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산동삼화(山東三花).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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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대괴마(六大怪魔)의 수장은 취마(醉魔)였다.
취마를 정점으로 소마(笑魔)가 육대괴마를 규합했다.
그 아래로는 서열이나 배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마(恨魔)와 색마(色魔), 검마(劍魔), 그리고 탈마(奪魔)가 자유롭게 어울렸을 뿐이다.
회귀 이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만나고 싶었다. 하나 삶을 허비하면서까지 찾아다닐 만큼 그립지는 않았다. 애초에 출신도 사문도, 자라온 환경도 제각각인지라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어찌 않겠는가.
‘탈마에 이어서.’
한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잠입했던 개미굴에서 탈마를 만났다. 그렇게 녀석과의 인연이 이어졌고, 이제는 녀석의 기연을 위해 산동성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육대괴마를 또다시 만날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색마를 만났네.’
이훤은 동경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관자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십 년 후에 마주할 관자림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육대괴마 중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다. 한데 그런 그가 개방의 제자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제가 이 대협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개방도의 업무란 늘 이런 것이거든요. 한데 이 대협의 행적을 좇을수록 감탄만 늘더이다. 제가 꿈꾸던 이상적인 협객 상과 너무나 같았거든요. 제가 지부장께 이백의 협객행에 나오는 협객처럼 느껴진다고 자랑까지 했습니다!”
관자림은 숨도 쉬지 않고 이훤을 추앙하더니 칭찬을 기다리듯 눈을 반짝였다.
반면 이훤은 나직한 한 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저 눈빛이 너무 부담스럽다.
이래서 색마를 가장 나중에 찾으려고 했다.
‘세상에 기인이 참 많다지만······.’
관자림은 그 중에서도 수위에 꼽혔다.
그는 사내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색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인을 싫어하거나, 증오하지도 않는다.
색을 밝혀서 공적이 됐지만, 피해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땅에 떨어진 돈마저도 주인을 찾아줄 만큼 선량했고, 실제로 나쁜 짓을 하지도 않는다.
녀석은 단지 멋진 사내를 동경했을 뿐이다.
‘그게 나라는 게 문제였지.’
이훤은 회귀 전 술 마시는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인다는 색마의 고백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녀석을 어찌 대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다행히 고천락이 투덜거리며 들어섰다.
그는 불편한 자리가 싫다며 영풍장주의 자식들과 연회를 즐겼다. 물론 적당히 친분을 쌓은 후 정보를 알아내거나, 소지품을 훔치려 했겠지.
“형님, 내가 친구가 어디 있어요?”
이훤의 부름에 달려온 고천락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마 귀한 물건을 훔치기 직전이었나 보다.
이훤은 턱짓으로 관자림을 가리켰다.
관자림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느긋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녀석은 범인이 아니다.
애초에 평범했다면 육대괴마가 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고천락의 대응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녀석은 본능적으로 적대감을 느꼈는지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쇼?”
관자림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고천락의 대응에도 표정 변화 없이 이훤에게 했던 소개를 반복했다. 고천락은 이훤을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하듯 눈빛을 쐈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소닭 보듯 하지만, 장차 육대괴마 내에서 서로를 가장 아끼는 상대가 될 터였다.
한데 그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하여 평소 하듯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렸다.
“그냥.”
“네?”
“내가 봤을 때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왠지 금방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고천락은 헛웃음을 지었다.
“형님, 이제 점도 봐요?”
반면 관자림은 이훤의 말만 들어도 좋았나 보다.
“이 대협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이유가 있겠지요. 소협의 이름은 뭡니까? 취미와 식성도 알려주면 제가 다가가기가 한결 수월하겠네요.”
그가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반면 고천락은 관자림의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에 미간을 좁힌 채 뒷걸음질 쳤다.
“왜 이러세요?”
“하하하! 개방도라고 해서 다 냄새가 나는 건 아닙니다. 너무 꺼려하지 마요.”
