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꽃 중의 꽃. (2) >
제월방은 이틀 거리였다.
하나 고천락이 모는 마차는 빛살처럼 내달렸고, 일각 전 제월방에 도착했다. 그 말인즉슨 지금 현재 제월방이 멸문했음을 의미할 터였다.
“물건 챙기자.”
이훤은 제월방주가 깔고 앉아 있던 호피를 매만지며 말했다. 고천락은 이곳저곳을 뒤지며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겼다. 가볍고, 비싼 물건일수록 마차에 탑승할 자격을 얻게 된다.
“너무 능숙하신 걸요?”
관자림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피가 낭자한 바닥을 피하며 다가왔다.
어쩌면 제월방도의 피가 관자림의 옷보다 더 깨끗할 수도 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이훤에 손에 묻은 피를 호피로 닦으며 말했다.
“술을 마시려면 큰 돈이 필요해.”
“그렇군요.”
관자림은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훤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제월방은 제법 규모가 컸다.
전각만 해도 십여 개가 넘었고, 창고까지 더하면 건물만 서른 개에 가까웠다. 다행히 납치된 아이들이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마음 편히 때리고, 죽이고, 불을 질렀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쯤 제월방주가 머물던 이곳을 제외하면 모든 곳이 불탔으리라. 그리고 화마에 삼켜진 시신만 해도 백여 구가 넘을 터였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관자림은 죽간에 무언가를 끄적이며 물었다.
“뭐가요?”
“사람이 죽는 거. 그것도 이렇게 많이!”
이훤의 말에 관자림은 무릎을 쳤다.
“아! 정파에 소속됐는데 생명을 중시하지 않아서 놀라셨군요. 그리고 대협의 손속이 너무 잔인하다고 만류하지 않아도 신경이 쓰이셨을 테고요.”
“알면 그냥 대답해.”
관자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상관없는데요.”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상관이 없단다.
아예 사람의 죽음 자체를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저런 것들은 사내가 아닙니다. 사내이기를 포기한 자라면 사람도 아니고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지요. 불에 잘 타는 쓰레기라서 다행입니다. 저대로 그냥 뒀으면 처리하기 곤란했을 겁니다. 하하하!”
더 이상 지켜보는 건 그만해야겠다.
녀석의 사상은 육대괴마가 되기 전부터 정립된 듯했다. 저 놈은 지금도 이십 년 후에 봤던 색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 가서 너도 좀 챙겨라.”
개방도가 아니라 도적떼의 무리를 대하듯 말했다.
한데 관자림은 빙긋 웃으며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를 따르는 사내들이 제법 되거든요. 용돈이라도 좀 챙겨주고 오겠습니다.”
개방도가 개방도에게 참 잘하는 짓이다.
“올 때 좋은 술이나 한 병 가져와.”
“저만 믿으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색마가 찾아오는 술이라면 최고급일 것이 분명했다.
잠시 혼자가 된 이훤은 육대괴마를 떠올렸다.
‘뭔가 예전하고 점점 비슷해지는 걸?’
여섯 명이 모두 모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성향이 존재했고, 목표가 있었으며, 태생적으로 괴벽을 지녔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육대괴마였다.
그러니 본래부터 불리던 별호도 존재했다.
탈마는 도벽으로 인해 무영괴도(無影怪盜)라 불렸다.
색마는 개방조차 인정한 정보망으로 인해 만천색(滿天索)이라 칭했다.
이훤이 가장 많이 만난 두 사람이다.
한 명은 술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한 명은 그 술을 훔쳤고, 취마는 술만 마셨다.
소마는 가끔 육대괴마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여섯 명이 함께 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왔다. 제아무리 공적이라고 해도 어디선가는 찾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하여 놈을 모든 것의 해답을 지녔다는 의미로 만해유사(萬解儒士)라 불렀다.
반면 검마와 한마는 그리 자주 본 사이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목표가 뚜렷했다.
검마 패왕종(覇王種)은 호승심이 하늘에 닿을 만큼 대단했다. 패왕의 씨앗이라는 별호답게 검을 잘 쓰는 자가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문을 박차고 천 리를 뛰었다. 심지어 마교의 검마와 별호가 겹친다는 이유로 생사결을 청하기도 했다. 물론 이겼기에 검마로서 살아남았으리라.
그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
싸우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는 놈이었다.
