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종남파를 시작으로······. >
37, 종남파를 시작으로······.
당금 강호에서 천룡전이란 몇몇에게만 알려진 비밀 조직이다. 맹주와 맹의 수뇌부를 제외하면 구파오가의 수장들에게나 존재 유무가 알려졌을 터였다.
이훤의 공이다.
그가 천룡전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천룡전에 대해서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이훤은 자신에게 멱살을 잡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주남노도를 응시했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일이 이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겠지.’
화산파에서 벌어진 혈겁.
이훤은 화산파를 구했고, 흑의인은 애난을 미끼로 던진 후 망아취자를 노렸다. 하나 그는 돌아갔고, 이훤과 망아취자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한데 한 가지 기억이 이훤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흑의인의 존재였다.
그는 선인봉 정상에 기다란 철봉을 꽂고, 그 위에서 낙안봉을 내려다봤다. 엄청난 무공을 지닌 고수라면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하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강림혼요술을 익히는 대가가 무공의 전폐라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개미굴 때부터 그러했으니 자연스럽게 선입견이 생겼다.
하나 애난이 그랬다.
흑의인을 저주하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지만, 분명 그가 스스로 낙안봉을 내려다봤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의 눈이나 천리경을 쓰지 않았다.
흑의인은 다른 녀석들과 달리 무언가를 익혔을 터였다.
그것이 사술이든, 무공이든 상관없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점만 중요했다.
‘놈이 그랬으면 너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여 일부러 허점을 보였다.
그리고 주남노도는 마치 짜고 치는 도박처럼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웃음이 나오지 않아?”
이훤의 물음에 주남노도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하나 여전히 말이 없다.
고오오오오오-
오히려 등 뒤에서 거대한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훤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진산노도가 투기를 끌어올렸다. 두 눈에 핏발이 서서 시뻘겋게 보일만큼 분노한 듯했다. 과연 초절정의 무인이라는 평가답게 장막과 같은 기세가 사방에 드리워졌다.
‘진명삼성이라면!’
잠시 주춤거렸던 문도들이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이훤이 돌아서면서 주남노도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순간 진산노도의 투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아, 이것 봐라.”
이훤은 진산노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너, 이 놈한테 세뇌됐구나.”
“개소리! 너야 말로 사마외도에게 세뇌라도 당한 게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명가인 종남파를 해코지하려고 해!”
생각해보니 그림이 좀 이상하기는 했다.
구파의 한축인 종남파의 대전 앞에서 원로의 멱살을 쥐고, 수염을 잡아 뜯어서 피를 흩뿌렸다. 거기에 더하여 귀화처럼 붉은 눈빛이 번들거리니 누가 악인일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하나 이훤은 개의치 않았다.
감각사도(感覺使徒)의 무공 유무는 이미 지나간 쟁점(爭點)이다. 그렇지만 저들의 강림혼요술을 깨는 방법이야 말로 여전히 유효했다.
꽈드득-
이훤은 주먹을 쥐었다.
주남노도를 죽을 때까지 때려서 얼굴을 뭉개버리면 죽기 직전 상(相)이 깨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본 얼굴이 드러나며 잠시나마 감각이 깨어나리라. 그 과정만 거친다면 누구도 이훤을 탓할 수 없을 터였다.
“맞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이훤은 팔십 세가 넘은 주남노도의 얼굴을 겨누며 주먹을 들었다.
그때 청절검 소부가 황급히 외쳤다.
“문파의 존장에게 패악을 부리고, 멋대로 처결을 내리려는 자가 세뇌를 논해? 네 놈이 그러고도 정파인이라 할 수 있더냐?”
정파인의 근간은 인예(仁禮)와 협의(俠義)다.
실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자가 수두룩 할 터였다. 하나 위군자라 불리는 이들이라도 겉으로는 인예와 협의를 무시하지 못했다. 강호인에게 지탄받는 순간 명성이 꼬꾸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소부가 억지 명분으로 주남노도를 구하려 한 게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그는 주먹을 풀고 돌아섰다.
귀화(鬼火)는 여전했지만, 눈빛은 처음보다 깊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진산노도와 태을노도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그가 종남파 문도들을 향해 물었다.
“정파? 내가 언제부터 정파였지?”
소부는 이훤이 어찌됐든 화산파와 관련됐고, 화산에 사는 자이기에 응당 정파인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그가 정파를 부정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지금 정파를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 그냥 묻는 거야. 내가 언제부터 정파가 된 거지?”
