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회자정리(會者定離). >
39, 회자정리(會者定離).
고천락은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술 냄새? 형님! 또 술 마셔요?”
그는 수레를 모는 와중에 뒤를 돌아봤다.
종남파의 술 창고를 털어왔기에 커다란 수레가 두 대나 필요했다. 한데 수레에 가득 술 항아리를 실었기에 이훤이 보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창고에 갇혀 있던 녀석들이야. 이런 날에는 숨을 쉴 수 있게 해줘야 한단다.”
“네, 개소리고요. 화산이 코앞인데 집에 가서 마시지! 그러다가 진짜 장공잔도를 건너다가 헛디뎌서 떨어질 수도 있어요!”
이훤은 술병을 기울이며 저 멀리 보이는 화산을 응시했다.
‘집이라.’
회귀 전의 삶은 부평초와 같았다.
물 위에 떠서 이리저리 부유했을 뿐이다.
술이라는 즐거움을 찾았지만, 그 바탕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일 터였다. 한데 이제는 돌아갈 곳이 있지 않던가.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말 할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산의 정상에 내 집이 있다고 말이다.
망아취자가 주원경을 내어줬을 때.
그리고 노군이 취선관의 이름을 팔았을 때.
흔쾌히 받아들인 까닭은 저곳을 집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갈 곳.’
이훤은 술병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사람마다 술 마시는 방법이 다르니! 누가 있어 옳고, 그름을 논하겠는가. 저마다 제멋대로 옳고, 그름을 마음대로 정하며 부화뇌동 하니······.”
고삐를 잡고 있던 고천락이 늦여름의 마지막 따가운 햇살로 인상을 썼다.
“아, 시끄러워.”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고 콧노래를 이어갔다.
“세월이 갈수록 시끄럽지만, 진정한 애주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네. 가련한 세상의 어리석은 새끼들아. 나는 술만 챙겨서 화산으로 가련다.”
도연명의 음주(飮酒)를 제멋대로 바꿔 불렀다.
하나 그것을 알 리 없는 고천락은 시큰둥한 어조로 따져 물을 뿐이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후훗, 네가 주도를 모르니 설명해도 알 리가 있나.”
이훤의 말에 고천락은 입술을 삐죽였다.
“어이쿠! 주도를 아시는 분이 남의 술로 기분을 내시나? 장 총관이 퍽도 좋아하겠네.”
“생각해보니 내가 수레를 몰 필요가 없잖아. 장 총관은 어디 간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고천락의 짜증 섞인 일갈에 이훤은 한순간 눈을 부릅떴다.
“······.”
“어! 이 침묵 뭐야? 방금 뭐 생각 난 거죠?”
*
망아취자에게 오늘은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터였다.
“이 술이 다 무엇이더냐?”
이훤은 종남파에 다녀오겠다더니 백여 개의 술 항아리와 함께 돌아왔다. 망아취자는 항아리마다 흘러나오는 주향을 맡으며 몽롱한 눈빛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남파는 화산파와 성향이 비슷했다.
도가와 속가와 성향이 공존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도관만 썼을 뿐 속세의 방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 술이라는 선물이 빠질 수 없을 터였다. 종남파 내에서도 술을 즐기는 이들이 있겠지만, 마시는 것보다 쌓이는 것이 많았다.
이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화산파에도 술이 있겠네.’
예전에는 몰래 훔쳐 마시거나,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하나 지금은 화산을 혈겁에서 구해주고, 만매만전이라는 기연까지 전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창고를 거론하는 순간 열쇠까지 넘겨줄 것이 분명했다.
‘종남파를 끝장내고! 화산파도 털어야겠다.’
누가 들었으면 오해할 말이지만, 지금은 영웅담을 털어놓는 게 우선이다.
“앉으세요.”
“그래! 종남파 녀석들은 본래 화산에 억하심정이 있어서 사소한 것 하나도 내어주지 않아. 그러니 저 술을 어떻게 받아왔는지 소상하게 말해봐라.”
이훤은 다급한 망아취자를 만류한 후 자리에 앉아 손을 까딱였다. 하나 장치결이 없으니 오는 사람이 없다. 결국 청관을 불러들였다.
“종남에 오래 있었으니 저 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거야. 저 중에서 제일 괜찮은 걸로 가져와 봐.”
졸지에 청소 담당에서 술 담당으로 격상된 청관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했던 사부조차 술을 공부하느라 흰 머리가 늘었을 정도였다.
“해, 해보겠습니다.”
청관이 축 쳐진 등을 보이자, 소연명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취선관주께 여쭤볼 것이 있는데요. 사부님도 함께 가시지 않았나요?”
이훤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소연명은 그 모습에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이훤은 시선을 슬쩍 돌리며 대꾸했다.
“종남에 남았다.”
