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3) >
*
말과 수레가 오를 수 있는 건 노군동이 한계였다.
아닌 말로 노군동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리라.
망아취자는 이훤이 취선관으로 술 항아리를 가져올 때마다 헤벌쭉 웃었다. 그러면서도 돕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철저하게 손님의 자세를 유지하려는 듯보였다. 하나 마지막에 세 사람을 짊어지고 오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납치한 거에 한 번 놀라고.
종남파 문도임에 한 번 더 놀랐으며.
술을 몰래 마셨다는 말에 분노했다.
“이런 쳐 죽일 놈! 내 술에 허락 없이 손을 대!”
이훤은 종남파의 장로를 납치했음에도 술 항아리만 챙기는 망아취자의 모습에 침음을 흘렸다.
‘막강하다. 백 년 간 화산파를 품고 살았음에도 술에 집착하는 모습이라니······. 이길 수가 없잖아.’
그러면서도 저런 사람이 술친구라는 것에 자부심이 피어올랐다.
“어떻게 할 거야?”
망아취자는 벌써부터 술을 홀짝이며 물었다.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별 이유 없이 술을 훔쳐 마셔서 두들겨 팬 것뿐이다. 뒷일을 생각했을 리 없지 않은가. 슬그머니 매화숲 너머를 바라봤다.
“몇 명 더 버려도 태가 나지 않겠죠?”
“이런 미친놈아! 종남파의 장로를 절벽 아래로 버리겠다고?”
“왜요? 벌써 많이 버렸잖아요. 그리고 아까 술을 훔쳐 마셨다니까 쳐 죽일 놈이라면서요. 쳐 죽이는 것보다 절벽 아래로 던지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은데.”
망아취자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흘렸다.
“어휴, 아무나 막 던지다가는 반대편으로 걸어 내려갈 수도 있겠다.”
이훤은 입맛을 다시며 망아취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짜 사람을 던질 생각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하산 전의 화두로 이어졌다.
“천룡전이라는 조직은 드러나지 않았을 터, 이제는 어쩔 생각이냐?”
“일단 전주 밑에 열여섯 명이 있잖아요. 제가 세 명을 죽였으니 다음에는 한꺼번에 좀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열세 명이 동시에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보니까 천룡전주라는 놈은 제대로 된 세력이나 기반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 신마의 깨달음을 들었던 장로들을 찾아다니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당시 함께 은거하기로 한 건 최고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조차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놈들은 더 하겠지.”
“그래도 단서가 있습니다. 가을이 되기 전에 산동성에 다녀올까 해요.”
망아취자는 이훤의 선언에 미간을 좁혔다.
“수천 리 밖 산동성에 가겠다고?”
“말 타고 가면 금방이겠죠.”
“허허, 많이 컸네. 아주 중원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는구나.”
이훤은 히죽 웃으며 술잔을 털었다.
“크하! 가는 김에 매화 종자도 몇 개 가져가서 뿌리고 오겠습니다.”
“이상한 짓 하는 것보다 훨씬 낫구나.”
분위기가 무르익었기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벽력창 악재라는 분.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얼마 전 망아취자가 숨겨놓은 술을 마실 때였다.
만상조주라는 술을 마시며 벽력창 악재를 논하지 않았던가. 절명곡의 여섯 생존자 중 한 명이니 그에게도 천룡전의 이목이 붙어 있을 터였다. 망아취자는 이훤이 말한 단서가 벽력창임을 눈치 챘으리라. 그렇기에 평소와 달리 옛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말했듯 산동성은 수천 리 밖이다. 다른 세상이나 마찬가지지. 당시 나는 융성했던 화산파의 장로였지만, 세상 구경을 많이 할 수 없었다. 기껏 해야 무림맹이 있는 하남이나 무당파가 있는 호북 정도였지. 벽력창 악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개방이나 유림의 거목인 신공부, 황보세가 정도와 교류를 했겠지. 어딘들 다르겠느냐. 한데 그런 자들이 모두 모였다.”
“신마를 잡으러 모였군요.”
“그래, 천라지망을 펼치는 것도 이상했지. 원한이 깊은 것이야 사실이지만, 정파가 모조리 모여서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거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누군가 신마의 무공을 탐낸 것이 아닐까 싶다.”
망아취자는 술 한 잔을 들이킬 때마다 옛일을 회상하는 듯 눈동자가 흐릿하게 변했다.
“하나 실제로 움직이는 자들은 진심이었다. 모두 강호의 악적을 제거하고, 의협의 기치를 드높인다고 여겼지. 벽력창 악재도 그랬다.”
벽력창(霹靂槍) 악재는 당시 중견 무인들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만큼 고수였단다. 아니 산동악가부터가 오대세가 내에서도 손꼽히지 않았던가. 언제나 오대세가의 한 축이었던 황보세가를 밀어내고,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 산동악가였다.
“나보다 열 살쯤 어렸을 거야. 하지만 창술 하나만은 대단했지. 생긴 것도 잘 생겼어. 하여 여협들이 소자룡이라 부르며 추앙했을 정도였단다. 그러나 그는 여인을 멀리하고, 오직 술과 무공만 탐했지.”
어쩌면 망아취자가 주도를 깨우치게 된 계기도 악재의 도움이 있었다. 이후에도 망아취자는 악재에 대하여 기억나는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 결과 몇 가지 핵심이 될 만한 정보를 모을 수 있었다.
