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4) >
*
고금제일인도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아니, 어쩌면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허황되기는 하나 간혹 거론되지 않던가.
이훤도 멈출 수 있다는 쪽에 한 표를 던졌다.
자기 자신부터가 시간을 거슬렀으니 누군가는 멈추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나 낙안봉에 있는 이들 중에는 시간을 멈출 만큼 대단한 사람이 없다. 그렇기에 시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늘 그렇듯 일정하게 흘렀다.
이훤과 망아취자는 시간의 흐름을 개의치 않았다.
‘부디 만매만전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어서 벽에 부딪치기를······.’
망아취자는 성장의 벽을 중시했다.
지금껏 화산의 무인들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익혔다. 이미 확실하고, 안전한 것만 남겼으니 벽에 부딪치거나 한계에 이를 까닭이 없다.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 이제 만매만전을 보았으니 성장을 갈망하게 될 것이고, 벽에 부딪쳐서 좌절하게 될 터였다. 망아취자는 그 때를 기다리고자 했다. 그는 맞은편에서 술을 홀짝이는 이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녀석을 보내서 길을 알려주면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야.’
이훤은 망아취자의 게슴츠레한 눈길을 받으면서 헛기침을 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다보니 눈빛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화산파의 일을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화산파에 대한 은원은 수습 제자일 때의 이야기다.
하나 취선관의 관주로 하산한다면 관계가 달라졌다.
‘그냥 걸리는 대로 족치고, 두들기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그 날에야 말로 회귀 전의 울분을 모조리 쏟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산동성의 기문진이 관건이다. 고천락에게는 미안하지만, 홍천기공은 부수적인 획득에 불과했다. 기문진 내부에서 벽력창 악재의 흔적을 찾는 것이야 말로 최우선이 되어야 할 터였다.
‘슬슬 녀석이 올 때가 됐는데.’
이훤은 낙안봉의 입구를 바라봤다.
고천락은 혈겁 이후 강호에 나가 불사주귀 종초홍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종초홍은 무당의 일대제자이면서 무림맹의 비선각 부각주다. 그리고 개미굴의 인연을 통해 의형제를 맺었지만,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물론 그는 장차 불사검협이라는 멋들어진 별호와 함께 무당파의 차기 장문인이 될 터였다.
사실 그로 인해 우려하는 게다.
절명곡의 생존자들은 모두 사문을 잃는다.
누대에 걸쳐 떵떵거렸던 사문은 모두 봉문이나 멸문을 택해야 했다. 하나 오직 무당파만이 쇠락했을지언정 명맥을 이어갔다. 천문진인의 비급이 무암자로 인해 미리 강호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천룡전의 입장에서는 이미 개털이 된 무당파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당은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것이다.
‘쌍선 중 한 명이 배신자이기는 한데······.’
그 연유는 장차 무당파를 방문하여 확인하면 될 터였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무당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천락을 보내 종초홍을 찾게 한 이유는 산동성의 기문진 때문이다. 만약 종초홍이나 무당파가 천룡전과 관련이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산동성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누가 됐든 다 죽인다.’
이훤이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이는 순간 망아취자가 말을 건넸다.
“주충은 이해해도, 식충까지 품은 게냐? 밥 때가 조금 지났거늘 벌써부터 인상을 쓰면 어쩌겠다는 것이야?”
“다 됐습니다!”
오해는 언제나 환영이다.
오해가 풀렸을 때 칼자루는 언제나 이훤이 쥐지 않겠는가. 때마침 소연명이 유독 도드라진 둔부를 살랑이며 밥을 내왔다. 장치결이나 청관과 달리 낙안봉의 생활에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속내는 달랐겠지만, 한파에 비질을 하고 싶지 않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헤헤, 오늘은 돼지기름에 소채를 볶아봤어요. 백주를 드시고 있으니 기름기 있는 음식과 궁합이 좋을 거예요.”
망아취자는 젓가락을 놀리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맛이 좋구나. 잘했어. 술을 부르는 음식이야.”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고기는?”
“······.”
“아까 분명히 고기 냄새가 났는데?”
소연명은 희희낙락하다가 한순간에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태웠어요.”
