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혈겁 유발자. >
43, 혈겁 유발자.
이훤에게 악인이란 징벌의 대상이다.
하나 협의지심이나 인의예지와 같은 거창한 신념을 품지는 않았다. 그저 눈앞의 나쁜 놈을 그냥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고, 좋은 술을 보면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악인을 보면 기분이 더러웠다.
악인을 상대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접근하고, 때리고, 술을 한 잔 하면서 생각을 해본 후 정말 나쁜 놈이라면 또 때린다.
“어차피 술은 매순간 마시니까 또 때릴 거다.”
이훤이 입꼬리를 올리고 주먹을 번쩍 드는 순간 황보태웅의 수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진저리를 쳤다.
“아! 나 금주 중이었지.”
악인을 상대하는 과정 중에 한 가지가 빠진 셈이다.
수하의 눈빛에 안도하는 기색이 스쳐가려는 순간 주먹이 콧잔등을 찍어 눌렀다.
콰직!
코뼈가 으스러지면서 안면으로 파고든 듯했다.
“으아아아아악!”
이훤은 비명을 지르는 수하를 잡아당긴 채 물었다.
“이름이 뭐야?”
주먹은 붓도 이기고, 칼도 이기고, 고통도 이겼다.
“초평, 초평입니다.”
“그래, 초평. 황보태웅이 천룡전과 언제부터 붙어먹었는지 말해.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줄게.”
물론 초평의 목숨은 다른 사람이 와서 거둬갈 것이다.
“그, 그건······.”
그래, 처음부터 주인을 파는 건 못할 짓이겠지.
“어려우면 쉬운 것부터 할까? 황보태웅의 수하인 양사가 지금껏 몇 번이나 여인들을 세뇌했지? 아니면 세가 내에도 세뇌한 자가 있었나?”
공소와 양사의 말로 추론했을 때 세뇌의 기간은 길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세가 내에서 써먹기란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 하나 중요한 건 초평에게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던졌다는 게다.
“세가에서는 쓰지 않았을 겁니다.”
황보태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초평의 말로 인해 지금껏 이훤이 떠든 것들이 모두 진실로 드러난 셈이다.
[화술이 대단하십니다!]
관자림의 칭송이다.
녀석은 공소가 오줌을 싸고, 똥을 지리는 모습을 보자, 정나미가 떨어진 듯했다. 반사적으로 이훤에 대한 호감이 더욱 상승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금주를 하니까 머리가 좋아진 것 같아.]
[역시 이 대협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네요! 제 선택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됐고. 이제 오고 있지?]
잠시 전음이 끊겼다가 계속됐다.
[일군이 장원에 들어섰습니다. 아무래도 황보태웅의 수하들인 것 같네요.]
그럴 줄 알았다.
이훤이 공소를 핏덩이로 만들고, 초평을 두들겨 팼음에도 황보태웅이 가만히 있는 이유는 뻔했다. 매화군자와 드잡이질을 하는 순간 자신의 위치가 격하된다고 여겼으리라. 그리고 흉악한 공세에 오줌도 조금 지렸을 터였다.
“황보태웅이 양사를 통해 세뇌를 하기는 했구나.”
이훤의 외침은 초평이나 황보태웅을 향하지 않았다.
소룡대연에 참석한 후기지수들이 목표였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전개에 웅성거리면서도 말을 잇지 못했다. 섣불리 찬성하거나, 반대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황보세가의 삼 공자가 공소와 함께 세뇌를 하여 여인들을 겁탈했다지 않는가. 자칫 함께 묶였다가는 정파 내에서 매장당하기 십상이다.
이훤 역시 그걸 알기에 시간을 끌었다.
명분을 채웠으니 이제 진짜 힘을 보여줄 차례였다.
콰쾅!
연회장의 정문이 산산조각 났다.
한 자루 검처럼 예기를 뿜어내는 중년인이 들어섰다.
동시에 창문을 통해 황의 무복을 걸친 무인들이 등장했다.
