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천룡전(天龍殿), 최고다! >
36, 천룡전(天龍殿), 최고다!
고천락은 즐거웠다.
그는 태생적으로 도벽만 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훔치는 재주까지 완벽했다. 본능과 성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니 도둑님으로 성장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한데 요즘은 훔치는 것보다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행복했다.
‘가을이 되면 나도 무공을!’
그는 문맹(文盲)이다.
출신은 비천하고, 글은 읽은 줄 모르니 누군가의 제자로 들어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랬던 그에게 기연이 예약되어 있단다.
‘드디어 가을이야!’
고천락은 이훤을 떠올리며 싱글벙글 웃었다.
개미굴 인왕전의 지붕 아래서 만났을 때만 해도 이처럼 그를 좋아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모든 것이 어울렸고, 요철(凹凸)처럼 아귀가 딱딱 맞았다.
이런 걸 가리켜 지음(知音)이라고 하던가.
‘물론 쓸 줄은 모르지만.’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글보다 무공을 배우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무공을 배울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렇기에 무림맹 산서지부에서 머물고 있던 종초홍을 만나러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이훤이 시키는 일이라면 죽는 것 빼놓고는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번에 알아낸 정보는 아주 중요하니까!’
고천락은 희희낙락하며 화산을 오르는 중이다.
머리가 좋지 않은 그조차도 종초홍과의 대화를 통해 이상한 점을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훤이라면 모든 걸 명확하게 밝혀 주리라.
“하지만 그것보다 이걸 더 좋아하겠지.”
그는 피식 웃으며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보퉁이를 추슬렀다. 그 순간 술병끼리 달그락거리며 기분 좋은 충격을 전해줬다.
한데 노군동을 앞두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훤이 휘적거리며 하산을 하고 있었다.
“형님!”
“어, 다녀왔냐?”
고천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퉁이를 어깨에서 내렸다.
이훤은 고천락을 스쳐갈 때 내용물을 아는 것처럼 보퉁이를 받아들었고, 그리고 반대편 손이 술병을 꺼냈고, 한 손으로 마개를 뽑는 신기를 선보였다. 그가 술병을 기울여 한 모금을 들이킬 때 고천락은 몸을 돌려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때요?”
“아! 좋은데. 돈 좀 썼구나.”
고천락은 키득거렸다.
“뭐든 처음이 어렵더라고요. 돈이라는 게 쓰다 보니까 손가락 사이에서 모래가 흐르는 것처럼 쭉쭉 빠져나가네요.”
“쓰고, 안 쓰고의 문제가 아니야. 누구에게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그나저나 어디 가는 건데요?”
이훤은 화산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건너편에 좀 다녀오게.”
“여산에 또?”
“아니, 종남산.”
고천락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고 탄성을 흘렸다.
“호오! 종남산은 제가 또 낯설지 않죠.”
그러더니 양 손을 부비며 혀를 내밀더니 아랫입술을 핥았다. 마치 산해진미를 앞둔 사람처럼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이훤의 뒤를 따르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어깨는 축 늘어졌고, 눈은 퀭했다.
체구만 봐도 제대로 무공을 익힌 무인이다.
하나 두 다리를 질질 끌면서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보였다.
“누군가요?”
이훤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장 총관이라고, 이번에 취선관에 들였어.”
고천락은 탄성을 흘렸다.
“아아!”
그는 히죽 웃더니 품안을 뒤적거리며 장치결에게 말을 건넸다.
“취선관 사람이면 내가 챙겨줘야지. 반가워요. 내 이름은 고천락, 도둑이죠.”
장치결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한 놈이 더 늘었어. 이 놈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 때 고천락이 품안에서 무언가를 건넸다.
“종남산이면 종남파의 영역이니 이걸 챙겨둬요. 도움이 될 겁니다.”
장치결은 별 생각 없이 고천락이 건넨 것을 받아들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건······.”
고천락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종남파 일대제자의 명패. 진품이니까 걱정 마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왜?”
장치결이 더듬거리며 묻자, 이훤이 말을 보탰다.
“남의 영업 비밀은 함부로 캐묻는 게 아니야.”
“그렇지. 가족처럼 지낼 거지만, 아직은 가족이 아니니까. 나중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말해요. 내가 뭐든 구해다 줄 테니까. 내가 올해를 넘기기 전에 탈마가 될 예정이거든요.”
고천락은 그 말은 남기더니 이훤의 곁으로 다가가 속닥거렸다.
장치결은 명패를 강하게 움켜쥔 채 눈을 빛냈다.