이훤의 물음에는 뼈가 있었다.
회귀 전 수많은 자들이 의협을 부르짖고, 인예를 거론했다. 하나 그들 중 진정 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저 저들이 필요할 때 끌어오기 가장 쉬운 것이 의협과 인예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명분이라 불렀다.
“내가 정파이거나, 사파이거나, 마도인 것을 누가 정하는 건가?”
이훤의 두 눈에 귀화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주남노도가 신음을 내뱉었다.
“묻겠다. 종남파가 나를 정파라 하면 정파가 되는가?”
“그게 무슨······.”
“사람을 평가하려면 지나온 행적을 보라 했다. 나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길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정파인가? 하면 내게 적대시하는 너희들은 사파인가?”
이때 종남파의 반응이 둘로 갈렸다.
진산노도와 장문인인 풍차룡은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으며 이훤을 더럽히려 했다. 반면 태을노도와 청절검 소부는 입술만 부르르 떨었다.
강호는 강자존으로 통용된다.
강자가 그렇다면 대부분의 것은 그렇게 되었다.
약자가 부르짖는 정의는 공허한 외침일 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눈 먼 칼에 찔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으면 다행일 터였다.
“크흑!”
태을노도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그는 검을 손에 쥐었을 때부터 강자였다.
강자의 사문에서 강자의 무공을 익히고, 강자들과 어울리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가장 강하지는 못했어도, 약자를 짓밟고 강자로 살아올 수 있었다. 한데 이훤의 등장으로 인해 약자가 되니 그의 한 마디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너희들에게는 누가 정파고, 누가 사파인지 결정할 자격이 없다. 너희들은 누가 강자고, 누가 약자인지 눈으로 확인해라.”
이훤은 그 말을 끝으로 대뜸 몸을 휘돌리더니 주남노도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직!
코가 으깨지며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주남노도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턱수염은 이미 뜯었으니 콧수염을 쥐고 잡아당겼다. 그리고 눈가를 아예 가려버린 백미마저 망설임 없이 뜯어냈다. 다행히 머리채를 잡기 전 놈의 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짜증과 분노가 가득해 보이는 날 선 인상.
도가방파인 종남파의 옛 어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흉악한 표정이다.
“보아라. 이 자가 너희들이 알고 있던 그 자인가?”
아직도 이름을 몰랐기에 서슴없이 하대를 했다.
종남파의 문도들은 황망함에 미간을 좁혔다.
문파의 큰 어른인 진명삼성은 종남파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은하전을 비롯하여 주요 전각에는 세 사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얼굴을 보고 문후를 드릴 수는 없기에 초상화를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
하나 누구도 이훤에게 욕을 하거나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그만큼 주남노도의 얼굴이 낯설었다. 문도들은 어리둥절해하는 와중에 서로를 바라봤다. 누군가 답을 해주기를 기다렸다. 결국 흩어졌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진산노도와 태을노도.
한데 두 사람의 눈빛이 달랐다.
진산노도는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인질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반면 태을노도의 두 눈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커졌다.
“사, 사형. 얼굴이······.”
“닥쳐라! 적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태을노도는 자신을 향해 일갈을 날린 진산노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주남노도의 얼굴은 낯선 것을 넘어 생면부지의 사람처럼 여겨졌다.
“어찌 이런 일이!”
사람의 얼굴은 변한다.
나이를 먹거나, 사고를 겪거나, 심지어 좋은 일이 계속되어도 바뀌었다. 하지만 주남노도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듯했다.
“설마 그 얼굴을 가리려고 수염을 기르신 게요?”
태을노도가 기억하기로 주남노도는 이십 년 전부터 수염을 길렀다. 그리고 수염이 얼굴 전체를 뒤덮었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데 사소한 무관심이 이렇게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학질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묘한 광경을 찾아냈다.
‘사형의 얼굴이 초상화와 명백하게 다르거늘······.’
문도들 중에 놀라지 않는 자가 보였다.
그 중 한 명이 장문인인 풍차룡이었기에 경악은 배가됐다.
“설마 저 악적의 말이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진산노도가 발을 굴렀다.
쿵!
“태을이 적의 간계에 넘어가 사술에 현혹된 듯하구나. 당장 태을을 내보내고, 문도들은 대사형을 구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라!”
그리고 장문인이 말을 보탰다.
“정신 차려라! 너희들이 오늘 종남파의 맥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던가?”
태을노도는 벼락처럼 일갈을 내질렀다.
