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종남파를 시작으로······. (2) >
*
배움에는 끝이 없다.
부족한 명분에 힘만 더하면 될 것이라 여겼다.
실제로 몇 번이나 효과를 보기도 했다.
한데 오늘 또 한 가지를 배웠다.
‘명분에.’
퍽! 퍽! 퍽!
이훤은 주먹에 혈륜을 휘감은 상태였다.
‘힘을 더하고.’
그 주먹으로 종남파의 전대 고인인 주남노도의 얼굴에 쉴 새 없이 내리꽂았다. 아마 육체적인 고통보다 혈륜으로 인한 충격이 더 컸으리라. 주남노도의 비명이 쉴 새 없이 울리는 가운데 한 번 더 주먹을 내리쳤다.
콰직!
‘신뢰를 올려놓으면.’
지금 저들만 보아도 그렇다.
종남파의 문도들은 조금 전과 달리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달려들지 않았다. 이훤의 말에 혼란스러웠고, 힘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무림맹 비선각의 정보가 더해지는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진실의 탑 완성이다. 이 새끼야!”
콰직!
주남노도의 턱이 완전히 으스러진 채 주저앉았다. 하나 단전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혈륜이 혈맥을 물들인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전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주남노도의 상이 깨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얼굴의 뼈가 조각난 것처럼 울퉁불퉁했고, 피가 쉴 새 없이 휘돌았다. 창백했다가, 붉게 달아오르는 낯빛은 괴기스러웠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비명은 악귀가 울부짖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상이 완전히 깨졌다.
인간의 오욕칠정이 표정 하나에 담긴 기괴한 시간을 지났다. 주남노도의 원래 얼굴은 바뀐 지가 오래 되어 제 형태를 찾지 못했다. 하나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은은하면서도 몽롱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검은 옷을 보지 마라.”
이훤은 갑작스런 주남노도의 혼잣말에 자신의 옷을 살폈다. 백의에 적빛 문양을 섞어 놓은 무복이다. 아무래도 주남노도는 처음 강림혼요술에 걸렸을 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천룡을 봤나?”
하나 회광반조는 스치듯 지나갔다.
“천룡은 이미 천하를 뒤덮었다네.”
주남노도는 칠공에서 피를 쏟아내더니 나직이 한 마디를 흘려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마치 줄이 끊긴 꼭두각시처럼 축 늘어졌다.
하나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훤은 주남노도의 시신을 슬쩍 가린 채 손에 힘을 줬다.
꽈드득-
목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사후처리 완료.
이훤이 돌아섰다.
지난 날 화청궁 관음동에서 애매를 벨 때가 떠올랐다.
‘자!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 뭘 할까?’
아니나 다를까 세뇌가 가장 오래 된 진산노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한데 놀랍게도 그가 노린 것은 주남노도를 죽인 이훤이 아니라 수십 년을 함께 한 진명삼성의 막내인 태을노도였다.
파팟!
초절정 고수가 사제의 정수리를 향해 검강을 내리꽂았다. 초절정 고수가 사형의 검강을 튕겨내기 위해 검강을 흩뿌렸다. 하나 일수부터 전력을 다한 진산노도의 강기는 현란하게 빛났으나, 기습에 대항하는 태을노도의 강기는 색이 연했다.
쩡!
상승의 경지에 이를수록 미세한 차이로 승패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순간 우열이 가려진 후에는 승패를 뒤집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대도 할 수있고, 상대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었다.
“크흑!”
그렇기에 태을노도는 수십 년의 수련이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검을 놓쳤다. 심지어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한 채로 뒷걸음질 쳐야 했다.
진산노도를 시작으로 종남파 내부에서 서로를 향한 공격이 펼쳐졌다.
이훤이 예상했던 그림과 똑같았다.
‘역시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는군.’
애매는 배신당한 원독함에 천룡전의 정보를 털어놓으려 했다. 하나 감각사도는 천룡에게 종속된 몸, 그렇기에 수하에게 대신 명령을 남겼다. 수하는 온갖 욕설을 퍼붓는 와중에도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았던가.
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차려라! 저들은 너희들의 사형제가 아니다. 만약 너희들이 손속에 정을 베푼다면 종남파는 오늘이 마지막이야!”
이훤의 일갈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청절검 소부다. 태을노도의 신호는 받지 못했으나, 이훤의 일갈에는 반응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장문인이 칠대검호 중 한 명의 목을 벤 후였다.
“크흑! 장문사형!”
