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금주 중입니다. (2) >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단순한 싸움이었다면 저들도 가만있지 않았으리라.
하나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서 사경오는 열 손가락에 들을 만큼 강했다. 게다가 얼마 전 절정의 반열에 올랐다며 잔치까지 열었다. 그런 그가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제압당했다. 예상과 상식 외의 결과에 한순간 분위기가 압도당한 셈이다.
스윽-
이훤은 발로 혼절한 사경오를 밀었다.
가볍게 밀었음에도 일 장 가까이 밀려났다. 하인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한 후 밖으로 사라졌다.
‘어린 새끼가 능숙하네.’
이훤은 시비의 배후일 것이 분명할 황보태웅을 바라봤다.
한데 그는 사경오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주변인들과 대화를 이어갈 뿐이다. 그때 옆에 있던 공소가 슬쩍 일어나더니 크게 웃으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경오가 원래 술이 약해. 마시지도 못할 술을 마셨으면 쉬어야지. 왜 시비를 걸어? 하하하! 분위기가 너무 쳐졌으니 다 같이 산동 강호의 중흥을 기원하면 잔을 비웁시다!”
은근슬쩍 사경오가 술에 취해서 제 실력을 펼치지 못한 것으로 포장했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띄웠다.
선동에 일가견이 있는 놈이다.
이훤은 슬쩍 천장을 바라봤다.
[저 새끼 뭐야?]
[신공부의 소부주인 공소입니다. 학식이 높고, 멀끔하게 생겨서 인기가 좋지요. 게다가 결벽증이 있어서 속옷은 하루에 두 번씩 갈아입습니다. 좋아하는 색깔은······.]
관자림의 대꾸였다.
그저 개방에서 수집한 정보 정도를 요구했음에도 사적인 비밀이 술술 흘러나온다. 아무래도 공소는 관자림이 개인적으로 주시하던 존재였던 듯했다.
한데 관자림을 미쳤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공소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공소, 공소. 어디서 들어봤는데······.’
하지만 회귀 전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술이나 화산, 육대괴마와는 관련이 없는 듯했다.
한데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위화감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간간히 어딘가를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자였다.
빼어난 외모로 보아 부용지희 예영영일 터였다.
사내라면 예영영을 힐끔거리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하나 그 모습을 주시하던 중 공소의 이름을 듣게 된 사건을 떠올렸다.
[저 새끼, 여자 문제가 있지?]
[황보태웅과 공소는 선남선남으로 함께 있을 때 빛이 나는 사이지요. 계집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이훤은 인상을 썼다.
[미친놈아! 사심 섞지 말고.]
[사건사고야 있었지요. 하나 대부분 좋게 해결됐기에 신공부에서도 쉬쉬 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좋게 해결한다는 의미는 돈이나 협박일 터였다.
공소는 신공부를 믿고 앞으로도 여색을 탐하게 될 것이고, 십 년 후에는 욕정이 폭발하여 멀쩡한 집안까지 몰살시키는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하아, 점점 회귀 전의 세상이 아름답게 여겨질 정도야.’
그 사이 분위기에 취해 흥청망청 놀던 이들이 조금씩 말을 아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사위는 조금씩 어둠이 밀고 들어오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때 공소가 움직였다.
녀석은 예영영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과연 관자림이 찍어놓은 사내답게 화술의 수준이 상당했다. 예영영의 주변을 맴돌던 사내들이 헛기침을 하며 하나둘 씩 자리를 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내 공소가 연회장 밖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그 때의 눈빛은 너무나 익숙했다. 이훤이 좋은 술을 봤을 때, 탈마가 물건을 훔치고 싶을 때, 색마가 훤칠한 사내를 봤을 때, 검마가 호승심을 품었을 때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눈빛이 아닌가.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잔가지부터 쳐내 볼까.’
잠시 후 예영영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자리를 떴다.
