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금주 중입니다. >
42, 금주 중입니다.
악설(岳薛)은 예영영에 비해 아름답지 않을 뿐 박색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수련을 거르지 않고, 좋은 것만 먹으며 자랐으니 못 생기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구릿빛 피부로 인해 건강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혹자는 예영영과는 다른 아름다움이라고 칭했다.
‘결국 예 소저보다 별로라는 뜻이잖아.’
악설은 그 혹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
“악 소저의 협명을 예전부터 대단하게······.”
얼굴에 기름기가 가득한 청년이 악설의 눈치를 보며 술이라도 한 잔 받으려 했다. 그냥 봐도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거늘 그가 어디서 온 줄 봐버린 상태였다. 예영영의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깜냥이 되지 않았는지 자리에서 밀려난 청년이다.
예영영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아니겠지.
‘꿩 대신 닭인 건가.’
악설은 이름 모를 청년의 아부를 귓등으로 흘린 채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반대편에서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예영영을 힐끔 쳐다봤다.
여자인 그녀가 봐도 어여뻤다.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고왔고, 눈썹과 눈동자는 또 어찌 저리 까맣게 반짝이는 걸까. 그러면서도 외모보다 내면의 학식을 자랑하는 걸 보면 성격도 좋아보였다.
반쯤 사내와 마찬가지인 자신과는 달랐다.
‘다른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냥 다른 거로구나.’
악설은 불현 듯 초대장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산동삼화.
한 성에 거주하는 사람이 수만에서 수십만 일 게다. 그 중에서 세 송이의 꽃을 뽑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거기에 그녀가 포함된 것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롭게 추가된 매화군자라는 사람이 신경 쓰였다.
‘매화를 사랑하고, 술을 즐기며, 협행을 삶과 같이 하는 사람이라······.’
세가의 가솔에게 물었더니 그리 답하더라.
일견하기에도 예영영과 잘 어울리는 한쌍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저들도 안달이 나서 평소보다 더 예영영의 곁을 맴도는 것이리라.
어차피 그녀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연회장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세가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변고인 걸까?’
세가 내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것과 권한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변고가 일어났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고, 그 내용은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평소 수련을 하고, 양민을 구하는 것만 목적으로 했기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머리도 별다른 가설을 도출해내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잘 하는 것을 떠올렸다.
‘숲 속에 있는 공터에 가야겠어.’
밤이 되면 선남선녀들은 삼삼오오 흩어질 것이고, 그녀는 기다리던 수련의 기회를 얻게 되리라. 하나 해는 이제 갓 중천을 넘겼고, 옆의 청년은 지치지도 않는 듯 쉴 새 없이 무슨 말인지도 모를 아부를 이어갔다.
확실히 자리가 너무 불편했다.
‘하아.’
갑작스레 청년의 수다가 끊겼다.
악설은 힐끔 청년을 바라봤고, 이내 그의 시선을 좇았다.
동시에 하인의 마지막 내빈을 소개했다.
“취선관의 관주이자, 당금 산동성에서 협객의 이름을 널리 떨치고 계신 매화군자 이훤, 이 소협입니다!”
마치 주빈을 소개하듯 활기찬 외침이다.
참석자들은 마지막 꽃이 등장하는 순간 표한 표정으로 입구 쪽을 바라봤다. 하나 이미 공소를 통해 이훤을 초대한 연유를 전해들은 후였다.
‘드디어 광대가 등장인가?’
‘훗!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감수해야지.’
장차 산동 강호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뒷배도 없이 협행을 통해 이름을 알렸다고 해서 대우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오문에 돈을 주고 이름을 퍼트렸다는군.’
‘협객은 개뿔! 이래서 출신 성분이 중요한 거야.’
산동성의 후기지수들은 거만한 자세로 입구를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꽃이 들어섰다.
다만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음침하면서도 초췌한 몰골로 말이다. 입구 쪽에 앉았던 후기지수들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깨는 축 쳐졌고, 허리는 굽었으며, 머리카락은 며칠 동안 감지 않은 것처럼 뭉쳐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제외하더라도 퀴퀴한 냄새가 너무 심했다.
‘아니,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야?’
‘술 냄새가 이 정도로······.’
하인도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소협은 저, 저 쪽에 앉으시면 됩니다.”
후기지수들은 매화군자가 아니라 황보태웅을 쳐다봤다.
이곳의 왕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였다.