‘일단 회음현에 가면 기회를 엿보자. 저 놈은 분명 술을 마실 테니 그 때 전서구를 보내면 될 것이야.’
그때 이훤의 날카로운 한 마디가 들려왔다.
“장 총관. 안주.”
장치결은 잰걸음으로 달려가 바구니에 든 육포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조금 전에 구워서 향이 아주 좋아요.”
*
종남산은 진령산맥의 중추로 산세만 따져도 화산보다 넓었다. 하나 종남파는 화산의 험준함과 전진교의 적통, 무공의 신묘함을 이유로 언제나 이인자의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한데 그랬던 종남파가 수십 년 동안 화산파를 앞섰고, 마침내 무림맹 내의 대접마저 달라졌다. 그러니 종남파의 문도들은 언제나 웃음꽃이 피었고, 근골과 자질이 좋은 제자들도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장치결과 청관, 그리고 소연명이 실종되었어도 크게 우려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섬서성 내에서 종남파의 문도들에게 위해를 가할 만큼 간담이 큰 자가 있을 리 없다고 믿었다.
한데 며칠 사이 종남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마치 전쟁을 준비하듯 경계가 삼엄했고, 문도들은 폐관을 끝냈다. 매일 같이 종남파의 요처인 은하전(銀河殿)에서 회의가 이어졌다.
“기다려라.”
웅성거리던 장로와 일대제자들이 침묵했다.
당금 종남파의 장문인인 천성대검(天星大劍) 풍차룡은 상석에 앉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은하전에 모인 서른 명의 수뇌부는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도 그럴 것이 풍차룡은 칠대검호의 대형이며, 종남파의 원로인 진명삼성 중 주남노도의 직전제자가 아닌가.
한 마디로 종남파의 제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문사형께서 말을 아끼시니 내가 설명하겠네. 곧 진명삼성께서 오실 게다.”
수뇌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명삼성(眞命三聖)은 종남파의 전대 인물들로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잠시 후 대전의 문이 열렸고, 세 명의 노인이 들어섰다.
종남파는 문파의 상징이라 칭해지는 무인에게 정해진 도호를 부여했다. 종남산의 다른 이름인 주남(周南)과 진산(秦山), 태을(太乙)이다.
진명삼성의 대형인 주남노도는 흰 눈썹이 길게 늘어져 눈을 가릴 정도였고, 허리는 뾰족할 만큼 굽어서 거동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하나 철장을 통통 찍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의 대기가 겁을 먹은 것처럼 밀려났다.
그가 장문인의 옆에 위치한 세 개의 의자 중 중앙에 엉덩이를 붙였다.
“종남의 제자가 노도께 문안을 올립니다.”
수뇌부가 일제히 예를 표하는 가운데 둘 째인 진산노도가 좌측에 앉았다. 그는 팔십 세가 넘었음에도 건장한 체구를 유지했고, 휘황찬란한 패검(覇劍)을 떠받든 채 대전을 내려다봤다. 셋 째인 태을진인은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우측에 앉는 순간 사형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수뇌부는 오랜 만에 등장한 진명삼성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흘렸다. 세 명 모두 초절정의 경지를 밟은 게 십 수 년 전이다. 그러니 문파에 대한 충성심과 별개로 경외심을 숨기지 못했다.
통! 통!
주남노도가 지팡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둘 째인 진산노도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장문인, 문파의 존폐가 걸린 일에만 우리를 부르라 했잖소. 한데 설마 지금의 종남파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단 말인가?”
풍차룡은 눈을 뜨고 고개를 조아렸다.
“확신할 수 없기에 사부님과 두 분 사숙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평안을 방해한 잘못은 차후 백 일의 폐관으로 죗값을 치루겠습니다.”
“고하라!”
진산노도의 외침에 장문인은 손짓을 했다.
청절검 소부가 진명삼성에게 예를 표한 후 화산파와 있었던 사건의 전모를 풀어놓았다. 수뇌부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시 한 번 노기를 드러냈다.
“화산파가 감히!”
“본 파의 제자를 상하게 했으니 그냥 두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 당장 화산으로 가시지요!”
하나 진명삼성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사이 장문인인 풍차룡이 말을 받았다.
“하여 그 일을 논의 중이었습니다. 한데 조금 전 화산 아래 회음현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장 사제가 보낸 것으로 지금까지 화산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건 수뇌부도 모르던 사실이다.
“뭐라고요? 그럼 그 새끼들이 장 사제를 억류하고 있었군요. 이건 단순히 분풀이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풍차룡은 사제들을 조용히 시킨 후 말을 덧붙였다.
