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105화 (105/226)

< 42, 금주 중입니다. (3) >

일각이 흘렀다.

누군가에는 긴 시간이고, 누군가에는 짧은 시간이다.

고문을 당한 공소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고문을 한 이훤에게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공소는 황보태웅의 수많은 비위를 아낌없이, 그것도 아주 빠르게 토설했다. 하지만 강림혼요술이나 천룡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아, 똥패를 뽑았네.”

이훤은 혀를 차며 피투성이가 된 공소를 내려다봤다.

평소 화려하게 치장하는 걸 좋아하던 공소였지만, 그는 토사물과 소변이 뒤섞인 진흙탕에 얼굴을 묻은 채 숨만 헐떡였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편안한 표정이다.

“이제 어쩐다.”

이훤은 공소를 뒤로 한 채 생각에 잠겼다.

감각사도나 강림혼요술에 걸린 자들에게서 비밀을 끌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데 돌이켜보면 강림혼요술에 걸린 자들은 대부분 일신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큰 세력을 거느린 자들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황보태웅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지만, 측근이라면 고문을 통해 알아내는 게 가능하다고 여겼다. 한데 공소는 신공부라는 간판을 제외하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계획을 바꿔야겠어.”

지풍을 날려 예영영과 악설의 점혈을 풀었다.

한데 두 여인의 표정이 상반됐다.

예영영은 자신 있는 미소를 내비쳤고, 악설은 여전히 이훤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생각보다 공 소협은 쓸모가 없었네요. 제가 은공에게 힘을 보탠다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요.”

그녀는 이훤에 대한 호감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이번 기회가 청도대상단이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이훤의 일에 끼어들고자 했다.

‘저 자는 산동 출신이 아니야. 이번 일로 황보세가와 신공부의 힘이 약해진다면 그 과실은 모두 청도대상단이 먹어치울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산동성 동부에 집중된 청도대상단이 서부는 물론이고, 인접한 성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으리라.

하나 이훤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다 된 밥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해. 정 심심하면 조금 있다가 겁탈당할 뻔 했다고 소리치는 역할 정도는 맡겨줄게.”

“은공!”

예영영이 황급히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보다 못한 악설이 나섰다.

“예 소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저런 파렴치한 말을 듣고도 웃음이 나오나요?”

악설의 타박에 예영영은 눈을 깜빡였다.

“악 소저야 말로 뭐하자는 거예요? 이건 청도대상단과 이 대협 사이의 일이랍니다. 왜요? 내가 은공이라고 유혹하려는 것처럼 보여요? 매일 같이 사내들 사이에 있으니 부럽고, 질투라도 나던가요? 웃기지 마요. 힘이 없으면 살아남기 위해서 무기를 찾아야 해요. 내게는 그 무기가 이 얼굴이고요. 천박해보여요? 상관 없어요. 문파의 돈줄로 인식되는 상단의 여식으로 태어난 이상 할 수 있는 건 다 할 생각이니까요.”

“아니.”

“쉿! 악 소저는 그냥 하던대로 살아요. 오대세가라는 그늘 아래서 뭘 해도 다 용인이 되고, 어쭙잖은 협행으로 이름값이나 올리세요. 나는 당신처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거든요.”

이훤이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그건 맞아. 예쁜 얼굴은 아주 좋은 무기지. 게다가 머리까지 좋으니 눈치만 잘 본다면 장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화를 내기 마련이야. 특히 무인이라면 칼을 뽑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걸 잊지 마.”

예영영은 치맛자락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은공의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꼈어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아!”

악설은 이훤과 예영영의 대화를 듣는 내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지금껏 나름 열정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한데 마치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 취급하는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정파의 협객으로서 올곧은 마음은 기본이야. 당신처럼 협잡을 하고, 협박을 하고, 내키는 대로 말을 한다면 어찌 정파의 협객이라고 할 수 있겠어!”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예 소저의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나 보네. 내가 만만해 보였나?”

악설은 한순간 이훤의 시선을 피했다.

그 사이 이훤의 독설이 쏟아져 나왔다.

“정파? 협객? 네 년의 그 딱딱한 사고방식이야 말로 강호를 좀 먹는 폐해다! 세상을 흑백으로 구분하고, 네게 맞지 않는 건 배척해라고 배웠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강호? 협객? 정파? 흥! 이깟 연회조차 즐길 수 없는 팔푼이 주제에 꿈은 원대하군!”