화산을 코앞에 두고서야 점혈을 한 채 나무에 걸어둔 장치결이 떠올랐다. 하나 그를 데리러 다시 종남산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국 하오문에 일러 인편을 보냈다. 점혈이야 하루가 지나면 풀릴 테니 별 문제가 없으리라.
‘차라리 오랜만에 사형제들도 보고 좋을 거야.’
이훤은 장치결의 행복을 빌어준 후 종남파에서 있었던 일을 망아취자에게 전했다.
“아! 아아! 허허허! 어이쿠야!”
망아취자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훤의 구성진 이야기에 희노애락을 모조리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매화를 종남파의 대전인 은하전 앞에 심었다는 말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하아.”
그는 먼 하늘을 응시한 채 몇 번이나 한 숨을 흘렸다.
화산파가 언제부터 매화를 상징으로 삼았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하나 매화가 화산파를 상징한 이후 구파오가는 매화를 심지 않았다. 타 문파의 상징을 앞마당에 심는 건 굴복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한데 종남파가 매화를 허락했다는 건 단순하게 화산파를 인정했다는 의미보다 훨씬 더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좋구나.”
이훤은 빙긋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망아취자가 좋으면 그도 좋았다.
술친구이자, 검을 나눌 상대이며,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가 아니던가. 저런 사부라면, 저런 부모라면 있어도 좋을 것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한데 망아취자의 뒷말은 이훤을 놀라게 만들었다.
“매화란 어쩌면 사람보다 먼저였을 텐데. 어쩌면 만천하에 드리워져 고아한 정취를 자랑했을 텐데.”
그는 그 말을 흘리더니 매화숲을 보며 술 잔을 들었다.
양 손으로 술잔을 감싼 후 눈썹 높이까지 들어올린 후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본파로 인해 오랜 세월 고생하셨네.”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망아취자가 술잔을 기울이는 순간 매화 숲이 화답하듯 바람에 몸을 떨었다. 이훤은 그 광경에 넋을 놓은 채 자연스럽게 술잔을 기울였다. 하나 조금 전에 이미 마셨기에 술 한 방울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아!”
이훤은 탄성을 흘렸다.
조금 전의 분위기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을 만큼 아름답고, 숭고했다. 저런 분위기에 술을 마셨다면 근래에 보기 드문 취기를 느꼈으리라. 마치 기연을 놓친 듯하여 몇 번이나 한 숨을 내뱉었다.
“너도 고생했다.”
망아취자가 술잔을 내민다.
이훤은 쓴웃음과 함께 빈잔에 술을 채웠다.
“고생은요. 덕분에 놈들의 꼬리도 하나 잘랐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무엇이냐?”
“불안합니다.”
망아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눈빛만 봐도 낙안봉을 내려가기 전보다 더 많은 것을 품었음이 느껴진다. 한데 뭐가 불안해?”
이훤은 빈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섬서성에만 종남파와 여산에 감각사도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작 열여섯 명이면서 두 명이나 섬서성에 있었어요. 비록 두 명 다 처리했지만, 저들이 노리는 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 불안하네요.”
“괜한 걱정이다.”
망아취자의 말에 이훤은 그를 바라봤다.
“이제 곧 산동성으로 가야 합니다. 한 번 떠나면 소식을 전하는 데만 스무 날이 걸릴 것이고, 경공을 펼쳐도 열흘 이상이 걸리겠지요. 만약 그 사이 저들이 낙안봉을 한 번 더 노린다면······.”
“이 놈아! 네가 장공잔도의 철심을 모두 빼버렸잖아. 화산연맹 내에서도 이곳에 올 수 있는 건 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장공잔도를 막고 있으면 장판파의 연인 장비가 부럽지 않을 게야. 한데 무엇이 걱정이란 말이더냐?”
이훤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그렇지만······.”
망아취자가 술병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한 번 겨뤄보자꾸나.”
“갑자기요?”
“그래. 종남파에서 무슨 기연이 있었는지 자랑이나 해보거라.”
본래 아이란 무언가를 얻으면 스승이나 부모에게 자랑하고 싶은 법이다.
이훤은 피식 웃더니 수레에서 술 한 병을 꺼낸 후 망아취자와 마주섰다.
“어떻게 할까요?”
망아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네가 나한테 조건을 달 정도는 아니지.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려무나. 조절은 내가 할 테니!”
광오한 한 마디.
하나 초절정을 지나 절대지경을 엿봤던 망아취자의 말이라면 그 자체로 진실이 되었다.
“좋습니다!”
이훤은 술 한 모금으로 입안을 헹궜다.
그 순간 취기가 날아갔고, 전신에 활력이 돌았다.
“갑니다!”
첫 수부터 엄청난 공세가 쏟아졌다.
이훤이 암천군림보의 투로를 밟는 순간 그의 신형이 여덟 개로 나뉘어 사방에 짓쳐들었다.