“백건대! 흑곤대! 저 공적을 추포하시오!”
한데 일련의 무리가 한 번 더 들이닥쳤다.
백의를 걸친 그들은 무인과 어울리지 않는 병장기를 패용했다. 철선(鐵扇)과 아미자(峨嵋刺), 판관필(判官筆)을 지닌 자가 각기 스무 명이다.
“소부주! 황보 공자! 소부주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황보태웅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훤을 가리켰다.
“저 새끼다. 저 새끼가 공소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어.”
그는 신공부의 무인들이 움직이자, 백건대와 흑건대를 향해 손짓했다. 백건대와 흑건대가 발을 뺀 자리에 신공부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안회조! 자건조! 백우조! 저 자를 추포하라!”
신공부는 여타 방파와 달리 내외로 나누지 않는다.
공자의 사상을 논하는 열두 개의 단으로 구성됐으며 이 중 예단(禮壇)이 소부주의 경호를 도맡았다.
예단주의 외침에 육십여 명의 무인들이 학의 날개처럼 퍼지며 이훤을 압박했다.
정작 당사자는 하품을 했지만 말이다.
“한 가지만 묻지.”
“닥쳐라! 소부주를 해한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너희들, 제대로 싸워본 게 언제냐?”
이훤의 물음에 예단주가 미간을 좁혔다.
“뭐라?”
“아니, 그렇잖아. 생사가 갈릴 정도의 혈전을 거쳤다면 그 따위 무기를 들 이유가 없잖아.”
예단주가 얼굴을 붉힌 후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죽여도 좋다! 잡아라!”
그 순간 육십 명의 무인들이 학처럼 날아올랐다.
학처럼 우아하지만 느릿했다.
“철선은 근접 병기라 부챗살에 암기를 숨기거나, 초절정이 아니면 쓰지 말라는 말도 못 들었냐?”
퍼퍼퍼퍼퍽!
일격에 서너 명씩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애초에 신공부는 유가의 성지로서 헛기침만 해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명가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원초적인 힘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니 첫 단추부터 잘못 꿴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가를 치렀다.
“학사 주제에 살수로 전향이라도 하려고? 아니면 여기가 장강이더냐? 수적이나 쓰는 물건을 가지고 와!”
퍼퍼퍼퍼퍽!
아미자의 양 끝은 뾰족했고, 중앙에 고리가 있다.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현란하게 휘돌리면서 적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했다. 한데 신공부는 판관필하고 비슷하니까 그냥 사용한 듯보였다.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 후 판관필을 사용하는 무인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판관필을 쓰는 자들은 그나마 제법 무인의 흉내를 냈다.
하나 판관필로 펼치는 필법은 시화에 능한 자들이 붓을 다루다가 만들어낸 초식이 아니던가. 즉 무공만 익힌다고 능사가 아니라 글씨에도 조예가 깊어야 했다. 양 쪽 모두 수위에 이르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네깟 놈들이 그 수준일 리가 없잖아?”
퍼퍼퍼퍼퍽!
육십 명을 처리하는데 걸린 시간?
딱히 헤아릴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이훤은 예단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름은 몰라도 복색이 책임자였다.
하나 예단주가 양 허리춤에서 병장기를 꺼내드는 순간 실소가 흘러나왔다. 두 자루의 판관필이 허공을 수놓으며 이훤을 찌르려 했다.
한 자루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이훤은 혈륜을 휘감은 주먹으로 판관필을 쳐낸 후 일격에 예단주의 목울대를 후려쳤다.
콰직!
“크헉!”
예단주가 뒷걸음질 치며 피를 토했다.
애초에 종남파도 이훤을 막지 못했고, 천룡전에서 당한 연놈만 몇이던가. 소룡대연은 말 그대로 아이들의 잔치였고, 그들을 지키는 자들의 수준 또한 뻔했다.
‘그러니 겁먹기 전에······.’
이훤은 예단주를 쫓지 않고 돌아섰다.