한데 왕의 초빙을 받고 온 자가 자리를 모욕하는 듯한 상태이니 그냥 넘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공소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두고 볼 거야?’
황보태웅은 공소가 소리 없이 전한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매화군자를 안내하던 하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아! 이 소협, 저쪽으로······.”
하인은 황보태웅이 있는 쪽을 가리켰지만, 매화군자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연회장을 둘러보더니 제멋대로 탁자 사이를 지나쳤다. 그리고는 악설의 옆 자리를 차지 하고 있던 청년을 향해 손짓했다.
청년은 코를 막은 채 인상을 썼다.
“뭐, 뭐야?”
“나와.”
“뭐라고?”
“나오라고. 뒈지기 싫으면.”
매화군자의 눈에 한차례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청년은 쭈뼛거리더니 주변의 눈치를 살핀 후 자리를 비켰다. 하지만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는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런 고약한 냄새! 빌어먹을! 여기 못 있겠군.”
매화군자는 청년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는 빈자리를 차지한 후 악설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악설?”
악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면부지의 사내가 예영영보다 자신에게 먼저 와준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 초면에 이름을 부르고, 묘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훑어보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무슨 일이시지요?”
그녀의 표정에 경멸이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수련과 협행을 목표로 살아온 그녀에게 만취상태인 사내가 반가울 리 만무했다. 한데 매화군자가 뜻밖의 한 마디를 꺼냈을 때에는 당황스러움을 고스란히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악설은 금세 표정을 달리했다.
완숙한 절정의 고수인 그녀가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예기치 못한 한 마디에 잠시 놀랐을 뿐이다.
“저는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나도 그래요. 그냥 궁금했거든요. 산동악가가 어떻게 황보세가를 밀어내고 오대세가에 속했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창고에서 선대의 비급이나, 산에서 영약 밭이라도 발견하지 않은 이상 말이지요.”
“무례하시군요.”
매화군자는 느긋하게 대꾸했다.
“술에 취해서 그래요.”
“아니! 그걸 자랑이라고······.”
악설의 목소리가 커지려는 순간 매화군자의 등 뒤에서 헛기침이 들려왔다. 참다 못한 황보태웅과 공소가 행차하여 매화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매화군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문진과 제월방. 어느 쪽부터 처리를 해야 할까?’
이훤은 제월방주의 악행을 잊지 못했다.
회귀 이후 모든 것이 즐거웠지만, 그처럼 잔혹한 광경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귀 전의 삶이 비참했다지만, 최소한 이처럼 잔악무도한 행위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더 평온한 삶일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술이다. 그는 소룡대연에 참석하는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천룡전이나 제월방이 인간 이하임은 분명했다.
하나 최소한 제월방주처럼 인간의 흔적을 전리품이나 눈요깃거리로 삼아서는 아니 될 터였다.
결국 해답을 찾았다.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에게 삶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그 첫 걸음이어야 할 황보태웅이 눈앞에 등장했다.
“누구?”
이훤의 물음에 황보태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것은 명백한 무시의 표현이다.
공소 또한 언짢음을 숨기지 못했다.
황보태웅을 무시하는 건 연회를 관장하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매화군자께서 술을 많이 드셨네.”
공소는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은 후 황보태웅을 소개했다.
“이쪽은 소룡대연의 주최자이자, 황보세가의 삼남인 소천룡 황보 소협이외다. 그리고 무례한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내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지.”
공소의 비아냥 가득한 소개에 황보태웅은 포권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황보태웅이야. 먼 길 오느라 피곤했나 보네. 나를 보지 못했나봐? 어쨌든 참석해줘서 고마워. 내가 직접 술을 한 잔 따라주지.”
한데 매화군자는 악설에게 돌아앉으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됐어. 금주 중이야.”
“뭐라고?”
황보태웅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 술을 마신 자가 이제 와서 술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는 뻔했다. 심지어 금주라는 되도 않는 핑계라면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공소가 황보태웅의 소매깃을 슬쩍 잡았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지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연회의 분위기가 깨져. 적당히 기회를 봐서 손을 보는 편이 나아.“
제아무리 망나니 같다고 해도 초대를 받은 자였다. 그리고 자칫 황보태웅이 직접 손을 썼다가 이훤과 동격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황보태웅은 공소의 눈짓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아, 금주. 좋지. 무인이라면 몸을 챙겨야지. 그렇다면 더 권할 수 없겠네. 잠시 인사를 하고 올 테니 따로 이야기를 하자고.”
