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산동삼화(山東三花). (2) >
그 날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훤은 본래 유유자적하게 술이나 마시면서 삶을 즐기려고 했다. 어차피 천룡전은 어디에나 존재하니 꼬리만 따라가도 중원 곳곳을 여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신양명은 개나 주라지.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술이나 진탕 마시다가, 겸사겸사 천룡전도 때려잡으면서 여벌로 생긴 삶을 즐겨보련다.
그렇게 여겼거늘 이제는 생각을 달리했다.
알아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최소한 망아취자와 노군은 이훤의 성공을 박수 치며 좋아할 게다. 그런 두 사람에게 자랑거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생긴 집이었고, 가족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닥쳐라! 사람이 살다보면 돈도 벌고 싶고 그렇지! 하지만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자에게 폭리를 취하면서 호의호식하고 싶더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촌락에서 염왕채를 돌리던 사파의 잡졸들을 때려잡았다. 양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고, 몇몇은 대영웅이 사람을 구했다며 절을 했다.
이훤은 뒷짐을 진 채 한숨을 흘렸다.
“정파의 세상이라면 최소한 사람답게는 살아야지! 곧 좋은 날이 올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어요!”
거짓말은 아니다.
중원 곳곳에서 암약하는 천룡전의 무리를 모두 때려잡으면 어찌됐든 조금은 살기가 좋아지지 않겠는가.
고천락은 가가호호를 돌며 약간의 돈과 먹을 것을 나눠줬다.
“우리 형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이름이요? 형님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즐기지 않으세요. 언제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화산의 취선관을 찾으세요.”
화산에서도 가장 험준한 곳에 있는 낙안봉 정상까지 찾아올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무엇보다 장공잔도가 끊긴 이상 고천락의 말은 빈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훤이라는 이름의 훤(昍)은 해가 두 개라는 의미입니다. 저 하늘의 태양이 존재하나, 만인을 굽어 살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 형님께서 낮은 태양이 되어 협행을 하시는 것뿐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름을 알리고, 천명을 받은 것처럼 꾸며냈다.
“아! 저 마차요? 형님께서는 매화의 고아함을 담고 싶으셔서 늘 함께 하시지요. 하하하! 오죽했으면 강호의 동도들이 매화군자라고 부르겠습니까.”
어차피 맛집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시느라 느긋하게 떠났던 길이다. 그 와중에 악인을 처단하는 것이 더해졌을 뿐이니 오히려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좋은 소일거리였다.
그렇게 취선관과 이훤, 그리고 매화군자라는 이름이 하남성 북부를 떠돌았다. 그리고 목적지인 산동성에 들어서는 순간 하오문에 건넸던 거금 은자 삼천 냥이 위력을 발휘했다.
*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정파의 세상이라고 해도 거지가 사라질 리 없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많은 거지가 생겨났고, 그들은 고스란히 개방의 눈과 귀가 되었다.
흔히 구파일방이라 칭할 때의 일방이 바로 개방이다.
고금을 통틀어 오대세가는 속세의 성향을 짙게 띄기에 사리사욕이나 권세를 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정파의 핵심을 논할 때에는 오가 대신 개방을 넣었다. 개방(丐幇)은 정파의 눈과 귀가 되어 사마외도의 발호를 최전선에서 막아내는 거지들의 방파였다.
“이건 뭐야?”
닭다리를 뜯고 있던 봉두난발의 거지는 수하가 건넨 광목천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정보지요.”
“그럼 네가 나한테 춘화라도 주겠냐? 당연히 정보겠지.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정보를 종이나 천에 적어서 보여줬어? 이런데 쓸 돈이 있으면 가서 개다리나 더 얻어와!”
개방의 산동성 추성 지부의 지부장은 추월개(秋月丐)라 불렸다. 가을 밤 달이 밝은 날 개방에 입문했다고 해서 추월개란다. 하지만 그는 허술한 이름과 달리 개방 내에서 입지가 탄탄했다.
방주의 후계자를 후개라 하는데 그는 허리에 여섯 개의 매듭을 묶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부장들은 다섯 개의 매듭을 묶은 오결제자였다. 한데 추월개는 무려 여섯 개를 묶었다.
그만큼 추성 지부는 강북에서 요처였다.
바로 산동성을 구성하는 문파들의 상황 때문이다.
일단 곡부(曲阜)가 있다.
공자의 고향인 곡부는 대대로 유생과 학사들의 성지였다.
두 번째로 황보세가도 있다.
오대세가에서 밀려났지만, 여전히 군부와 관부로 제자들을 파견보내는 전통의 강호였다.
즉 산동성의 정보에 통달하면 강호와 관부, 그리고 군부의 동향까지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에 강북에서는 총단인 개봉을 제외하면 추성지부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추월개는 수하가 건넨 천을 곁눈질로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이거 뭐야? 매화군자. 뭐하는 놈인데?”