자칫 시간을 끌었다가는 황보세가가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백건대주와 흑곤대주를 노렸다.
“흥!”
다행히 백건대주는 자신의 무위를 상당히 신뢰해는 듯했다. 건곤권을 양 손에 두른 채 정면으로 이훤의 공세를 맞받아쳤다.
쾅!
하나 쇠로 만든 건곤권이 우그러지면서 주먹이 으스러졌고, 팔꿈치를 통해 뼈가 튀어나왔다. 비명을 지르려는 백건대주의 멱살을 쥐고 한 번 더 후려쳤다.
콰직!
대경실색한 흑곤대주가 육각으로 깎은 철곤을 휘두르려 했다. 애초에 초절정의 무위가 아니라면 두 번 손을 쓰기 아까웠다.
퍼퍼퍼퍼퍽!
이훤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흑곤대주가 게 거품을 물면서 허물어졌다.
“정파의 세상에서 살인멸구를 하려고 해?”
황보태웅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죽이라고 한 쪽은 신공부가 아닌가.
하나 이훤은 여전히 황보태웅이 아니라 소룡대연에 참석한 후기지수들을 향해 외쳤다.
“좋다! 어디까지 가는지 한 번 보자. 누가 나와 상대할 텐가?”
불문의 사자후가 이런 느낌일까.
이훤의 일갈은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내공이 일천한 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헛구역질을 하거나 비틀거렸다.
그 사이를 노려 또 뛰려 했다.
그때 누군가 헐떡거리며 연회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제월방도의 명패를 마치 고관대작의 호패처럼 내밀더니 외쳤다.
“삼 공자! 삼 공자! 큰일 났습니다. 매화군자가 제월방을 멸문······.”
황보태웅은 눈을 끔뻑였고, 이훤은 한 숨을 내쉬었다.
“천락아. 늦었어.”
고천락은 눈동자를 굴려 연회장 내부를 확인하더니 슬그머니 명패를 내렸다.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마디를 건넸다.
“아무리 기다려도 황보세가에서 안 오더라고요. 형님이 많이 심심할까봐 예전에 꼬불쳐둔 걸로 연기 한 번 하려고 했는데······.”
그는 수십 명이 칼을 겨누고, 수십 명이 쓰러져 있는 상황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형님, 금주하시느라 많이 예민해지셨네. 애들은 왜 이렇게 두들겨 패신 거예요?”
이훤은 고천락의 너스레에 자신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렸다. 귀호영체술과 도벽을 제외하면 내세울 것도 없던 녀석이 아닌가. 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녀석의 언행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 이 미친놈들아! 술을 못 마신다고 이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더냐?”
황보태웅은 꼬투리를 잡은 사람처럼 일단 소리를 쳤다.
한데 그 순간 고천락은 목이 찢어져라 외치며 기선을 제압했다.
“미친 건 너지! 형님에게 금주가 어떤 의미인 줄 아느냐? 하늘이 무너지고, 공적이 되어서 죽는 그 순간에도 술을 찾으실 분이다.”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어떻게 알았지?’
“그런 분이 금주를 천명했으니 사람이라면 응당 이유를 궁금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네 놈과 제월방이 붙어먹고 수많은 양민을 도륙하면서 아이들을 팔아넘겨놓고도 그리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있겠는가!”
황보태웅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제월방을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고천락은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 저 새끼는 모르는 것 같은데요.”
“어, 내가 봐도 그렇다. 그래서 다른 이유로 죽이려고.”
이훤이 돌아서는 순간 눈가에 핏빛이 번들거렸다.
혈륜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순간 연회장 내부의 대기가 낮아졌고, 모든 이의 전신을 옥죄기 시작했다.
“황보태웅! 천룡전과 공모한 후 세뇌를 통해 여인들을 겁탈했으며 소룡대연을 통해 음모를 획책한 죄를 물어 처단하겠다! 관자림!”
