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93화 (93/226)

< 36, 천룡전(天龍殿), 최고다! (3) >

이훤은 소마를 증오했다.

회귀 전 유일한 낙이 음주였다면 유일한 모임이 바로 육대괴마였다. 탈마와 함께 한 시간이 가장 길었지만, 내심 소마를 믿고 의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데 그런 소마가 다른 괴마를 죽이고, 자신마저 함정에 몰아넣었다.

가뜩이나 더럽고, 거지같은 삶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배신감은 배가됐다.

증오와 분노는 하늘에 닿을 것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회귀 후 개미굴에서 소마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인생의 목표를 찾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놈을 죽인다.

한데 놈이 속한 단체가 천룡전이다.

목표를 바꾸기보다 확장했다.

천룡전 전체를 죽인다.

천룡전과 관련된 자라면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여 버리겠다고 술을 마실 때마다 맹세했다. 그 말인즉슨 매순간 맹세를 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백의를 죽이고, 애난과 애매를 죽였으니 열세 명이 남은 셈이다.

망아취자는 이훤에게 열세 명을 언제 다 죽이냐며 난제(難題)라고 칭했다.

하지만 이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처럼 여겨졌다.

“말해 봐.”

이훤의 말에도 종남파의 진명삼성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알려진 주남노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처음과 똑같이 얼굴 전체를 가릴 것처럼 축 늘어진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리를 지켰다.

“천룡전이 뭐지?”

“어디서 들은 듯한데······.”

몇몇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훤은 은하전 앞에 이르러 진명삼성과 마주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존장의 허락 없이 공세를 이어가기가 난감했다. 그러던 중 들려온 천룡전이라는 말에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지난 번 무림맹의 공문에서 본 듯한데······.”

그때 장문인인 풍차룡이 외쳤다.

“조용히 해라! 적을 눈앞에 두고 뭐하는 것이야?”

장로를 비롯한 문도들은 장문인의 노호성에 다시 기세를 가다듬었다. 하나 여전히 진명삼성은 이훤을 앞뒤로 막아선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주남노도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앞을 지키던 진산노도가 넓적한 패검을 겨눴다. 그리고 이훤을 스쳐 보낸 태을노도가 미간을 좁힌 채 외쳤다.

“천룡전의 암수들이 강호에 퍼진 듯하니 소속 방파들은 만전을 기하라는 공문이 있었다. 한데 네 놈이 지금 진명삼성을 앞에 두고 천룡전을 논했으니 암적이라 의심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봐도 되겠느냐?”

태을노도는 정파의 오랜 명숙이다.

진명삼성 중 가장 강한 사람은 주남노도일지언정 가장 유명한 자가 태을노도였다. 대형은 구도에 심취하여 바깥출입이 뜸했고, 둘째인 진산노도는 성정이 불 같아서 대인관계에 문제가 많았다. 그렇기에 대외업무는 태을노도가 전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였기에 정파 내부의 싸움에서 명분이 지닌 무게를 모르지 않았다. 한데 종남파는 화산파를 얕보고 이미 실수를 한 전적이 있지 않던가. 그렇기에 안주라는 개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훤에게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한데 이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은 건드렸다.

진명삼성(眞命三聖).

화산파의 상징이 매화검주라면 종남파의 상징은 당연히 진명삼성이다. 하나 당금 강호에서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무게가 실렸다.

그런 존재를 간자(間者)로 의심한 게다.

여기서 이훤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종남파는 명분을 얻게 될 터였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다.”

태을진인은 미간을 좁혔다.

상대가 막무가내인 것은 맞지만,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았다. 한데 스스로 자충수를 두고 있으니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뭐라?”

이훤은 자신을 가리키며 확신하듯 말을 덧붙였다.

“딱 보면 알아.”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망아취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훤이 개의치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림혼요술은 자결을 명령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미혼술이다. 고금 이래 이처럼 타인의 의지를 조종할 수 있는 사술(邪術)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 그 뿌리는 신마였다.

천룡전의 주인인 천룡이 누구든 신마의 깨달음에서 미혼술을 분리해냈다. 팔황무극존 또한 신마의 깨달음에 천공혈륜겁을 더하여 신공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망아취자의 만매만전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래서였을까.

이훤은 본능적으로 천룡전의 수뇌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웃고, 울고, 화내고, 즐기는 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세상에 잘 웃고, 잘 우는 자만 모아도 장강을 메울 수 있을 터였다.

