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88화 (88/226)

< 35, 일단 소리를 질러라. >

35, 일단 소리를 질러라.

이훤도 남자였다.

술이 제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잘 통하는 벗과 마신다고 해도 아리따운 여인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물론 아리따운 여인과 마음이 잘 통한 상태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최고로 쳤다.

‘기왕이면······.’

회귀 전 그는 여색을 탐하지 않았으나, 제법 많은 여인과 정분을 나눴다. 강한 무공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술에 심취한 모습은 특정 부류의 여인들에게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던 그가 연모의 정을 품었던 여인이 있었다.

육대괴마의 수장으로 추대되기 전에 탈마와 적당히 어울리던 때였다. 그녀는 남궁세가에서 열린 비무대회를 구경하던 중 시선을 끌었다.

유엽비(柳葉飛) 백예예.

그녀는 버드나무 잎사귀를 흩뿌리는 것처럼 창을 썼다.

초식을 펼칠 때마다 창은 낭창거리며 휘었고, 흡사 창대에 이끌리듯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여 탈마를 시켜 그녀의 뒷조사를 했다. 그녀는 남궁세가의 방계 중 연자방(燕子幇) 출신으로 방주의 무남독녀였다.

‘하지만 경쟁자가 너무 많았지.’

심지어 남궁세가의 직계까지 눈독을 들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수많은 경쟁자 중에서 발군이었던 자가 바로 한중복가 출신의 풍류비검 복우전이다.

‘징글징글한 새끼.’

이훤은 쉴 새 없이 검법을 펼치는 청관을 보며 혀를 찼다. 옛일을 떠올리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그것은 곧 수련의 무한반복을 의미했다.

당시 백예예는 무공에 뜻을 두었기에 사내를 멀리 하던 중이다. 결국 이훤은 포기했다. 그녀에게 온힘을 다하기에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여인이 너무 많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복우전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추할만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당시 황산 인근에서는 복우전의 꼴사나운 모습을 구경하거나, 언제 포기할지 내기를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더 부러운 새끼.’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했던가.

복우전은 백 번쯤 찍었으리라.

결국 백예예가 마음을 열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호숫가를 거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훤은 패배자가 늘 그러하듯 두 사람의 애정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날 거라며 연방 투덜거렸다. 탈마가 그런 이훤을 보고 몇날며칠을 놀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남궁세가에서 열렸던 비무대회가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백예예가 간살(姦殺)당한 채 발견됐다.

‘그런데 미워할 수가 없었지.’

복우전은 백예예의 시신을 수습한 후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남궁세가를 월담하여 직계를 암습하던 중 척살됐다. 여기까지가 이훤의 첫 사랑이었고, 실연이었으며, 짜증나는 결말이었다.

‘남궁세가라.’

이훤은 회귀 전 보고 들었던 남궁세가를 떠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곳은 복마전(伏魔殿)이다.

황산 전체에 퍼져 있는 전각군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많은 직계와 방계가 섞여있었다. 강호의 축소판이라고 불릴 만큼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났던 장소였다.

가급적이면 얽히지 않는 편이 좋았다.

이훤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를 여기서 만난 건 무슨 인연인 걸까?”

청관은 재빨리 시연을 끝낸 후 물었다.

“뭐라고 하셨지요?”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가운데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아마 이훤에게 매일 같이 얻어맞다 보니 미소를 짓는 게 버릇처럼 되어버린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왠지 모르게 처음 보았을 때보다 인상이 좋아 보였다.

“네 검법 이름이 뭐냐?”

“본가의 가전 검법으로 난영칠검이라 합니다. 검영을 어지럽게 흩뿌리면서 적의 빈틈을 노리는······.”

청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훤이 나뭇가지를 줍더니 대뜸 난영칠검(亂影七劍)을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청관이 펼친 것보다 현란하고, 빠르고, 교묘했다.

“이거 화산파의 낙화무영신수를 검으로 펼친 거잖아.”

청관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그, 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는 거냐?”

거짓말이다.

청관이 펼치던 난영칠검에 망아취자가 보여줬던 낙화무영신수를 섞어서 펼쳤을 뿐이다. 하나 이미 초절정의 반열에 오른 이훤이 아니던가. 장난삼아 손을 휘저으며 초식이라고 거짓말을 해도 믿을 사람이 수두룩했다.

반면 청관은 황망함에 눈만 끔뻑였다.

“되었다. 어차피 화산의 것을 가르칠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지금부터는 종남파의 검법보다 난영칠검을 위주로 수련을 하자. 내가 봤을 때 혼신의 힘을 다하면 가을이 되기 전에 검막도 가능할 것이야.”