그 순간 지붕에서 관자림의 개방의 취팔선보를 펼치며 멋들어지게 내려섰다. 하나 주변에 있던 후기지수들은 코를 막고 거리를 벌렸다. 관자림은 훤칠하게 생긴 사내들이 물러나는 모습에 잠시 혀를 찼다.
“쯧, 이 대협의 말이 옳다. 천룡전의 주구들이 강림혼요술을 통해 문파를 어지럽히고, 강호에 피를 뿌리려 지금 당장 무림공적으로 척살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황보태웅은 이훤이 공소와 함께 등장한 이후 한 번도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소가주 자리를 노린다고 하지만, 가솔들끼리 살인까지 불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그 또한 정파의 세상에서 편안하게 성장한 수많은 부잣집 도련님 중 하나였다. 지금껏 그 누구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그를 억압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훤의 명분에 구멍이 숭숭 나 있다고 해도 무력에 눈이 멀어 대꾸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원론적인 비방만 이어가는 것이 전부였다.“개소리! 네 놈은 누구냐? 그리고 나는 천룡전과 아무 관련이 없다. 듣도 보도 못했어. 누구의 밀명을 받았느냐? 큰 형이냐? 둘 째냐? 소룡대연은 그저 친목과 화합을 위해서 만들어진 자리로······.”
원론적인 비방도 약자에게나 통하는 법이다.
관자림은 옷깃을 들어 매듭을 보여줬고, 황보태웅의 입은 막혔다.
“악 소저. 오대세가의 일원이니 천룡전에 대해서 들으셨을 겁니다. 맞습니까?”
사내를 대할 때와 악설을 대할 때의 목소리는 어감부터 달랐다. 하나 악설은 그것을 생각할 여력도 없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룡전은 당금 강호의 화두이며, 무림맹에서도 최우선으로 처리하는 사안입니다. 현재 섬서성과 산서성에 천룡전의 주구가 등장했으니, 인접한 산동성에서 일을 벌인다는 예상도 가능할 겁니다.”
지리적 요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나 이훤에 이어 개방도인 관자림까지 입을 맞추자, 후기지수들은 황보태웅과 거리를 벌렸다. 후기지수들에게 빚을 지웠으니 태산에서 기문진이 열린다면 중소방파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리라.
이훤은 빙긋 웃으며 황보태웅을 향해 걸어갔다.
“이리 와.”
황보세가의 가솔들은 삼 공자인 황보태웅을 지켰다. 그가 천룡전의 주구이든, 세뇌를 했든 개의치 않았다. 황보세가에 상과 벌을 내리는 건 오직 가주여야 한다고 여겼으리라.
그래서 비명과 혈향만 더 늘어났다.
이훤은 황보태웅의 사소한 발악을 가볍게 무력화시킨 후 멱살을 들어올렸다.
“어차피 강림혼요술에 걸린 이상 회개도, 자백도 불가능하잖아. 그러니 그냥 맞다가 죽어라!”
주먹을 쥐었다.
하나 이훤은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연회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고요함을 넘어 음습함까지 느껴질 만큼 사위가 고즈넉했다. 풀벌레 소리까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규모 인원이 장원을 포위했으리라.
‘제월방의 소식은 여기가 아니라 본가로 향했군.’
그리고 황보세가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을 선택했다.
살인멸구(殺人滅口).
고천락이 있던 곳을 바라봤다.
그는 이훤이 낯선 행동을 하는 순간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여전히 재빠른 녀석이고, 여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녀석이다.
“애들아. 칼 뽑아라.”
“무슨 소리요? 우리는 무림맹에 적대할 생각이 없소.”
그래도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는지 이훤이나 개방도가 아니라 무림맹을 핑계로 삼았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적이 온다. 능력껏 살아남아라.”
관자림이 의아함에 창밖을 살피더니 한숨을 흘렸다.
“휴, 대협은 혈겁을 몰고 다니시는 겁니까?”
< 43, 혈겁 유발자.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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