조금만 호승심을 죽이고, 신뢰를 쌓았다면 검제나 전신이 되었을 터였다.
마지막 한마는 좀 그렇다.
‘세상 모든 여자와 술을 마실 수 있지만, 그 여자는 정말 별로야.’
이훤은 회귀 이후 처음으로 한마를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쳤다. 아마 의식적으로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던 듯했다.
한마(恨魔), 그리고 수라혈녀(修羅血女).
별호에 일관성이 있다.
별호만 봐도 그녀의 목적이 그려졌다.
그녀는 평생 누군가를 죽여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산다고 했다. 물론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절대로 물어보지 않았다.
“무서운 것.”
이훤이 진저리를 치는 순간 고천락이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제가 봤을 때에는 진짜 제대로 미친 놈인 걸요.”
“무슨 소리야?”
고천락은 말없이 비밀통로에서 비켰다.
이훤은 호피를 만지작거리며 고천락이 찾아낸 비밀 통로 앞에 섰다. 비밀 통로의 끝을 확인하는 순간 양 손에 힘이 들어갔고, 호피가 갈가리 찢겨 흩어졌다.
“이런 개 씨부럴 새끼.”
통로는 짧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도 보잘 것 없었다.
벽에 손톱을 붙여 놨다.
크기로 보아 새끼 손가락 손톱일 터였다.
한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벽에 가득 채울 만큼 말이다.
“그 새끼, 시체 어디 있냐?”
“태웠어요.”
“······.”
이훤은 한참동안 통로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빨리 태우고 가자.”
“어디로 가게요?”
“개가 잘못을 했으면 주인에게 따져야지.”
잠시 후 제월방의 마지막 전각이 화마에 휩싸여 허물어졌고, 마차 한 대가 북쪽을 향해 질주했다.
*
황보태웅은 황보세가의 직계답게 체격이 컸다.
세가의 비전인 진뢰장과 천왕오권을 상당 부분 익혔다. 거기에 더하여 차기 가주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천왕패검도 수련했다. 가주의 자식이 구남삼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후계 구도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하나 차기 가주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소가주는 장자라는 이점만으로도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지금도 장자와 차자는 가솔들을 자신의 그늘 아래 끌어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할 터였다.
‘그 개자식들을 이기려면······.’
황보태웅은 자신의 힘을 세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았다. 산동성의 중소방파들이 그를 지지한다면 후계 구도의 한 축이 될 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소룡대연이다.
소룡대연은 산동성에 존재하는 방파의 후계자들과 후기지수들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연회였다. 올해로 사 년 째였고, 참석자는 매해 기록을 경신했다.
‘이게 정답이었어.’
황보태웅은 연회장을 둘러봤다.
원형 탁자가 열 개다.
한 곳 당 다섯 명이 앉을 수 있으니 총 오십 명이 참석하는 셈이다. 산동성의 난다 긴다 하는 방파의 자제들은 물론이고, 관직에 출사한 자와 때마침 산동성을 경유하는 후기지수들까지 초청했다. 소룡대연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이야 말로 작은 산동성, 그 자체였다.
“즐거워보이는군.”
황보태웅은 친우인 공소가 다가오자 히죽 웃었다.
“사 년 동안 외가의 돈을 모조리 끌어다 썼어. 이 정도가 되지 않으면 본가는 흔들리지 않아. 그래도 자네가 도와줘서 참 다행이야.”
공소는 산동성의 삼대 패주라 할 수 있는 신공부의 소부주였다. 어린 시절 무사부가 같았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 사이다. 만약 공소를 장자나 차자에게 빼앗겼다면 소룡대연의 위명은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기에 황보태웅도 공소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우리야 글이나 읽고, 시나 짓는 한량들이지. 강호인의 손짓 한 번이면 쓸려나갈 갈대 같은. 그런 거야. 그렇지 않나?”
“흥! 신공부를 통해 출사한 이들과 중원 곳곳에 퍼져 있는 유림이 한 목소리를 내는 순간 황보세가 쯤은 하루아침에 패륜의 상징이 되어 사파 취급 받을 걸세. 그러니 겸양도 적당히 하라고.”
공소는 슬쩍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참석자 명단을 보아하니 쓸모없는 녀석이 끼어 있던데? 산동삼화라니. 언제부터 산동삼화가 생겼지?”
“그림이 좋잖아. 둘 보다는 셋이 나아.”