*
고금을 통틀어 미녀는 수많은 사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름난 미녀일수록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고, 상황을 즐겼다. 빼어난 미모에 뛰어난 지식을 갖췄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훤이 봤을 때 예영영과 같은 부류였다.
연회장에 있는 내내 사내들과 어울렸고, 자격을 갖췄다면 누구도 심심하지 않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 소룡대연에서 손꼽히는 집안의 장자인 공소와의 밀회를 허락했으리라.
‘내가 장담한다! 절대로 이어지지 않아.’
이훤은 회귀 전 여인과 제대로 정분이 나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남녀를 지켜봤다. 그간 축적된 경험의 양은 실제로 사랑을 나눈 당사자들보다 뛰어날 터였다.
예영영은 공터에 들어선 후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화장을 고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적인 대화를 나누려는 듯 보였다. 하긴 청도대상단과 신공부가 손을 잡는다면 이권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하리라.
‘공소 같은 놈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참지 못해.’
이훤은 버릇처럼 허리춤을 더듬다가 미간을 좁혔다.
술이 없다.
불현 듯 짜증이 치솟았다.
그 짜증의 칼끝은 당연하게도 공소를 겨누게 될 것이다.
한데 공터에 등장한 건 공소가 아니었다.
오척 단구에 고목처럼 빼빼마른 노인이다. 수염이 아니었다면 아이라고 착각할 만큼 왜소한 자였다.
예영영이 경계를 하며 물었다.
“누구세요?”
노인은 자신의 정체를 순순히 밝혔다.
“양사라고 한다. 공소의 부탁을 받은 황보태웅의 부탁을 받았단다.”
예영영은 믿을 만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경계심을 풀었다. 하나 노인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금방 끝날 게야.”
“당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양사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네게 미혼술을 걸 것이다. 그리고 너는 공소에게 깔려서 환락의 교성을 내지르겠지.”
예영영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당신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아!”
양사는 예영영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눈동자가 녹빛으로 물들었고, 검게 물든 손톱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청도대상단주의 금지옥엽이라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을 게야. 그저 단잠을 자고 일어난다고 생각하여라.”
양사의 눈동자가 번들거릴수록 예영영은 마치 수마가 덮친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졌다. 눈빛마저 총기를 잃고, 흐릿하게 변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구냐?”
양사가 낯선 기척에 미간을 좁혔다.
“양사, 천룡전에서 왔다.”
나직한 한 마디에는 내력이 담겨 있었다.
이훤이 빙긋 웃으며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양사는 말을 아꼈지만, 뒤이은 말에 잠시나마 표정을 풀었다.
“감각사도인 백의인의 명을 전하러 왔다.”
“백의인? 이곳은 청의인의······. 잠깐! 백의인은······.”
이훤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고, 신형이 좌우로 찢기듯 흩어지는 순간 양사의 지척에 도달했다.
“그래, 그 새끼는 나한테 죽었지!”
피라미를 잡으러 왔거늘 갑작스레 대어가 잡혔다.
양사는 예영영의 기억이 사라질 것을 전제로 이것저것 지껄였으리라. 하나 기척을 감춘 이훤에게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유언은 잘 들었다!”
이훤은 양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목을 꺾었다.
어차피 강림혼요술로 세뇌가 된 상태라면 정보를 캐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감각사도라면 죽기 전에 상이 깨지면서 조금이나마 진실을 털어놓을 여지가 있다.
하나 양사는 그야말로 양산품일 뿐 쓸모가 없었다.
이훤은 양사의 시신을 숲속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와.”
양사의 시신을 던진 곳에서 악설이 나타났다.
그녀는 밤이 되면 수련을 하려고 눈여겨 본 곳에서 살인이 일어나자 표정을 굳힌 상태였다. 두 개로 분리했던 단창을 결합한 후 이훤을 겨눴다.
“당신 뭐야?”
아무래도 혓바닥이 긴 양사의 유언을 듣지 못한 듯했다.
이훤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악설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팟!