이훤의 말에 청관은 의아함을 버린 채 헤벌쭉 웃었다.

검막을 펼치는 고수라면 어지간한 중소방파의 주인보다 강할 터였다. 아닌 말로 한중복가의 가주도 검막을 펼치지 못했다.

‘한 계절 사이에 아버지보다 강해질 수 있다고?’

청관은 어느덧 매화 숲 사이로 휘몰아치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마치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도원경에 들어온 듯했다.

“하겠습니다!”

“물론 청소도 해야해.”

“제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청소한 후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인이라는 놈들에게 이거만큼 좋은 당근도 없지.’

그럼 이제 채찍을 들 차례였다.

그는 나뭇가지를 내밀며 말했다.

“와.”

“네?”

“오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지.”

“지금요?”

청관은 머뭇거렸다.

힘의 격차가 무한하거늘 비무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다. 아닌 말로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지 않던가.

이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첫 째! 선수필승이다. 너보다 하수라고 여겨지면 일단 때리고 봐.”

촥촥촥촥촥!

청관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뭇가지가 쇄도할 때마다 온 몸에 채찍을 맞은 것처럼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이내 비명이 울리고, 피가 흩날리는 기괴한 수련은 끝없이 계속됐다.

이훤은 결국 주저앉은 채 손으로 허벅지 뒤쪽을 쉴 새 없이 쓰다듬는 청관을 발로 후려쳤다.

퍽!

나뒹구는 놈을 쫓아가면서 공격을 이어갔다.

“둘 째! 맞는 것도 능력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지 말고, 끝까지 궤적을 확인해. 조금이라도 덜 맞고,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당해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거야!”

이훤은 자비를 모르는 악인처럼 쉴 새 없이 청관을 몰아쳤다. 백예예를 차지하고도 지키지 못한 녀석을 탓하는 것도 있었지만, 놈의 성향을 바꾸기 위한 고육책이다.

‘저 놈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생각 못해. 그러니 백 소저한테도 달라붙었고, 내 술도 아무 생각 없이 쳐드셨겠지.’

최소한 어떤 상황에서도 분별력과 판단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었다.

“앞으로 나는 사범이라고 불러라!”

“크흐흐, 아으, 사범이요?”

“그럼 사부라고 부를래? 기사멸조의 죄는 짓지 말아야지! 종남파에서 파문당해도 좋다면 사부라고 불러도 된다.”

청관은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황망함을 금치 못했다.

애초에 파문은 생각지도 않았거늘 이야기의 흐름이 어찌 해괴한 쪽으로 진행된단 말인가.

“사범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래. 많이 쉬었지? 일어나.”

“제가 쉬었던 건가요?”

이훤은 미리 가져다놓은 항아리에서 술을 한 사발 퍼 올렸다. 술을 한 입에 들이켠 후 혈륜까지 일으켜 발을 구르는 순간 대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매화 잎이 흩날리며 온 몸을 휘감았다.

“소연명에게 지고 싶으냐?”

매화에 휘감겨 진중하게 내뱉는 일갈에는 영문 모를 힘이 담겨 있었다.

청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며 외쳤다.

“아닙니다!”

“그럼 일어나.”

“네! 사범님.”

그리고 다시 매타작이 시작됐다.

*

여름이 갔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술을 마시기 좋은 가을이 찾아온 게다.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나, 바람에 먼지가 조금 섞인 것으로 보아 뒷맛이 깔끔한 백후주를 준비했습니다.”

종남파의 장로인 장치결은 한 손에 광목천을 둘렀고, 조심스럽게 병을 떠받쳤다. 이훤과 망아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빙긋 웃으며 능숙하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쪼르르르륵-

“감숙성 난주의 명물인 백후주는 옥문관을 나서는 상인들이 칼칼한 목을 상쾌하게 만들기 위한 필수품이었습니다. 난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양조장에서 삼 년 전 사풍이 강할 때 담근 술입니다. 먼지는 위로, 물은 아래로. 그리고 더 깨끗하고, 맑은 것을 모아 백후주가 탄생했지요.”

이훤과 망아취자는 장치결의 설명을 들으며 술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동시에 탄성을 흘리며 코끝을 맴도는 주향을 음미했다.

“아! 좋은데.”

“크하, 이제는 장 총관에게 믿고 맡겨도 되겠어.”

장치결은 빙긋 웃으며 술병을 기울였다.

“한 잔 더 드시지요. 백후주는 세 잔 째부터 취기가 오르니 연달아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한데 그가 술을 따르는 자세가 묘했다.

장법 같기도 했고, 금나수처럼도 보였다. 어쩌면 검법을 손으로 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훤은 허공에서 길을 잃은 술병의 주둥이를 따라 술잔을 움직였다.