“쯧, 됐다. 가라. 그리고 말할 때 화음 넣지 마. 고아한 매화 앞에서 아양이나 떨고 말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훤의 타박에 소연명은 울상을 지은 채 주방으로 돌아갔다. 둔부를 흔들지 않고 비틀거리며 걷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는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네가 마음에 들어서 잘 보이고 싶은가 보다. 그렇게 탓할 일은 아니잖아. 그리고 요리는 너도 못하잖아. 그러다 저 아이가 절벽에서 몸이라도 던지면 책임질 테냐?”
“다 늙으셔서 연정이라도 품고 싶으세요? 저 몰래 저 아이의 검초를 손봐주시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망아취자는 딴청을 피웠다.
“밥값은 해야지. 납치한 것도 미안한데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나.”
“화산파 무공이나 가르쳐주지 마세요.”
“클클, 걱정 마라. 종남파의 검학이야 대충만 봐도 훤히 보여. 아마 가을만 되어도 저 아이가 제 사형보다 훨씬 나아질 게다.”
“누가 보면 손녀인 줄 알겠네요.”
“갈 때가 되어서 그런가. 요즘 정이 고프네.”
“제가 봤을 때에는 소연명보다 스승님이 더 오래 살 겁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소일거리가 필요했는데······.”
이훤은 청관을 응시했다.
녀석은 추위에 떨며 비질을 하다가 이훤의 시선을 받고는 미친 듯이 팔을 놀렸다. 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 절벽 너머로 휘몰아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저도 저 놈이나 좀 바꿔볼까요?”
“클클, 마음대로 하여라. 하지만 네 괴이한 무공을 저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까?”
“저도 스승님처럼 대충 손봐주는 거죠.”
망아취자는 손사래를 쳤다.
“되었다. 멀쩡한 놈 망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 아무나 가르치고 그러는 거 아니다.”
이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 손 타고서 환골탈태한 녀석들이 열 명이 넘어요.”
“응? 네가 어디서······.”
회귀 전의 일이다.
이훤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만큼 잘한다는 이야기죠.”
“녀석, 지기 싫어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러시면 내기라도 하실래요?”
망아취자가 호기심을 내비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절대지경에 발을 들인 이후 많은 변화를 이뤄냈다. 오히려 세상의 일 중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과정에 재미를 붙였을 정도였다. 소연명을 가르치는 소일거리도 그렇게 생겼으리라.
“제일 처음 묻었던 술. 그거 가을에 딸 수 있어요.”
“오호!”
이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 둘을 비무하게 하고, 이긴 쪽의 스승이 마시는 겁니다.”
“혼자.”
“그렇지요. 다른 사람은 맞은편에서 끝까지 지켜보는 거지요.”
“눈 돌리지 말고!”
이훤이 눈을 빛냈고, 망아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좋아.”
*
“사부님.”
소연명은 처소에 발을 들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나 탁장에 머리를 붙이다시피하며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장치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부님.”
“왜? 바쁘다. 오늘 내로 열두 병에 대한 연혁과 관련된 시구, 그리고 마시는 방법에 대해서 외워놔야 해.”
소연명은 달포 사이에 초췌하게 변한 사부를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종남파에서는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거목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하나 이곳에서의 장치결은 마치 대과를 앞둔 낙방거사처럼 공부에 매진했다.
“저쪽의 망아취자라는 할아버지가 제 연리팔검에 문제가 많다고 하셨어요. 해서 몇 가지 동작과 검초의 흐름을 손봐주셨거든요. 그런데 그냥 이대로 배워도 되는 걸까요?”
장치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퀭한 것으로 보아 하루에 두 시진도 자지 못한 채 공부하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한 쪽이 시퍼렇게 멍든 것으로 보아 어제도 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혼쭐이 났을 터였다.
“그래? 흐음.”
아무리 낙안봉에서 세상을 등졌다고 해도 종남파의 장로가 아니던가. 그는 사문의 무공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이어간 끝에 대꾸했다.
“그냥 해. 괜찮을 것이다.”
소연명은 화색을 띄웠다.
“진짜요?”
“그래. 내가 봤을 때 저들은 화산의 문도가 아니야. 그리고 화산의 도관에 속한 자들도 아닐 게다. 아마 오래 전부터 화산에서 은거하고 있던 기인, 아니 괴인들이겠지. 비록 성정이 괴팍하지만, 무공만은 정종이 확실하다. 이 기회에 저들과 친분을 나누고, 장차 종남산으로 모셔갈 수 있다면 사문에 큰 공을 세우는 게지.”