청절검 소부가 검을 뽑고, 장문인 풍차룡을 향해 달려갔다. 백여 명의 문도가 십 수 명을 상대하니 금세 싸움이 끝나야 했다.
하나 불과 반 시진 전만 해도 어깨동무를 하고 웃던 사람들이다.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던 사형제였다. 그런 자들에게 살수를 펼치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훤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탑을 만들었으면 탑돌이를 해야 소원이 이뤄지겠지.”
탑돌이도 할 겸 종남파의 반도들이나 처리해야겠다.
그는 걸음을 내딛기 전 슬쩍 발을 빼서 주남노도의 심장부분을 찍었다.
콰직!
그리고 은하전의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태을!”
태을노도는 자신의 도명을 함부로 외치는 이훤을 욕하지 못했다. 그가 진산노도의 앞에 나타나더니 검강을 튕겨냈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손을 더럽힐 수 없다면 내가 하겠다! 그러니 세뇌되지 않은 자들을 모아라!”
“······.”
이훤은 양 손을 말아 쥔 후 좌우로 털어냈다.
그 순간 혈륜이 채찍처럼 좌우로 흩뿌려졌다. 그것이 한순간 뭉쳐들어 진산노도의 시야를 막았다.
이훤은 그 사이 태을노도를 돌아보며 외쳤다.
“정신 차려!”
그리고는 대뜸 뒷목을 움켜쥔 후 소부가 있는 쪽으로 내던지는 것이 아닌가. 태을노도는 소부의 곁에 내려선 후 눈을 부릅떴다. 자신을 내던진 이훤이 어느새 소부와 싸우던 풍차룡을 상대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경공이 이렇게도······.’
그 순간 이훤의 일갈이 뇌리를 스쳐갔다.
‘더럽힐 수 없다면 대신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한순간 냉정함을 되찾고 장내를 바라봤다.
무공의 고하는 둘째 치고, 사형제 사이에 살인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평생 굴레가 될 것이고, 종남파를 험담하기 위한 명분이 될 터였다.
“소 사질! 제자들을 모으게.”
“예! 뭉쳐라! 방진을 펼치고, 살초를 자제하라. 태을노도의 곁으로 뭉쳐라! 뭉치지 않는다면 사문의 반도임을 자처하는 꼴이다!”
문도들은 장문인이 아닌 소부의 명령을 기꺼이 따랐다.
수십 명이 빠르게 뭉쳤다.
이훤은 그 광경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명령이 달랐던가?’
소부의 곁으로 모인 문도들 중에는 주남노도의 진면목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던 자들이 상당했다. 즉 진산노도나 풍차룡과 달리 저들은 다른 목표를 지녔을 터였다.
이훤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풍차룡을 밀어낸 후 벽 쪽으로 향했다. 소나무 가지를 손으로 훑는 순간 십여 개의 솔잎이 잡혔다.
그는 절혼지를 활용해 솔잎을 하나씩 발출했다.
픽픽픽픽픽픽!
“큭!”
절반은 솔잎을 맞고 비틀거렸다.
절반은 검으로 솔잎을 튕겨냈다.
확실히 솔잎에 경력을 담아 날려서 살인을 하는 건 이야기 속에나 등장하는 법이다. 하나 살상을 할 자들은 따로 있었다.
“솔잎에 맞은 자들도 한통속이다!”
태을노도와 소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자는 이 와중에도 변절자를 모조리 찾아낸 이훤의 솜씨에 놀랐고, 후자는 적이 근처에 있다는 말에 낯빛이 바뀌었다. 검을 뽑아 솔잎을 튕긴 자들은 사형제들의 달라진 눈빛을 보고 실패를 직감한 듯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형제를 향해 검을 날렸다.
“진짜다!”
“막아!”
이훤은 등 뒤가 소란스러워진 것을 확인하고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나는 이제 앞만 보고 달리면 되는 건가?”
“이 놈!”
진산노도가 뒤늦게 흙먼지를 걷어내고 내달렸다.
그는 십수 년 간 초절정의 무위를 자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주남노도의 깨달음까지 배운 듯보였다. 한데 그의 뒤에서 겹치듯 내달리는 자가 있었다.
장문인 풍차룡이다.
그 뒤로 칠대검호 중 포벽과 왕조삭이 움직였다.
“이거 봐라?”
마치 네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온다.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야! 배분을 뛰어넘어 너희들끼리 검진까지 수련한 거냐?”
저들은 대답 대신 이훤의 지척에 이르는 순간 부채처럼 퍼지며 동시에 검을 찔러 넣었다.
“웃긴 새끼들이네!”