사결제자는 들뜬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남성 일대에서 처음 이목을 끌었습니다. 준수한 외모에 돈도 많고, 협의지심도 투철하더군요. 어제 산동성에 진입했습니다.”
추월개는 침음을 흘렸다.
“흐음, 이런 애들은 봄에 많이 나오는데 말이지.”
강호의 영웅이나, 협객, 그리고 후기지수는 비온 뒤의 죽순처럼 끊이지 않고 등장했다. 그들 중 이름을 날리고, 장수하는 자가 몇이나 될까.
“가을에 출도 하는 놈은 오랜만에 보네.”
“그거 편견입니다.”
추월개는 입꼬리를 올렸다.
“중립성이라고 해. 네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매화군자라는 놈에게 홀딱 빠졌구나. 너 요즘도 남자 쫓아다니냐?”
사결제자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남자를 쫓는 게 아니라 협객과 영웅을 찾는 겁니다!”
추월개는 천을 건네고 닭다리를 계속 뜯었다.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다. 세상은 넓어. 협객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하나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몰라. 산 하나만 넘어도 다른 세상이 바로 중원이다. 구파오가가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정말 그들이 누대에 걸쳐서 좋은 일만 했기 때문일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구파오가의 협행은 구술로 전해지는 것만 해도 끝이 없을 겁니다.”
사결제자의 말에 추월개는 혀를 찼다.
“그걸 전하는 게 우리 역할이다. 협행을 전할지, 악행을 전할지는 우리가 판단하는 거야. 우리가 알리면 중원 전체에 퍼진다. 하나 그래봤자 사문과 별호, 이름이 전부야. 고수의 이름을 팔아서 사기를 치는 놈이 몇 명인 줄 아느냐? 내가 추성 지부에 부임한 이후 잡아낸 녀석들은 삼백 명이 넘는다.”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추월개는 흥이 식은 듯한 사결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얼마 받았냐?”
“개방에 이천, 하오문에 천 냥입니다.”
“후훗, 제법 개방을 위할 줄 아는 녀석이네. 돈 받은 만큼만 퍼트려라. 그리고 이결 제자들 중에 한가한 녀석들을 보내서 지켜보게 해. 멀리서 보다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겠지.”
사결제자는 자신이 직접 갈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던 중 불현 듯 정수리를 매만지고는 인상을 섰다.
“지금 손 닦으신 겁니까?”
“어차피 네 머리에 닦으나, 땅에 닦으나 마찬가지잖아. 거지라면 더러운 걸 명예로 생각해라!”
“그러신 분이 닭은 다리가 아니면 드시지를 않으니······.”
“닥쳐!”
추월개는 마지막 닭다리를 들고, 화제를 돌렸다.
“크흠! 어쨌든 오랜만에 나타난 녀석이니까 잘 지켜봐. 그나저나 이름은 참 잘 지었네. 날 일(日)자를 두 개나 붙이니까 뭔가 있어 보이잖아.”
사결제자가 헤죽 거리며 말을 받았다.
“헤헤, 그렇지요? 역시 하늘이 내린 사람은 이름도 멋있군요.”
추월개는 후계자로 키우는 개방도의 괴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던 중 멸시하는 눈빛에 의아함이 담겼고,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훤, 어디서 들어봤는데.”
“비슷한 이름이야 어디서든 있겠지요.”
“아니야. 그 이름도 특이했어.”
그는 닭다리를 좋아하는 만큼 능력을 갖췄다.
개방 내에서도 기억력과 추론력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뛰어났다. 한때 대과를 준비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제갈세가의 방계 출신이라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
“기억났다! 지난 번에 산서성에서 지도 반출 됐다고 했지. 그 기록을 가져와봐.”
사결제자는 금방 자료를 찾아왔다.
이상한 성격을 제외하면 추월개가 인정할 만큼 놀라운 재주였다.
“그렇지! 여기 있네. 이훤.”
추월개는 산서성에서 올라온 보고서와 사결제자가 가지고 온 정보를 비교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외모 설명은 비슷해. 동일인이잖아.”
사결제자의 눈은 별을 박아넣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렇다면 역탑지대! 개미굴을 박살낸 영웅이 아닙니까? 그가 없었다면 무당파와 무림맹의 기습 공격은 실패했을 겁니다. 분명 이 층이나 삼 층을 헤매다가 소기의 성과로 만족했겠지요. 그걸 해낸 사람이라고요! 이것까지 섞어서 소문을 내면 매화군자라는 별호가 금방 널리 알려질 겁니다!”
하나 추월개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아! 왜요? 이건 알린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결제자의 투정에 추월개는 보고서를 건넸다.