“냄새 난다고! 그것도 엄청 많이 나.”
“이상하군요. 분명 옷을 갈아입고 왔거늘.”
“그 옷 냄새가 제일 심해!”
이훤은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저들의 성향은 수십 년이 흘러도 만나지 않는 평행선과 같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보이지 않게 챙겨주는 지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탈마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 색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괴벽은 상성이 좋았다.
탈마는 본능인 도벽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마음껏 물건을 훔쳤다. 하여 지형과 건물을 살피고, 주인의 뒷조사를 하며, 물건의 진위 여부까지 파악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한데 색마가 등장한 이후 그 과정이 사라졌다.
녀석은 사내에 대한 관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모든 것을 알아냈다. 그러니 색마가 조사하고, 탈마가 훔치는 자연스러운 구조가 완성되는 게다.
이훤은 두 사람의 말싸움을 들으며 회귀 전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천락과 관자림이 아니었다.
탈마와 색마였다.
그리고 무영괴도((無影怪盜)와 만천색(滿天索)이라 불리는 괴마이기도 했다.
‘우리 중에서 가장 화려한 걸 좋아하던 네가 개방도였을 줄 어찌 알았겠냐?’
그러던 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관자림은 만천색이라 불릴 만큼 조사하고, 캐내고, 추론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러니 그를 통한다면 천룡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비선각의 부각주인 종초홍의 정보도 지금껏 훌륭했지만, 정보란 여러 곳에서 모을수록 신뢰도가 올라가지 않던가. 그러니 색마는 어찌 보면 육대괴마 중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그만!”
관자림은 이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질척거리는 행위를 멈췄다. 고천락은 자유의 몸이 된 이후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영풍장주께 부탁을 한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던가.
영풍장주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총관을 불렀다.
“조용한 곳에 자리를 만들게.”
“그리 하겠습니다.”
관자림과의 만남이 범상치 않으니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라는 배려였다. 이훤은 오랜만에 존경할만한 노강호에게 기꺼이 예를 표했다.
“객의 입장에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외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장차 먼 훗날 세 사람의 만남이 도원결의에 비견될지 누가 알겠소이까? 이렇게라도 영풍장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면 남는 장사가 아니겠소이까?”
“감사합니다.”
영풍장주는 조용한 별채를 준비해줬다.
고천락은 별채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열려 했다.
이훤이 그것을 제지한 후 관자림에게 물었다.
“왜 왔어?”
관자림은 술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훤이 잔을 비우면 다시 채워주려는 듯했다. 한데 대답이 나와야 잔을 비울 듯하니 입을 열었다.
“개방은 정파의 눈과 귀입니다. 훌륭한 정파의 후기지수가 출도를 했으니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하지요. 여기까지는 개방도의 입장이었습니다.”
이훤은 손을 흔들어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 대협의 행보에 관심이 많아서요. 추성 지부에서 출발하면서 산서성 개미굴과 섬서성 화산 사건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산서성의 보고서에는 대단히 충동적이며 즉흥적이기에 추후 조사를 요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녀석은 회귀 전과 같았다.
일단 한 번 호의를 가지면 내부의 정보를 누설하는데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호의는 상대가 혼인을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술 때문에 즉흥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대협은 나이에 비해 경륜이 높으며, 식견 또한 대단합니다. 아마 치밀한 계획과 원대한 포부를 지니신 게 아닐까 합니다.”
얼굴에 금칠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
한데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이훤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가까이서 보고 싶다는 건 함께 하자는 이야기인가?”
관자림이 쑥쓰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럴 때마다 비듬이 눈처럼 비산했다.
고천락이 의자를 슬쩍 들어 거리를 벌릴 즈음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다만 대협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으니 원하신다면 눈에 띄지 않게 다니겠습니다.”
호오! 그건 나쁘지 않아.