“무슨 소리야? 이런 시답지 않은 연회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또 있을까?”

“시답지 않지. 쓸모도 없지. 하지만 네가 산동악가의 재화로 꿀을 빨면서 살았다면 그만큼 보답할 생각을 해야지. 너처럼 공짜로 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당금 강호의 주인이 칭하는 무림맹과 구파오가의 수뇌부다. 받지 않고 주는 것이 싫다면, 최소한 받은 만큼이라도 주라고! 너는 오대세가인 산동악가의 무남독녀라며? 그렇다면 네가 마음먹은 만큼 연회에서 이목을 끌 수 있을 게야. 이목을 끌어서 어린 놈들에게 협행이란 무엇인가 웅변도 하고! 그렇게 돈을 내놓든, 협행을 떠나든 해서 세상에 도움이 될 생각을 왜 하지 못하나?”

“······.”

악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할 수만 있으면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한데 할 말이 없다.

다행히 이훤이 화제를 돌렸다.

“하긴 너처럼 어린애에게 이런 큰 짐을 맡겨야 한다는 것 자체가 당금 정파인들의 무능함을 반증하는 걸 테지. 그러니 정파인만 협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크흑! 당연하죠. 사마외도가 협객이라면 왜 사마외도라고 불리겠어!”

“그럼 밭 갈던 촌부가 위기에 처한 이를 구하면 협객이 아닌 거냐? 이거 봐라. 조금 전에 네게 네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해줬건만, 또 그런 개 소리나 지껄이는 걸 부끄럽게 여겨. 더 할 말 있나?”

악설은 눈을 끔뻑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은 피식 웃은 후 공소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연회장으로 향했다.

“따라와. 할 말이 없으면 거수기라도 해라.”

*

고천락은 제월방도의 명패를 던졌다가 받으며 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만약 황보태웅과 제월방이 밀약을 맺었다면 지금쯤 누군가 이곳을 지나쳤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고천락은 독을 먹인 후 황보세가의 명패를 훔쳐서 소룡대연에 참석할 요량이었다. 황보태웅의 면전에서 제월방주의 악행을 고하면 무언가 반응이 있을 터였다.

그 후에는 늘 그렇듯 이훤이 나서서 해결할 것이다.

피와 살이 비산하고, 혈향이 자욱하겠지.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이훤은 술을 마시며 시원하다고 탄성을 흘릴 터였다.

“그런데 왜 안 와?”

고천락은 반대편 언덕 아래를 바라봤다.

불야성처럼 밝은 장원에서는 소룡대연이 한창일 터였다. 술에 취했고, 여자에 홀렸으며, 부자인 놈들이 즐비한 장소가 아닌가. 탈마의 본능이 쉼 없이 꿈틀거렸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빨리 와라. 빨리 와!”

고천락은 주술을 외듯 읊조렸다.

하나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고, 거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황보세가는 십수 년 전 오대세가에서 밀려났다.

하나 그것은 상징적인 서열일 뿐 가문이 쇠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 땅의 대부분을 차지한 토호였다. 혹자는 대지주를 논할 때 장강 북쪽에 황보세가가 있고, 남쪽에 남궁세가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가주가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의 화려함은 무림맹보다 윗줄일 정도였다.

태악전(泰岳殿).

평소였다면 사방에 불빛이 가득하고, 온갖 귀한 물건들이 번쩍였으리라.

하나 오늘은 달랐다.

가주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호랑이를 새겨놓은 석좌에 앉아 있었다.

“전후사정은 모두 알았을 거야. 이제 해결책을 논하라.”

십여 명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군사가 수뇌부를 대표해 가주에게 예를 표한 후 말문을 열었다.

“제월방의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위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하는 상부란 황궁과 관부의 요직을 차지한 환관들이다. 황보세가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수많은 이권에 개입했다. 아닌 말로 세가 출신의 무인들이 관부로 진출하는 건 다 얽히고설킨 관계 덕분이다.

가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는 건 오대세가 따위에서 밀려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손해다.”

이곳에 모인 누구도 무림맹이나 강호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강호의 의협과 도의보다 이권과 명욕을 따른 지 오래였다.

“일단 내단주가 제월방을 대신할 방파를 구해야할 겁니다.”

“있는가?”