이훤은 가볍게 소매를 휘저어 칠대검호의 공세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어차피 주력은 진산노도일 테니 그에게 전력을 다하려는 요량이었다.
한데 유성추검 포벽의 검이 심한 변화를 일으키더니 소매를 그대로 잘라버렸다. 그리고 왕조삭은 몸을 잔뜩 웅크리더니 튕기듯 몸을 날리며 허공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귀 이후 놀란 경험이 다섯 번도 채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대경실색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칠대검호가 이렇게 강했어?’
그럴 리가 없다.
이건 분명 주남노도가 아니면 천룡전의 힘이 닿은 결과일 터였다. 적을 상대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천룡전에 대한 정보가 뒤섞인다. 희(喜)와 애(哀)는 같았지만, 노(怒)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렇다는 락(樂)은 또 얼마나 다를 것이며 천룡전의 진면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크하하하!”
진산노도는 광소(狂笑)를 터트리며 일도양단의 기세로 패검을 내리찍었다.
“노호만벽검진의 위력에 짓눌려 죽어버려라!”
콰콰콰콰쾅!
강기가 내리꽂히는 순간 청석이 쪼개지고, 연무장에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하나 이훤의 시신 대신 핏빛 잔영만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다.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왕조삭은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 허물어졌다.
이훤은 왕조삭의 검을 한 바퀴 휘돌린 후 히죽 웃었다.
“개미가 지렁이로 변했다고 사람이 놀라겠냐?”
놀란 건 사실이지만, 한 칼에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천공혈륜겁은 칠 성의 끝에 다다랐다.
회귀 전의 무위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이제 작은 계기만 있어도 회귀 전과 같은 팔 성의 무위를 자랑할 것이다. 구파의 장문인도 아니고, 장로라면 칠 성으로도 충분했다.
“놈!”
진산노도가 거대한 검을 팔방으로 휘두르며 검강을 쉴 새 없이 흩뿌렸다. 일견하기에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펼치는 무공이 아니었다.
‘칫! 잠력단인가?’
이훤은 유성추검 포벽의 단전을 찌른 후 그대로 내달려 풍차룡과 마주했다. 종남파 장문인의 무위는 확실히 무게감이 달랐다. 강기과 검기를 적재적소에 펼치며 시야 전체를 수놓는 검영까지 현란하게 펼쳐졌다. 그 사이로 태산이 내리꽂히는 듯한 압박과 함께 진산노도의 검이 내리꽂힌다.
‘그런데 아까보다 편해.’
노호만벽검진이라는 허접한 이름처럼 두 명만 남으니 위력이 반감된 듯했다. 굳이 설명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풍차룡의 사각으로 짓쳐든 후 가볍게 심장을 찔렀다.
목을 치는 것이 편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종남파 장문인의 목을 치면 인예를 따지면서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을 거란 말이지.’
이훤은 수십 년 동안 강호를 굴러다닌 덕분에 정파 쪽 생각의 흐름은 눈에 훤했다. 홀로 남은 진산노도는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처럼 비통한 일갈을 내지르며 덤벼들었다.
하나 잠력단의 효과가 바닥을 보인 듯했다.
이미 힘에 의존하던 공세를 펼치며 섬세함을 버리지 않았던가. 힘마저 사그라지니 진산노도는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치지도 못했다. 그저 단순하게 검강을 앞세운 투로가 전부였다.
“끝이다!”
종남파를 혼내주기 위해 나선 길이 종남파를 구원하는 여정으로 바뀌었다. 이훤은 주먹에 혈륜을 두른 채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진산노도의 활짝 열린 가슴팍으로 쇄도했다.
그 순간 흐릿하면서도 낯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화약?’
하나 이미 주먹은 진산노도의 가슴을 찍어 누른 후였다.
그 순간 진산노도가 핏발 선 눈으로 히죽 웃더니 검을 내던지고, 앞섬을 활짝 열었다.
노끈에 엮인 수십 개의 소천뢰(小天雷).
황궁에서나 사용하는 금용병기였다.
하나 황궁에서 이렇게 작은 폭탄을 사용할 리 없다.
그리고 강호에서 황궁에 폭탄을 납품하는 곳은 오직 하나였다. 산동악가에게 산동성의 패주와 오대세가의 자리를 빼앗긴 황보세가다.
‘이런 개 같은.’
이훤이 뒤로 몸을 날렸다.
저 멀리 등을 보인 채 도망치는 고천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의리 없는 새끼!’
그 순간 진산노도의 몸이 폭발했다.
콰콰콰쾅!
< 37, 종남파를 시작으로······.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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