‘특유의 인상이 있어.’

애초에 감각사도라는 자들은 강림혼요술로 인해 한 가지 감정이 극대화된 자들이다. 한데 그뿐 아니라 얼굴까지 판에 박힌 듯 똑같았다. 대라신선이라 해도 사람의 얼굴을 똑같이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아예 얼굴의 상 자체가 바뀌었을 터였다.

그 과정의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훤 역시 팔황무극존의 무공을 익혔기에 가능했으리라. 즉 신마의 깨달음을 전해 받은 자들끼리는 알아본 것이 아니겠는가. 사색사도의 흑의가 이훤을 탐내고, 망아취자가 이훤의 상단전을 한눈에 알아본 것도 그러한 원리에서 비롯됐을 터였다.

신마의 깨달음은 서로에게 반응한다.

이것이 이훤의 예상이었고, 이제 와서는 거의 확신하다시피 했다.

이훤은 종남파 문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외쳤다.

“저 자가 한 가지만 해준다면 나는 지금까지 종남파를 욕보인 행위에 대하여 사과하고, 종남파가 행하는 어떠한 처벌에도 응하겠다.”

문도들은 한순간 이훤의 분위기가 급변하자,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의 왈패가 갑작스럽게 영웅 흉내라도 내는 것 같지 않은가.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을 걷어내고, 환하게 웃는다면 그렇게 하지. 어때?”

상대는 노(怒)였다.

이훤의 지금껏 상대한 희(喜)와 애(哀)에 이어서 세 번째 감각사도가 등장한 게다. 예전에 상대한 이들을 돌이켜보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웃고, 또 울었다. 또 다른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야 말로 죽기 직전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넌 못 웃어.’

장문인을 비롯한 칠대검호와 장로들, 문도들까지 예상치 못한 조건에 말을 잇지 못했다. 대화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하니 멍한 표정을 짓는 자들도 있었다.

이훤은 태을노도를 등지고 돌아서서 주남노도를 응시했다.

“웃기 싫으면 울어도 돼. 생각해보니까 말이야. 문도들이 저렇게 다쳤는데 웃는 것도 이상하겠더라고.”

진산노도가 얼굴을 구겼다.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종남의 가장 큰 어른이 손자뻘 되는 네 놈의 허무맹랑한 한 마디에 웃고, 울 것이라 여겼느냐?”

태을노도가 분을 못이긴 채 일갈을 내질렀다.

“너는 그냥 내 손에 죽어야겠구나!”

초절정의 무인이 전력으로 흩뿌린 기세였다.

주변의 문도들마저 표정을 굳힌 채 물러섰다.

그리고 태을노도는 이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훤은 여전히 느긋한 상태로 좌측의 진산노도와 우측의 태을노도를 마주했다.

등 뒤에 주남노도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듯하다.

흑의와 애매, 애난은 강림혼요술로 상황을 좌지우지할 뿐 무공을 펼치지 못했다.

하나 진산노도와 태을노도가 이훤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주남노도의 서늘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

종남파는 종남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변의 봉우리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처럼 중간 정도의 봉우리에 터를 잡았다. 하나 누구도 다른 곳에서 종남파를 내려다볼 것이라 여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욱한 안개와 먼 거리로 인해 내공으로 안력을 돋워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나 이곳에 그것을 능히 해내는 자가 존재했다.

낙안봉의 입구인 장공잔도에서 망아취자와 대치했다가 등을 보였던 흑의인이다.

그는 널따란 바위에 앉아 술 잔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년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술을 즐기는 줄은 몰랐네.”

“요즘 내가 따라다니는 녀석이 술을 좋아하거든요.”

흑의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지만, 중년인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죽였다.

“흥! 진정 즐기는 자와 흉내만 내는 자가 어찌 같을까? 자네는 즐기지 못하는군. 나도 한 잔 줘봐.”

중년인은 흑의인의 곁을 냉큼 차지했다.

언제나 흑의인을 업고 다니던 광무제는 중년인이 허락 없이 접근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중년인은 그래도 되는 존재였다.

“크하! 좋군.”

흑의인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주작께서는 그 녀석과 비슷한 표정이 보입니다.”

“이게 진짜 즐기는 거지. 아마 네가 쫓아다닌다는 녀석이 웃으면 너와 같겠지. 우리는 한 가지만 극한까지 치달은 존재니까 말이야.”