“한데 수염이 숭숭 난 사내새끼잖아.”
황보태웅은 공소를 보며 히죽 웃었다.
공소는 곱상한 외모로 여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한데 매화군자라고 하니 질투가 났나 보다.
“매번 같은 사람만 보면 연회의 흥이 살지 않아. 요즘 제법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출신이 비천해. 유흥 거리로 삼아 놀려주는 것도 재미있을 걸세.”
“훗, 그런 의미였나? 하긴 사내에게 산동삼화라고 부르는 것부터가 좋은 뜻이 아니었지.”
황보태웅은 공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는 신경 쓰지 말고 언제나처럼 연회를 즐기면 되는 것이야.”
공소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하지.”
“뭔가?”
황보태웅의 말에 공소는 새끼손가락을 펼쳤다.
“연결 좀 해줘.”
“악설?”
“미쳤나? 목석같은 여자는 필요 없어. 보들보들하고, 살가운 여자가 좋다고.”
“부용지희 예영영이로군.”
공소는 음침한 눈빛을 발산하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지난번에 그 약 말이야. 계집이 알아서 벗고, 알아서 움직이더라고. 효과 죽이더라.”
황보태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해봤자 땀만 흘릴 뿐이야.”
“크큭, 허락으로 알겠네.”
“우리 사이에 허락은 무슨! 자네는 밖에서 잠깐 보자는 언질이나 해둬. 약은 내가 알아서 먹여놓겠네.”
“좋았어.”
두 사람은 번들거리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황보태웅은 공소가 떠나자, 손짓을 했다.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수하가 허리를 숙였다.
“들었지? 예영영을 세뇌해놓으라고 해.”
“부용지희는 청도대상단주의 무남독녀입니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공소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청도대상단은 산동성 동부의 대지주나 마찬가지다.
산이 높고, 땅이 험해서 모두가 버렸던 지역이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동해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상단이었다. 아닌 말로 산동성의 재화 중 절반 이상이 청도대상단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괜찮아. 지금껏 우리가 실패한 적이 있던가?”
수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황보태웅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가느다란 눈으로 공소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만약 잘못되면 우리 쪽에서 먼저 해결을 해. 그렇게만 되면 청도대상단과 신공부를 동시에 차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
수하는 고개를 조아렸다.
“양사께 전하겠습니다.”
황보태웅은 수하를 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룡대연은 태산 아래 풍광이 좋은 장원에서 진행됐다. 초대받지 못한 자는 올 수 없고, 나이가 많은 자도 올 수 없다. 그러니 고삐 풀린 선남선녀가 인연을 맺기에 충분한 장소였다.
‘소룡대연의 주인인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쁜데······.’
황보세가의 주인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를 황홀하게 만들어줄 내빈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어릴 때부터 부모와 집안으로 엮였던 이들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들은 일 년 만에 만났음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자리의 칠 할 정도가 주인을 찾았을 때였다.
“청도대상단의 부용지희 예 소저가 오셨습니다.”
하인의 외침마다 흥겨웠다.
황보태웅과 공소를 비롯한 사내들은 목을 빼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명불허전이 아님을 증명하듯 빼어난 미색의 예영영이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예 소저! 오랜만입니다.”
“예 소저의 미색은 날이 갈수록······.”
“일전 청도대상단에서 잠시 인사를 나눴던······.”
모든 사람이 예영영을 반겼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표정을 풀지 못했다.
천암일화(千巖一華) 악설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예영영과 함께 묶여서 불렸지만, 미색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별호인 천암일화는 천 개의 바위 사이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의미였다. 그 말처럼 산동악가는 사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지만, 세가 밖에서는 아니었다. 특히 예영영과 함께 있으면 더더욱 비교되기 마련이다. 그 증거로 그녀가 등장했을 때에는 대부분 목례를 하거나, 멀리서 손을 흔들었을 뿐이다.
‘불편해.’
그녀는 단창으로 분리한 애병을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연무장에서 하루 종일 창을 휘두르는 편이 훨씬 더 즐거웠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신신당부를 하던 소가주를 떠올리면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 본가에 변고가 생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돼.
하지만 무슨 일인지 듣지 못했다.
- 이럴 때일수록 참석해서 웃어야 한다.
정말 오고 싶지 않았다.
- 그리고 그를 조심해라! 눈을 보지 마! 절대로!
< 41, 꽃 중의 꽃.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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