침음을 흘렸다.

“아! 본격적으로 후계자 자리를 욕심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즈음 천룡전의 마수에 걸려든 듯했다.

이훤은 다시 악설에게 물었다.

“원래 소유자는?”

“그건 저도 몰라요. 한데 이 장원은 십 년 전 지어졌다고 알려졌어요. 물론 비밀 통로에 대한 정보는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 통로를 만든 건 그 새끼들이겠군.”

관자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새끼들이라면?”

“천룡전.”

악설과 예영영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훤이 공소를 때려눕히던 당시 황보태웅과 천룡전의 관계를 캐묻지 않았던가. 두 여인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만약 천룡전이 장원을 만들었다면 이 통로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일단 움직이자.”

이훤이 움직였다.

그러자 누군가 앓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나, 나는 다리를 다쳤소.”

이훤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그럼 기어서 와라.”

십 수 명의 후기지수들은 어기적거리면서도 이훤을 따랐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섣부르게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했다가는 역풍이 불 터였다.

이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저들은 가문을 잘 만나서 호의호식하며 자라온 기득권에 불과했다. 저 또래의 아이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지 자신만 해도 이 시절 개미굴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지 않았던가. 저들 중 누구라도 약자를 위해 희생하거나, 도우려 했을 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장에서는 친족처럼 아끼다가 폭발이 일어난다는 소리에 모두 버리고 떠나지 않았던가.

“형님!”

정찰을 나섰던 고천락이 돌아왔다.

개미굴도 제집처럼 돌아다녔던 녀석이다. 걱정할 이유가 없다. 한데 녀석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앞에 시신이 있습니다.”

이훤은 고천락이 안내한 곳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뼈만 남은 시신의 곳곳에 낡은 천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죽은 지 십 년은 족히 되어보였다. 한데 그 숫자가 서른 구에 이르렀다.

“싸움이 아니네.”

고천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목뼈가 깔끔하게 잘렸어요.”

“앞에 갈림길이 있어?”

“다행히 그렇지는 않아요.”

이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혈륜으로 인해 안력이 극대화됐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가봤어?”

“백 장 정도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온 거리까지 더하면 백오십 장에 가까운 통로였다. 이런 곳을 만들려면 오랜 세월과 수많은 돈과 자재, 그리고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이걸 천룡전이 팠다면! 놈들은 십 년 동안 동굴을 파서 뭘 얻고자 한 거지?”

고천락은 잠시 눈을 감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통로는 태산 쪽으로 나 있어요.”

“뭐?”

지하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능력이라니.

과연 천하제일의 도둑놈이 되려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했다. 고천락은 이훤이 놀란 표정을 짓자, 싱글벙글 웃으며 속삭였다.

“형님, 이거 혹시 내 무공이 있다는 그 기문진으로 가는 길 아닐까요?”

“하아.”

“그렇잖아요? 못 뚫으니까 땅굴을 파는 걸 수도 있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이훤은 탈마가 어린 시절 무공도 없이 어떤 방법으로 기문진을 뚫고 들어갔는지 듣은 기억이 없다. 한데 고천락의 말을 듣고 보니 회귀 전의 탈마도 이곳을 지나간 듯했다.

“앞으로 내가 죽이고 싶은 놈이 어디론가 숨었으면 네게 말할 거야.”

“무슨 소리에요?”

“그 놈이 엄청 귀하고 멋진 보물을 들고 있다고 말이야. 그럼 네가 어떻게 해서든 찾아줄 것 같아.”

고천락은 키득거렸다.

“내가 그런 어설픈 수작에...”

“어! 저기 반짝이는 것이 있다.”

이훤의 외침에 고천락의 머리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하나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금주 하더니 성질머리가 왜 이렇게 고약해졌지?”

“아니, 진짜 뭔가 반짝였어.”

이훤은 빠르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빨라질수록 뒤따르는 후기지수들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뒤처져서 죽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따라가는 편이 나았다.

“아.”

이훤은 표정을 굳혔다.

빛이라고 생각했던 건 부러진 뼈에서 흘러나온 인(燐)으로 인한 청광이다. 그리고 눈앞에는 원형을 알 수 없을 만큼 조각 조각난 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그거지?”

“네, 통로 만들고 다 죽인 것 같은데요.”

“아무리 사람이기를 포기했다고 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진짜 이 새끼들은 악귀라는 명칭조차 아깝다.”

이훤은 거칠게 숨을 흘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사람이 만들어낸 빛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이훤은 거대한 공동에 들어서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천락아.”

뒤따라 온 고천락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오래 전에 죽은 시신이었다.

하여 죽은 방법도, 죽은 이유도, 죽은 자의 정체도 알지 못했다. 한데 눈앞에 산처럼 쌓인 시신의 숫자는 이백여 구가 넘었고, 모두 양손과 양발에 중독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목에 칼자국이 선명했다. 또한 복장으로 보아 목수나 나무꾼과 같은 양민이었다.

“빨리 옮겨라! 더 쌓이기 전에 통로 쪽으로 버려둬.”

수십 명의 복면인이 지금 이 순간에도 반대 쪽에 나 있는 통로에서 시신을 끌고 왔다.

“어! 저 새끼 뭐야?”

“대주! 적입니다.”

이훤은 개미떼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복면인들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술을 다오.”

“제월방주의 일이 해결될 때까지 금주 하신다면서요.”

“안할 거야.”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어요.”

“취마가 남자냐? 여자냐?”

고천락은 그제야 품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마귀는 성별이 없죠.”

“그래, 그러니 낯간지러운 매화군자 따위는 안 할란다.”

이훤이 씹어뱉으며 내뱉은 한 마디에 고천락은 가죽주머니를 건넸다.

“크큭! 형님은 취마일 때가 제일 멋있더라.”

< 44, 술을 다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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