“방금 삼 푼쯤 더 옆으로 움직였다면 내가 엉덩이를 뗐어야 했겠어.”

“그렇지. 옆으로 움직이면서도 주둥이를 흔든다면 상대의 이목마저 흐릴 수 있겠지.”

두 사람의 말에 장치결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종남파의 검법 중 칠성은하검법 중 난해하던 초식의 흐름을 이렇게 풀어낸 셈이다.

“두 분께 오늘도 한 가지 배워갑니다.”

장치결은 뒤늦게 생각난 듯 탄성을 흘렸다.

“아! 추일주의 마개에서 향이 진득하게 흐르더군요. 이제 개봉해도 될 듯합니다.”

두 사람은 눈을 빛냈다.

“그 날이군.”

“그 날이야.”

가을에 개봉하는 첫 번째 술.

추일주(秋一酒)는 청관과 소연명의 비무를 통해서 이긴 사람을 가르친 자가 마시기로 약조가 되어 있다.

장치결 또한 관심이 지대했다.

제아무리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라지만, 평생 멀리하던 술을 배우는 길이 쉽지 않았다. 하나 그것을 제외하면 낙안봉 위에서 할 만한 일도 없지 않던가. 그렇기에 오늘의 여흥을 그 역시 학수고대하던 참이다.

‘두 녀석 중 누가 이겨도 좋아.’

어차피 모두 자신의 제자가 아니던가.

일취월장한 두 사람의 실력을 견식 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이훤이 청관을 부르려는 찰나 망아취자가 제지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화산파에 전할 것이 있었어.”

그러더니 품에서 서찰을 꺼내 놓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죠?”

“광녕화산의 장문인에게 전해줘.”

“그걸 왜 저한테 주시냐고요.”

망아취자는 인성을 썼다.

“그럼 내가 가야하느냐? 내가 갔다가 천룡전이 눈치 채고, 연화봉으로 밀고 올라오면 네가 책임질 것이야?”

하나 이훤은 망설였다.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수 쓰시는 거 같은데요?”

“어허! 그럼 장 총관에게 맡기던가. 아! 장공잔도의 철심을 누가 다 빼버렸지. 그러게 왜 그 귀한 철 막대를 재활용할 생각도 안하고 버렸을 꼬.”

이훤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망아취자가 내민 서찰을 받아들었다.

“서찰만 전하고 올 겁니다.”

“그래라.”

“청관이나 소연명에게 아무 것도 하시면 안 돼요?”

망아취자는 느긋하게 백후주를 들이켰다.

“허허, 내가 어디 그럴 사람이더냐.”

이훤은 망아취자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일각이면 다녀옵니다.”

장치결은 구름 너머로 언뜻 보이는 연화봉을 보며 남몰래 탄성을 흘렸다.

‘정말 일각에 가능하다면 가히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경공이 아니던가.’

그는 내심 조만간 종남파의 절기인 무영공공보(無影空空步)도 견식을 해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

같은 시각 연화봉 정상은 때 아닌 손님들로 북적였다.

“내 사제가 사라졌어! 한데 그걸 화산파가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이오?”

종남파의 장로가 스무 명의 문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즈넉하던 진무궁이 더없이 소란스러웠지만, 화산연맹의 수뇌부들은 표정만 굳힐 뿐 대꾸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로의 뒤에는 무림맹 섬서지부의 지부장과 맹에서 파견됐다는 무인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하아, 우리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광녕화산의 장문인인 서화종은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게요. 산서지부의 맹도들이 보았다지 않소. 분명 장 장로와 제자 두 명이 화산으로 올라가는 걸 봤다고 했소. 지부장, 그렇지 않소이까?”

섬서지부의 지부장은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봤다고 하더군요. 화산에서 이런 일이 생긴 이상 화산파는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맹도들을 동원해서 화산을 수색하기 전에 데리고 오세요.”

서화종은 억지를 부리는 지부장과 장로를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예기치 못한 일갈이 들려왔다.

“죽고 싶냐?”

수백 명의 이목을 한 번에 사로잡을 만큼 우렁찬 일갈이었다.

지부장이 진무궁의 입구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니 저 어린놈이······.”

하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훤이 지부장의 말을 끊고, 내력을 담아 외쳤다.

“죽고 싶으냐고 물었다!”

동시에 혈륜이 휘몰아치면서 발을 구르는 순간 대지가 요동을 치는 듯했다. 바닥의 울림이 나무로 전해졌고, 나무에 매달려 있던 매화가 마치 이훤의 피풍의라도 되는 양 흩날렸다.

“대답은?”

< 35, 일단 소리를 질러라.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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