“거기 보이지. 무림맹 비선각에서 당사자의 요청으로 인해 잠가버렸어. 이건 당사자가 요청하거나, 맹의 수뇌부가 허가하지 않는 한 외부로 공개할 수 없는 정보다.”
“아, 이훤이라는 사람은 정말 완벽하군요.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숨기려 하다니요. 마치 이백의 협객행에서 나오는 주인공 같은 걸요.”
추월개는 닭다리로 바위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매화도 그렇고, 개미굴 이후 섬서성으로 간 것도 그래. 화산 쪽인가? 야! 요즘 섬서성에 무슨 일이 있냐?”
사결제자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종남파가 섬서지부와 밀약을 맺고 화산을 어떻게 하려고 했나 봅니다. 그랬는데 잘 안 됐어요.”
그가 눈을 빛내며 말을 덧붙였다.
완전히 영웅담에 빠져 버린 소년을 보는 듯했다.
“거기서 취선관이 나옵니다!”
추월개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거물일 수도 있어. 일단 비공개는 그대로 두고, 돈 받은 것보다 조금 더 포장해서 소문을 내.”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에게 빚을 지워두면 손해볼 일이 없다.
하나 사결제자는 진실을 퍼트리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듯했다. 추월개는 실의에 빠진 사결제자를 위해 선물을 전해줬다.
“대신 네가 직접 가서 봐. 이결제자가 주시할 급이 아니다.”
“진짜요?”
“그래. 대신 하루에 한 번씩 일지 써서 분타로 보내. 알았느냐?”
사결제자는 기연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웃었다.
“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취선······. 에잇! 매화관주가 술을 그렇게 좋아한다더라. 너 술 마실 줄 알아?”
추월개의 물음에 사결제자는 헤죽거리며 말했다.
“술은 싫어하지만, 술 마시는 사람은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요!”
더 이상 대화를 나눴다가는 이상한 사상에 물들 것만 같았다. 추월개는 닭다리에 묻은 흙을 털며 사결제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가라.”
*
이훤은 어느덧 부유한 삶에 흠뻑 젖어버렸다.
망아취자의 주도는 분위기에 맞춰 술을 마시는 것이다. 한데 돈이 있으니 분위기는 알아서 따라오더라. 그러니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셔도 분위기가 흥겨웠다.
“하하하! 영풍장주께서는 시문에 능하시다더니 그림에도 대단한 소질을 보이시는군요.”
매화는 없지만, 매화 족자가 있다.
이훤은 영풍장의 주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순간 코끝에 매화향이 감돌았고, 그를 취선관으로 인도했다.
‘아! 인품이 좋고, 강직하다고 해서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오기를 잘했다.’
역시 고천락은 쓸모가 많다.
이훤이 취선관을 그리며 술을 음미하는 사이 장원의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영풍장주는 그런 이훤의 풍채가 마음에 드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총관, 오늘은 내가 진정한 협객을 만나는 좋은 날이다. 배고픈 이들에게 아낌없이 먹을 걸 나눠주게.”
한데 총관이 난색을 표했다.
“그것이 단순한 거지들이 아닌지라······.”
그때 하인들을 헤치고 거지가 들어섰다.
제딴에는 머리카락도 빗고, 옷도 깨끗한 걸 골랐나 보다. 하나 여전히 봉두난발에 여기저기 기워놓은 누더기를 걸쳤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들은 그를 막지 못한 채 눈치만 봤다.
영풍장주는 거지의 허리춤을 확인하고 탄성을 흘렸다.
“개방에서 오셨소이까?”
“예, 추성 분타의 관자림이라 합니다.”
추월개의 직속인 사결제자는 주시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섰다. 그만큼 산동성 남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훤을 보고 싶었던 게다.
“허허, 역시 주머니 속의 바늘이 알아서 튀어나오듯 이 대협의 위명이 벌써 개방에까지 전해졌구려. 이렇게 됐으니 올라오시구려.”
관자림(關子林)은 고개를 내저었다.
“거지는 거지답게 살아야지요. 이 대협! 개방에서 왔습니다. 사결제자인 관자림이라 합니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이미 관자림이 등장할 때부터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오죽 했으면 매화 향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듯 흩어졌을 정도였다.
‘소문이나 내라니까 왜 찾아오고 지랄······.’
이훤은 눈을 뜨고 관자림을 바라봤다.
하나 짜증은 여름 햇살을 무자한 눈처럼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회귀 전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녀석이 눈앞에 있었다.
“하하, 개방이었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관자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네, 개방에서 나왔습니다.”
이훤은 관자림을 일견한 후 밖을 향해 외쳤다.
“탈마야! 네 친구가 왔다!”
< 40, 산동삼화(山東三花).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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