“소부!”
청절검 소부는 성정이 급했지만, 종남파를 지켜야 하는 장문인을 대신해 칠대검호와 움직였다. 태을노도는 소부가 자신과 같은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 정신을 일깨우려 했다.
하나 소부는 태을노도와 달리 평정심이 완전하게 흔들린 상태였다.
“어, 어!”
그 순간 이훤이 발을 굴렀다.
콰쾅!
은하전 앞의 계단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천공혈륜겁을 극성으로 운용하는 순간 붉은 기운이 장막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지? 살아생전 이런 걸 볼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거야. 하나 이것이 바로 천룡전의 방식이고, 이 자가 바로 감각사도 중 분노를 관장하는 노(怒)의 하수인이다!”
이훤의 일갈에 좌중이 고요해졌다.
장문인은 폭소를 터트리며 이훤을 삿대질 했다.
“일이 벌어진 후 얼버무리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감각사도? 분노? 지금 본 파의 존장을 인질로 삼고, 그런 허황된 말을 믿으라는 게냐?”
이훤은 혀를 찼다.
차라리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새끼들만 골라서 쳐 죽이는 게 더 편하겠다는 유혹에 휩싸였을 정도였다. 하나 향후 화산연맹의 중흥을 위해서라도 종남파에 빚을 지워둬야 했다.
하여 귀찮음을 무릎 쓰고 설명을 하려던 순간이다.
“멈추시오!”
멋들어진 무복을 차려입은 청년이 숨을 헐떡이면서 종남파의 산문을 넘었다. 이훤은 정면을 바라봤으니 관심을 보였으나, 종남파의 문도들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자 청년이 품에서 묵빛 명패를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외쳤다.
“무림맹 비선각의 진관혁이다!”
비선각이라는 말에 몇몇 문도가 관심을 보였고, 진관혁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시선을 끌었다.
“비선각에서 구파오가에 보낸 급보요.”
이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용을 써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선각의 진관혁이라고 주장하는 녀석이야 말로 종남파에 먼저 올라간 고천락이었다. 아무래도 종초홍을 만나고 올 때 진관혁이라는 놈의 명패를 훔쳐온 듯했다.
그 사이 소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선각의 무인이라면서 경공이 형편 없지 않은가.”
진관혁은 앞섬을 펼치며 피에 젖은 속의를 보여줬다.
“종남산 아래에서 천룡전의 기습을 받아 모두 죽고, 혼자 남았소. 그 쪽의 당신이 취선관주인가?”
이훤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선각의 부각주 종초홍의 명을 전한다. 감각사도는 희노애락으로 나뉘며 각기 한 가지 감정만 극대화한다. 강림혼요술로 인해 주변 인물을 세뇌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같은 감정을 지닌 사도는 모두 얼굴이 같기에 최초의 감각 사도를 제외하고 모두 얼굴이 변한다 했소! 그러니······.”
진관혁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훤이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이고, 비선각이며, 양측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자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훤에게 들었던 천룡전의 정보를 무림맹에서 받아온 것처럼 외친 후 소부를 향해 명패를 던졌다.
“확인해보시오!”
“비선각 팔 조장, 산동성 청도의 동황방 소속 진관혁.”
소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관도들의 동요는 계속됐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허황됐다고 여겼던 이훤의 말이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진관혁은 중상을 입었는지 가슴을 부여잡고 일갈을 내질렀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오! 천룡전의 무리가 종남산 아래 집결하고 있소. 적이 있다면 빨리 정리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해!”
그 순간 산문 밖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으악!”
진관혁은 등에 화살을 맞고 몸을 피했다.
저것도 저 녀석이 어딘가에 설치해놓은 기관이리라.
하나 진관혁은 진짜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비장하게 일갈을 내질렀다.
“어서!”
문도들의 동요가 극에 달했고, 몇몇은 표정 변화가 없던 이들과 거리를 벌렸다.
‘크큭! 저 사기꾼 새끼!’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고, 벽 뒤로 몸을 피한 진관혁이 엄지를 슬쩍 추켜세웠다. 저 놈은 자칫 잘못 내버려뒀다가는 탈마가 아니라 기마(欺魔)가 될 듯했다. 하나 고천락이 기껏 판을 깔아줬는데 이대로 흘려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없다. 지금부터 이 노괴의 가면을 벗기겠다!”
그리고는 주남노도의 얼굴을 쉴 새 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 37, 종남파를 시작으로······.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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