“녀석! 한 번은 놀라게 할지언정 두 번은 아니다. 사람의 몸이 여덟로 되지 않는 한 진짜와 가짜가 존재하고, 선후가 필수인 법! 지금까지 이득을 보았다고 앞으로도 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게야!”
망아취자는 제자를 가르치듯 느긋하게 말하면서도 검을 휘돌렸다. 그 결과 이훤의 잔영은 모조리 찢겼고, 마지막 진체가 망아취자의 검을 받아내야 했다.
터텅!
“전력을 다한 듯한데 어째서 검기로 응수하느냐? 강기란 인간이 빌려올 수 있는 자연의 기운을 한 덩어리로 응축한 것!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 옳다! 기운을 모아놓고 방치한다면 대자연의 순리를 거부하는 길이니······.”
이훤은 망아취자의 공세를 받아치느라 어느새 전신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다. 하지만 망아취자의 현란한 검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지었다.
그를 믿고 떠나기에 충분히 강했다.
“그럼 이제 제대로 갑니다.”
망아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부터?”
이훤은 취선관 곳곳에 버려진 검을 하나 더 주워들고 휘휘 돌렸다. 두 자루의 검은 모양과 크기는 같았지만, 무게와 미세한 균형의 차이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종남산에 가기 전이고요.”
하나 회귀 전의 무공을 펼치기에는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회귀 전의 취마였다.
지금껏 이훤의 전신에서 휘돌던 붉은 기운이 검에 뭉쳐들었다. 마치 날개처럼 좌우로 뻗어 나오는 기세는 검기 같기도 했고, 검사처럼도 보였고, 검강처럼 빛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훤의 신형이 빛이 반사되듯 자취를 감췄다.
쩡!
그 날 취선관이 무너졌고, 낙안봉 정상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거죽이 뒤집혔다. 청관과 소연명은 거인들의 비무를 구경하다가 장공잔도가 있는 절벽 쪽까지 도망쳐 나와야 했다.
이훤은 술을 마셨고, 망아취자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이 헤어짐을 준비했다.
*
“준비는?”
이훤의 물음에 고천락은 엄지를 추켜세웠다.
“산동성의 현감, 도지휘사, 무림맹 산동지부, 황보세가의 대주급 명패를 준비했지.”
엄청난 도둑질의 결과물이다.
하나 이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끝?”
고천락은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칭찬은 바라지도 않았지. 말하고 수레, 그리고 거기에 가득 실어놓은 술. 됐어요?”
이번에는 이훤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때 폐관 수련을 끝낸 노군이 다가왔다.
“이거 가져가라.”
꽤 무거운 보퉁이였다.
분명 먹을 것을 잔뜩 싸놨으리라.
그리고 그 안에는 갓 엮은 듯한 서책도 보였다.
“이게 뭔데요?”
“네 놈에게 술을 끊게 할 수 없으니 밥이라도 잘 챙겨 먹으라는 의미로 준비했다.”
고천락은 서책을 펼치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섬서성과 산서성 일대의 맛집이 잔뜩 표기됐다.
“화산파와 달리 도관들은 구도행을 위해 오랜 세월 강호를 떠돌았다. 그들에게 부탁하여 먹을 만한 장소를 적어놨으니 술만 마시지 말고, 안주도 꼭 챙겨 먹어!”
엄마 같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챙겨먹고 갈 게요.”
“그래, 그럼 가라.”
“형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스승님을 부탁해요.”
노군은 매화 숲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자식이 군역이라도 떠나는 줄 알겠구나. 대낮부터 혼자 구석진 곳을 찾아가 술을 드시다니.”
이훤은 매화 숲을 보며 포권을 했다.
짧으면 한 달, 길어야 두 달이다.
한데 몇 번이나 화산을 내려갔지만, 오늘의 이별은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더 배웅 안한다.”
이훤과 고천락은 취선관을 뒤로 한 채 낙안봉을 내려왔다. 한데 장공잔도를 앞에 두고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고 웃음을 지었다.
“장 총관!”
장공잔도의 맞은편에는 종남산에서 헤어졌던 장치결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는 이훤을 보고 잠시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있는 힘껏 소리쳤다.
“건너갈 수가 없어요!”
이훤은 고천락을 안고, 장공잔도를 건넜다.
그리고 장치결을 안고 다시 낙안봉 쪽에 내려섰다.
“설마 그 날의 일로 원한을 품은 건 아니지?”
장치결은 점혈당한 채로 며칠 동안 나무에 매달렸던 일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하나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본 파의 혈겁을 막아주셨는데 일신의 안위를 걱정하겠습니까.”
이훤은 빙긋 웃으며 장치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 취선관이 무너졌어. 다녀올 동안 수리 좀 해 줘.”
그 말을 끝으로 새처럼 절벽을 날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장치결은 품안에 있던 태을노도와 장문대행의 서찰을 만지작거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집 짓는 법은 또 언제 공부한단 말인가.”
< 39, 회자정리(會者定離).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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