장치결의 원대한 포부 앞에 소연명은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소연명은 이훤에게 무시당하기는 하지만, 미색이 뛰어나 종남파 문도들 사이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 그녀에게 공을 세우고, 무공까지 증진되는 상황은 바라마지 않던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이 사부가 아무 생각 없이 저들에게 놀아나는 것이 아니었어!”
“그렇군요!”
“그래, 그럼 가라. 나는 바쁘다.”
소연명은 들어올 때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으로 품안의 것을 건넸다.
“사부님, 이걸로 눈을 좀 비비면서 하세요.”
“이건...”
장치결은 소연명이 건네준 것을 받아들고, 장탄식을 흘렸다. 소연명은 그 모습에 배시시 웃고는 한 마디를 남기며 떠났다.
“오늘은 끝까지 백주로 달리실 분위기에요. 급하시면 백주 쪽만 공부해서 가세요.”
장치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연명이 떠난 후 날계란으로 눈두덩을 살살 매만지며 웃었다.
‘이 맛에 제자를 키우는 게지.’
하나 일각 후 그는 사색이 됐다.
“아! 썰렁하네. 이봐, 장 총관. 즉묵노주를 내오게. 뜨끈하게 마셔야겠어.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장치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린 괴물은 자신과 소연명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 분명했다. 하나 뭐라고 대꾸할 것도 없고, 반박할 자신도 없었기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하아, 즉묵노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온도가 얼마였더라?’
*
청관은 잔뜩 주눅이 든 채 매화숲으로 들어섰다.
그는 처음과 달리 완전히 기가 죽은 상태였다.
그러니 망아취자보다 무서운 이훤의 호출에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익힌 검법을 펼쳐봐.”
“네?”
“펼쳐보라고.”
청관은 눈을 끔뻑였다.
“종남파의 검법을요?”
“그럼 화산에 왔으니 화산파의 검법을 펼칠래?”
이훤은 회귀 전부터 강압적인 수련 방식을 고집했다.
짧고, 굵게 상대방을 성장시키기에는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방식이 최고였다.
청관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검을 뽑아들었다.
이미 소연명이 망아취자에게 배우고 있고, 장치결의 허락도 받았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훤이 자신을 가르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이훤은 순순히 검법을 펼치는 청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상태면 뭘 시켜도 다 하겠군. 좋아. 순조로워.’
하나 청관의 검법 시연이 끝났을 때에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너, 장 총관의 제자잖아.”
청관은 종남파의 장로인 사부가 총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낙안봉 정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 정상적인 것이 어디 있으랴.
“네.”
“그런데 왜 그따위야?”
이훤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청관이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하나 이훤은 주먹을 말아쥔 채 한 번 비틀었고, 그가 손바닥을 펼쳤을 때 혈륜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장력을 쏟아냈을 때 바위에 구멍이 뚫렸고, 여력이 남아 바닥까지 파헤쳤다.
“이런 내가 네 검법이라도 훔쳐 배울까봐 대충 하는 거야?”
청관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원래 속가제자인지라 종남파의 검법만 수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아! 집이 좀 사나 보지?”
“예! 섬서성 남서쪽의 한중복가가 저희 집입니다.”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중복가(漢中福家)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 회귀 전에 들은 듯했다.
‘그 정도면 제법 이름이 있는 무가였겠네.’
“가문의 검법을 펼쳐 볼까요?”
“그래.”
청관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검법을 펼쳤다.
확실히 종남파의 검법보다는 별로였지만, 숙련도가 남달랐다. 검기를 발산하고, 검영이 번뜩이더니 마침내 검명까지 쏟아냈다.
촤라라라라라라-
청관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시연을 끝낸 후 돌아섰다.
한데 이훤의 표정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잔뜩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러세요?”
“너, 속가면 본명이 따로 있는 거지?”
청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속가지만 장로의 제자인 이상 도호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청관이라 정했습니다.”
“본명은?”
이훤의 물음에 청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복우전입니다.”
“복우전.”
청관은 이훤이 자신의 이름을 알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 이름을 어떻게?”
하나 이훤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혀를 찼다.
‘아! 젠장,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때리고 싶더라니.’
그는 손가락 사이로 멀뚱히 서 있는 청관의 얼굴을 응시했다.
한중복가의 풍류비검(風流飛劍) 복우전.
회귀 전 이훤의 연적(戀敵)이었다.
<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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