“한데 소 사제를 욕보인 자가 종남산으로 오고 있답니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서 대비하라고 하더군요. 하여 은거하신 사부님과 사숙들게 연통을 하게 되었습니다.”
쾅!
진산노도가 패검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청석이 비산했다.
“허허! 오래 살았다고 이런 꼴까지 봐야 하는가? 이건 지금 당장······.”
주남노도가 손을 슬쩍 드는 순간 진산노도가 말끝을 흐렸다. 제아무리 불같은 성정의 그라고 해도 주남노도 앞에서는 평생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
“나는 종남산에 허락받지 않은 자를 들이지 않는다.”
주남노도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태을진인이 풍차룡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섬서는 협도의 서쪽을 의미하니 험준한 건 화산이 더 할 수도 있다. 하나 종남산은 길이 수십 갈래고, 좁고 외진 곳이 많으니 종남파에 발을 들이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좋겠구나.”
풍차룡은 잠시 머뭇거렸다.
외진 곳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 정파의 무인으로서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나 이내 생각을 달리 했다. 상대는 종남파를 욕보이고, 문도들을 다치게 만들었다. 그러니 독을 쓰거나, 인질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세간의 이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사제들은 상천태을검진을 준비하고, 제자들은 문파의 경계 상태를 특급으로 상정하고 행동하라.”
상천태을검진은 칠대검호 중 다섯 명이 펼치는 상승의 검진이다. 장문인과 예비 한 명을 제외하고 다섯 명이 펼치는 걸 수십 년 동안 수련했다. 그렇기에 검진에 누가 속해도 똑같은 위력을 드러낼 터였다.
“준비하겠습니다.”
청절검 소부가 손을 맞댄 후 결연한 표정으로 은하전을 떠났다. 그리고 제자들도 외부에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종남파는 불과 일각 사이에 전시태세를 갖췄다.
“취선관주라는 자가 종남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라!”
*
회음현을 지나 곧장 종남산에 올랐다.
이훤은 표정을 굳혔다.
장치결은 이훤의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홀로 종남파를 감당하려고 하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지.’
하나 잠시 후 흘러나온 이훤의 한숨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아! 술을 더 챙겨왔어야 했어.”
장치결은 육포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라도······.”
“괜찮아. 챙겨둬. 돌아갈 때는 진탕 마실 거니까 안주는 미리 챙겨둬야지.”
이훤은 뒷짐까지 진 채 느긋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장치결은 장탄식을 흘린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찰을 보냈으니 본 파도 제법 준비를 하고 있겠지. 이번만은 결코 밀릴 수 없어!’
만에 하나 종남파가 오늘 큰 손해를 본다면 강호가 끝나는 그 날까지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술 한 병에 문파가 휘청거리다니.
장치결은 진저리를 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느새 고천락이 자취를 감췄다.
“고 공자가 사라졌는데요?”
이훤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마. 그 녀석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
장치결은 억지웃음을 흘렸다.
‘신경 쓰인다고! 너무 신경 쓰여! 도둑놈이라며?’
그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던 중 이훤의 느긋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그런데 장 총관은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되나봐?”
“그게 무슨 말인지······.”
그 순간 협곡의 좌우에서 십여 명의 종남파 문도가 뛰어내렸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계곡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팔뚝 길이의 비수를 역으로 쥔 채 종남파의 비전을 펼쳤다.
쉭쉭쉭쉭쉭쉭!
협곡에 최적화된 무기와 움직임.
장치결조차 한순간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였다.
하나 그가 눈을 채 다 뜨기도 전에 종남파 문도들은 무릎이 역으로 꺾인 채 튕겨나갔다.
퍼퍼퍼퍼퍼퍼퍼퍽!
종남파 문도끼리 겹쳐서 혼절한 탓에 협곡이 막혔다.
이훤은 뒷짐을 진 채 산행을 하듯 문도들을 밟고 올랐다.
그러면서 나직이 한 마디를 건넸다.
“회음현에서 전서구를 보내기에 좋은 말이라도 한 줄 알았어. 그런데 나 죽이라고 욕이라도 써놨나 봐?”
장치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내가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된다고 일단 말로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는데······.’
그는 잠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황급히 이훤을 따라 문도들을 밟고 올랐다. 그래도 죽은 놈이 없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취선관주! 취선관주. 내 얘기 좀 들어보시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하니······.”
< 36, 천룡전(天龍殿), 최고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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