“기분이 좋아지는 멋진 말씀 감사합니다.”

“아부는 여기까지! 그나저나 무림맹은 어떻게 할 거야?”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지 모르겠네요.”

주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초의 감각사도에게 그 정도도 묻지 못하는 건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지요. 산동성은 제 관할이 아닙니다.”

“하지만 태산에 뿌려놓은 것이 너무 많아. 그러다 보니 무림맹에서 개입해야 할 최적의 시기를 판단하기가 애매하단 말이지.”

“글쎄요.”

“이미 개미굴과 화청궁의 실패로 인해 감각사도들이 예전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네. 물론 천룡께서 원하시는 목표를 쟁취하기 위함이지만, 과정이 달라졌어. 자네 때문에.”

주작은 묘한 눈빛으로 흑의인을 바라봤다.

“저 때문에 달라질 정도면 애초에 큰 기대를 할 정도가 아니란 의미겠지요. 웃어야 할 사람이 저 하나이듯, 즐겨야 할 분도 주작 한 분이 아닐까요?”

흑의인의 말에 주작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것도 살아 있어야 가능하지. 자네에게 허락을 맡아야 내가 장수할 것 같아서 말이야. 가능하면 제대로 협조하는 것이 어떻겠나?”

“오해가 심하시네요. 죽어야 할 자들이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산동성은 청의의 관할이랍니다. 어차피 같은 얼굴이니 부담 없이 협조하셔도 되겠지요.”

그 말인즉슨 청의인이나 주작이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흐음, 하나 그들을 죽여서 얻은 것이 없다면 죽어야 할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다 버리고도 좋은 걸 얻었어요.”

주작은 흑의인이 말을 끝내고 종남파가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자 미간을 좁혔다.

“나는 안 보여.”

“저기 제가 찾아낸 것이 있습니다.”

“이훤! 설마 백의와 애매, 애난을 죽인 자를 말하는 건가? 자네 정말 절명곡의 생존자를 다 뒤로 하고 저 녀석을 택한 건가?”

흑의인은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몽롱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네.”

반면 주작은 미간을 좁혔다.

“좋지 않아. 저 자는 천룡전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네. 천룡전의 방식과 강림혼요술까지 안다며?”

흑의인은 여전히 종남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은 말이지요.”

입가의 미소와 목소리의 부드러움은 여전했지만, 묘하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너무 많은 걸 알게 되어버리면······.”

꽈드드드득-

흑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괴한 표정.

“선입견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강림혼요술을 익히는 대가가 무공의 전폐라고 생각한다든지요.”

솨아아아아-

한순간 흑의인의 기괴한 표정이 사라지고, 보기 좋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금처럼요.”

*

주남노도가 의자에서 엉덩이를 슬쩍 떼는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훤의 등을 향해 쇄도했다. 걷기 위해 들고 다녔던 지팡이의 끝이 이훤의 명문혈을 노렸다.

쇄애애애애애액!

혼신의 힘을 다한 절호의 일격.

주남노도는 흑의인이 예상한 것처럼 이훤의 마음을 꿰뚫어봤다. 게다가 이미 흑의인에게 이훤의 무위에 대하여 경고까지 들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이훤을 척살하고자 했다.

한데 그 순간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이훤은 기다렸다는 몸을 핑그르르 돌리더니 지팡이를 스쳐 보냈다. 그리고는 한순간 여덟 개의 잔영을 남기며 주남노도의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잡았다! 이 새끼.”

주남노도를 비롯한 모두가 놀랐다.

무인은 무기를 휘두르기 전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고수가 될수록 선택지가 늘어났고, 초절정의 고수라면 한순간의 움직임만으로도 수백 개의 선택과 집중을 필요로 했다. 한데 주남노도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힘의 집중만을 선택한 것이다.

상대의 무지를 확신한 일격.

한데 이훤의 표정을 보면 오히려 함정을 파고 유도한 꼴이다.

“끄으으으.”

혈륜의 기운이 파고드는 순간 주남노도는 한순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이훤은 주남노도의 탐스러운 수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잡아 뜯은 후 맨얼굴이 드러난 주남노도를 향해 외쳤다.

“웃어봐. 이 새끼야!”

< 36, 천룡전(天龍殿), 최고다! (3) > 끝

ⓒ 김태현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