“태산 서쪽에 거룡당이라는 중견 방파가 있습니다. 정사지간이지만, 대놓고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적당한 돈과 무력을 지원한다면 금방 제월방을 대신할 수 있을 겁니다.”

“중양절이 되면 위쪽에서 아이들을 모아오라고 닦달을 할 것이다. 그때까지 문제 없겠는가?”

군사가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밀염과 인신 매매를 하던 자들인지라 음지에서 일하는 방식에 능합니다.”

가주가 손짓을 했다.

“좋다. 내단주가 직접 움직여라.”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포권을 한 후 소리 없이 자취를 감췄다. 중요한 일을 처리했으니 이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이훤이라고?”

“예, 취선관의 관주라는데 화산 어딘가에 있는 걸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화산파와의 관계가 없지는 않은 듯합니다. 하나 화산파는 종남파와 소리 없는 물밑 항쟁 중이니 지금 당장 고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공 수준은 완숙한 절정 내지는 그 이상으로 사료됩니다.”

“강하군. 누구의 제자인가?”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가주는 혀를 찼다.

“강호는 이래서 재미가 있고, 이래서 짜증이 나. 어디서 계속 족보도 없는 개종자들이 튀어나온단 말이지. 자네는 어찌 하면 좋겠는가? 설마 소룡대연을 끝내고 떠날 때 몰라 습격을 하자는 삼류 모략을 내놓지는 않겠지.”

군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은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데 급급하고, 대인은 그림을 그려 완성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했습니다. 매화군자 이훤을 처리하시는 김에 산동 강호를 재편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가주도 웃었다.

“그거 좋군.”

“산동악가 내에 무슨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하여 지난 몇 달 간 두문불출 했지요. 태산 쪽 어딘가에서 일을 치르고 있는 듯하니 그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덮어씌우겠다는 의미였다.

“방법은?”

“산동악가가 음모를 꾸미던 중 소룡대연에 참석한 자들에게 발견된 게지요. 하여 산동악가가 소룡대연의 모두를 죽인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계책입니다.”

“고려할 점은?”

“삼 공자의 죽음과 천암일화 악설의 신변 확보입니다.”

가주는 잠시 침음을 흘렸다.

제아무리 세가를 지키는 자라고 해도 자식의 생사는 어려운 문제가 아니던가. 하나 세가는 하나였고, 자식은 세 명이다.

“행하라.”

“하면 산동악가가 혈사를 벌이고, 악설만 빼내가는 쪽으로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당연히 산동악가는 이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지만, 황보세가에서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장면도 추가하겠습니다.”

가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군. 산동성의 모든 걸 내 발 아래 둘 수 있다니 나쁘지 않아.”

그는 불현 듯 생각난 것처럼 탄성을 흘렸다.

“아! 청도대상단의 딸이 거기 있다지?”

군사는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가 잘 챙겨두겠습니다.”

“좋다! 이 기회에 후계 구도까지 정립을 하자. 소가주를 수장으로 하여 외단의 모든 무인을 급파하라.”

가주의 일갈에 외단에 속한 네 명이 몸을 일으켰다.

군사는 그들을 따라 나서던 중 잠시 몸을 돌려 절을 했다.

“가주께서 허락하신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말살하겠나이다.”

“하하하! 믿는다!”

가주의 호탕한 웃음에 군사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

파팟!

연회장의 입구를 지키던 하인들이 눈만 끔뻑이는 목석이 되었다.

“아아.”

이훤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공소의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그리고 연회장 안으로 공소를 차버리면서 내력을 담아 일갈을 내질렀다.

“황! 보! 태! 웅!”

그리고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들어섰다.

화기애애하던 연회장은 고깃덩이가 된 공소로 인해 아수라장이 됐다.

황보탱운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외쳤다.

“공소! 괜찮은가? 놈! 이게 무슨 짓이더냐?”

이훤은 황보태웅과 그 주변을 한눈에 담은 채 외쳤다.

“양사가 그러더라. 네가 천룡전의 똘마니라고!”

황보태웅은 강림혼요술에 세뇌가 된 존재답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 그가 거느리는 자들 중에는 세뇌가 되지 않은 자가 존재했다.

이훤은 멈칫 하는 무인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양사와 천룡전.

두 가지에 반응한 놈이니 똘마니의 똘마니일 것이다.

“찾았다!”

그의 신형이 붉은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일진광풍과 함께 황보태웅의 수하를 향해 짓쳐들었다.

< 42, 금주 중입니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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