악설은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른 채 아혈과 마혈을 점혈당하고는 눈을 부릅 떴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 할 수 없으니 방해는 되지 않으리라.
이훤의 손가락은 곧장 예영영에게로 향했다.
한데 그녀가 손사래를 치더니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낯선 이에게 세뇌를 당한 후 겁탈을 당할 뻔했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지만 표정은 담담했다.
“뭐가?”
“악 소저의 혈도를 짚은 건 공소를 기다리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생사의 간극에서도 이훤의 목적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저 간적의 말대로라면 이제 공소가 오겠지요. 간적의 말대로라면 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상태여야 해요. 그러니 주절주절 떠들어댈 것이 분명합니다. 은공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공소의 약점을 잡으시려는 게 아닐까요?”
“어! 맞아.”
예영영은 보기 좋은 미소를 내비쳤다.
수많은 사내를 거느리면서 자연스럽게 유지하던 가면을 다시 쓴 듯했다.
“제가 도와드릴 게요. 은공께서 저를 구해주셨으니...”
“됐어.”
이훤은 단호하게 예영영의 말을 끊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너 술 좋아해?”
예영영은 잠시 눈알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를 유혹하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금주 중이야.”
예영영은 영문 모를 소리에 황급히 말을 이어가려 했다.
하나 이훤의 지풍은 자비 없이 예영영의 혈도를 짚었다.
“공소 따위가 뭐 대수라고 작전을 짜고, 협동을 하겠냐. 미끼 역할을 잘 했으니 구경이나 해.”
그리고는 느긋하게 바위에 앉았다.
이훤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다가 미간을 좁혔다.
“아! 진짜 화가 나네.”
이 모든 게 고천락의 탓이다.
제월방주의 악행을 본 후 복수를 다짐한 건 맞다.
하나 고천락은 결의를 보여 달라며 금주를 요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기에 흔쾌히 응했지만, 이제 와서는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이게 금단현상이라는 건가?”
악설은 강제로 점혈을 당했기에 울화가 치민 상태였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취한 사람처럼 등장하고선 금단현상을 운운하니 상대가 광인처럼 여겨지는 게 당연했다.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그때 이훤이 다짐을 하듯 읊조렸다.
“그냥 두지 않겠어!”
잠시 후 누군가의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소저. 예 소저. 어디 있소? 내가 먹물을 가까이 했지만, 아랫도리는 절대지경의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공소는 키득거리며 공터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바위에 앉아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훤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네가 여기 왜?”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산동삼화가 여기 다 모였네. 행복하냐?”
“무, 무슨 소리냐? 나는 산책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야. 너야말로 이곳에서······. 크헉!”
공소는 이훤에게 잡힌 채 허공에서 발을 굴렀다.
“일단 한 대 맞자.”
퍽!
이훤의 주먹이 아랫배에 파고드는 순간 공소의 허리가 낫처럼 휘어졌다. 그리고는 연회장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토악질을 이어갔다.
“아······.”
공소는 이훤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자마자 아랫배를 움켜쥔 채 앓는 소리를 냈다.
이훤은 손에 토사물이 묻었지만, 입꼬리를 올렸다.
저 새끼는 맞는 법을 모른다.
지금껏 신공부라는 뒷배만 믿고, 호의호식한 자였다.
그러니 때리는 만큼 술술 털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크흑!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신공부가 움직이면 중원의 유림이······.”
퍽! 퍽! 퍽!
공소는 딱 세 대만에 이훤의 발을 부여잡았다.
“그, 그만해. 살려줘.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이훤은 공소의 앞에 쪼그려 앉은 후 머리채를 낚아챘다.
“지금부터 네가 좋아하는 색깔과 여자 취향,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읽는 책을 제외한 모든 걸 얘기해. 알겠어?”
“네, 네.”
누군가 칼보다 붓이 강하다고 그러더라.
한데 주먹은 붓보다 강했다.
< 42, 금주 중입니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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