“자네가 개방의 사결제자라는 걸 제외하면 아는 것이 없어. 그러니까 천락이도 자네와 섣불리 가까워질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 자네가 함께 다녀도 될 만큼 쓸 만한지 보여주는 건 어떨까?”
관자림은 이런 대화 자체가 즐거웠다.
“예를 들면요?”
“내가 여기 온 이유?”
이훤의 물음에 고천락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껏 그는 여행의 길잡이를 자처하며 맛집과 악당을 찾아냈다. 뒷조사를 한 후 이훤이 징벌을 내리면 그것을 소문내는 역할도 도맡았다. 그랬던 그조차 영풍장에 대한 일은 반나절 전에야 알 수 있었다.
‘형님도 저 더러운 놈을 떼어내고 싶으신 거로군.’
관자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대협의 행로를 살펴보면 아마 곡부나 태산인 듯합니다. 한데 영풍장은 행로에서 벗어나지요. 영풍장에 좋은 술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단순히 인품 좋은 장주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오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왜? 나도 좋은 사람하고 어울리고 싶어.”
“대협의 존성대명과 직위, 별호가 치밀한 통제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퍼졌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풍장으로 가셨으니 의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사를 좀 했습니다. 최근 제월방과 사이가 좋지 않더라고요. 제월방은 황보세가의 방계 중에서도 손꼽힐 만큼 커다란 방파입니다. 영풍장이 어찌 할 수 없을 정도지요. 분란의 이유 또한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애매합니다. 제월방은 영풍현의 상단과 무관에게 보호비를 받고, 지켜주려 합니다. 한데 영풍장은 이권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그저 보호비를 조금 낮추자고 권유를 하는 입장이고요.”
관자림이 목소리를 낮췄다.
“제월방에서 출발한 자들이 오늘 도착합니다. 약간의 무력 정도는 쓸 생각이 있겠지요. 하나 대협은 그냥 두시지 않을 생각이겠지요?”
“어째서?”
“제 예상으로는 사적인 원한이 있으신 듯한데······.”
이훤은 웃었다.
관자림의 말처럼 그는 영풍장이 아니라 제월방을 노렸다. 회귀 전 공적으로 몰렸을 때 황보세가와 함께 움직였던 놈들이 아니던가. 산동성에 진입했을 무렵 불현 듯 뇌리를 스쳤다. 생각해보니 제월방은 황보세가를 대신하여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악인을 징치하는 김에 겸사겸사 놈들에게 한풀이라도 할 요량으로 영풍장을 찾아온 셈이다.
힘만큼 중요한 것이 명분이니까.
술 한 잔, 밥 한 그릇 얻어먹었으니 개입할 명분은 이미 충족된 셈이다.
“좋아! 따라와. 대신 눈에 띄지는 말고.”
고천락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관자림은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소리 없이 환호했다. 그리고 이내 품안에서 서찰을 꺼냈다.
“그리고 오늘 갑작스럽게 찾아뵌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이훤은 관자림이 건넨 서찰의 끝을 조심스럽게 받았다. 아무리 회귀 전에 알던 사이라고 해도 거지와는 손을 잡는 게 아니다.
“소룡대연이 뭐야?”
“산동성 내의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입니다. 이번에는 산동삼화가 모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줬으면 하더군요.”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동삼화?”
고천락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황급히 개입했다.
“며칠 전 주루에서 들었잖아요. 예영영과 악설!”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부용지희(芙蓉智姬) 예영영은 학식과 미모가 뛰어났고, 천암일화(千巖一華) 악설은 무공과 협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삼화라며?”
관자림은 오른 손을 펴고, 반대 손으로 손등을 받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훤을 향해 뻗었다.
“매화군자께서도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달랍니다.”
이 새끼야!
그 말을 하면서 얼굴을 왜 붉혀?
그 때 별채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아무래도 기다리던 손님이 온 듯했다.
< 40, 산동삼화(山東三花).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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