그가 돌아서는 순간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은 혀를 찼다.
‘저 놈은 곱게 못 죽겠군.’
‘매화군자라는 허명에 취해서 정신을 놓았어.’
그들은 확신했다.
이훤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시신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은 악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뭐하는 거예요?”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진짜 금주 중이야. 본래 영웅들은 큰 일을 하기 전에는 술을 마시지 않거든.”
“그게 무슨 소리에요?”
“삼국지연의도 못 봤어? 거기 관우가 그러잖아. 술이 식기 전에······.”
악설은 이훤을 노려보는 것으로 말을 끊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황보 공자와 대립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그리고 당신! 내가 우스워? 시답지 않은 소리 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 나는 지금 당신 외에도 신경 쓸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맹수가 낮게 울 듯 갸르릉 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하는 당찬 여자였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슬쩍 상석에 앉아 있는 황보태웅을 바라봤다. 그는 이훤과의 일을 잊은 듯 다른 이들과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네 처분은 아직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훤은 다시 악설을 보며 물었다.
“경계하는 건 당연해. 한데 말이야. 하나만 묻자고.”
그가 목소리를 낮추자, 악설도 어쩔 수 없이 귀를 기울였다.
“벽력창 악 대협을 어디 가면 뵐 수 있을까?”
그 순간 악설의 눈빛이 찰나간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공혈륜겁을 익힌 이훤의 감각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역시 뭔가 일어났군.’
악설은 미간을 좁혔다.
“본가의 큰 어른을 왜 찾는지 모르겠군요.”
“실종되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맞아?”
“본가의 일입니다.”
“너무 숨기면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어?”
결국 이훤의 끊임없는 추궁에 악설이 발끈했다.
“당신!”
후기지수들은 다시 한 번 이훤에게 주목하며 혀를 찼다. 누가 봐도 추파를 던지며 치근덕거리는 사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훤은 양 손을 슬쩍 보이며 웃었다.
“그분께서 담그신 술이 그렇게 기가 막히더라고. 그래서 한 잔 더 얻어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
악설은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금주한다면서요!”
이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네.”
악설은 이훤의 능글맞은 한 마디에 한참을 노려봤다.
경박하고, 무례하면서도 묘하게 의심스러운 사내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다시는 이훤을 보지 않았다.
‘아, 수련하러 가고 싶다.’
*
이훤은 여전히 악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만 보아도 세가 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벽력창 악재는 당금 산동악가의 가주인 악오의 친형이다. 그리고 악오는 팔순에 가까운 노령이다. 즉 악설은 악오가 늘그막에 얻은 금지옥엽인 셈이다. 아닌 말로 당대 산동악가의 소가주가 환갑을 바라보고 있으니 악설과는 사십 년의 나이 차가 날 정도였다.
그러니 악재가 세가 내에 존재했다면 악설을 매일 같이 끼고 살았으리라. 반대로 세가 내에 없었다면 악설은 악재의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호기심을 내비쳤어야 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가깝게 지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산동악가의 부흥에 대한 그림이 어느 정도 그려졌다.
이훤은 벽력창 악재가 신마의 깨달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다면 산동성에서 다섯 손가락에도 끼이지 못하던 악가(岳家)가 수십 년 만에 전통의 강호인 황보세가를 밀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봐.”
이훤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호리호리한 체구의 청년이 다가왔다. 자신을 용린방의 소방주, 사경오라고 소개하더니 대뜸 입꼬리를 올렸다.
“산동삼화라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수염이 숭숭 난 사내놈이 올 줄은 몰랐네. 어떻게 별호는 마음에 드는가? 아! 하오문하고 개방에 돈을 대서 만든 별호라며?”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녀석이다.
조금 전 황보태웅의 곁을 맴돌던 녀석이다.
그리고 놈의 사주를 받고 시비를 거는 녀석이다.
처분이 내려졌다.
“새끼.”
이훤은 히죽 웃더니 사경오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힘껏 당겨 녀석의 눈높이를 맞췄다.
“귀엽게 노네.”
그리고는 손목을 부러트린 후 다른 손으로 놈의 뒤통수를 움켜쥔 채 내리꽂았다.
콰직!
자단목으로 만든 탁자가 둘로 쪼개졌다.
사경오는 탁자가 쪼개졌을 때의 충격으로 혼절했고, 청석에 머리를 박은 후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훤은 사경오의 머리에 발을 올린 후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또 나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
< 42, 금주 중입니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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