- 불같은 성정과 무한한 승부욕.
- 끈질긴 인내심과 질투.
“당시 강호의 중추는 누가 뭐라 해도 칠룡사봉이었다. 각기 명가의 제자이면서도 자질과 재주가 뛰어났지. 내 사형도 칠룡 중 한 명이었어. 악재는 언제나 칠룡사봉을 뛰어넘고자 했지. 하나 무공도, 명성도, 신분도 뛰어 넘을 수 없었다.”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성격이 급하고, 승부욕이 있으면서 인내할 수 있고,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
과연 은거하자는 약속을 지켰을까.
또한 세상을 발아래로 볼만큼 오만하지만,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신마의 깨달음으로 인해 성장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망아취자도 그렇게 느꼈나 보다.
“선을 넘을 성격이 아니야.”
“제가 지금껏 만났던 적들도 그랬을 겁니다. 눈치 보면서, 조심스럽게 악행을 저질렀겠지요. 하나 천룡전과 엮이는 순간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겁니다. 그들의 대업을 위해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바둑판의 돌이 된다고요. 누군가 악재라는 분을 끊임없이 부추긴다고 해도 선을 넘지 않겠습니까?”
이훤의 말에 망아취자는 대답 대신 술만 들이켰다.
“여름이 끝날 무렵 산동성 태산에서 기문진이 발견될 겁니다. 그 안에는 무공비급과 보물이 쌓여 있다고 소문이 날 겁니다.”
“함정이더냐?”
“아니요. 아마 진짜 있을 겁니다.”
망아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신하는구나.”
이훤은 헛기침을 했다.
회귀 전에 보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천룡전을 핑계로 삼았다.
“놈들은 서로 경쟁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실패하면 남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요. 선인봉 정상에 있던 계집이 그러더군요. 중추절이 되기 전 산동성 태산에 기문진이 열릴 것이다. 강호 전체에 소문이 퍼트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되면 절묘하게 무림맹의 중추절 무림대전과 시기가 맞물립니다. 무림맹 전체가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무림맹을 집어삼키려는 계략이라는 게냐?”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놈들의 우선순위는 무조건 절명곡의 생존자들입니다. 그러니 무림맹을 이용해 기문진을 깨려는 이유는······.”
망아취자가 탄성을 흘렸다.
“아! 설마 악재가 그 안에?”
이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의 자신은 이 즈음 개미굴에서 노비로 살고 있을 시기가 아니던가. 그리고 고천락은 인왕부에 숨어들었지만, 실패하여 도주했을 때였다. 고천락은 그 후 기문진이 열렸을 때 기적적으로 홍천기공을 습득했다고 했다. 결국 이훤이 경험한 사실이 아니기에 벽력창 악재의 존재 유무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아아.”
망아취자는 탄식했다.
술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이라도 하산해서 악재를 만나고 싶었으리라. 하나 하산하는 순간 천룡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 뻔했다. 분명 산동성으로 향하는 내내 천룡전과 싸워야 할 터였다.
“안 되겠지.”
“스승님이 내려가시면 일이 더 커집니다.”
애초에 그가 주원경을 이훤에게 넘긴 이유는 적의 이목을 흐리기 위함이다. 망아취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자 이훤을 내세운 게다.
“그렇구나. 너는 어찌할 셈이냐?”
벽력창 악재의 처우를 의논하고자 했다.
“가능하면 잘 해결하고 싶지요.”
하나 악재가 망아취자의 수준 만큼 성장했다면 무력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터였다. 또한 불같은 성정에 질투심까지 있으니 광기라도 일으킨다면 살아남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 아닌가.
“그랬으면 좋겠구나.”
망아취자는 연이어 침음을 흘렸다.
“내려갈 때 노군에게 말해서 전서응을 하나 빌려야겠구나.”
“어디로 보내시게요?”
“아무래도 제갈세가의 소천기라면 아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이훤은 대꾸하지 못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누구라도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제갈세가의 소천기는 아직 무사하기를 빌 뿐이다.
“노군 형님을 만나면 제가 전서응을······.”
이훤은 말끝을 흐렸다.
대화에 심취한 사이 납치해온 자들이 깨어난 게다.
애초에 혈도를 짚은 것도 아니고 힘으로 기절시켰기에 깨어나는 것도 제각각이다.
가장 먼저 깨어난 건 종남파의 장로였다.
무량패검(無量覇劍) 장치결은 정신을 차렸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마 기감을 통해 주변의 상황을 짐작하려고 했으리라. 그런 후 슬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여서 허리춤의 검을 매만졌다.
[손가락을 참 섬세하게 움직이네요.]
[종남파의 검법이 세밀하기는 하지. 물론 화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훤과 망아취자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장치결을 보며 술 잔을 비웠다. 그리고 장치결은 검을 쥐는 순간 튕기듯 일어나며 외쳤다.
“놈! 비겁하게 기습을······.”
빠각!
장치결은 망아취자가 집어던진 술잔을 얻어맞았다.
잠시 비틀거리며 파편과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확인하더니 뒤로 널브러졌다.
“비겁하다잖아요.”
망아취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종남파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요?”
“크흠! 술이나 내와.”
*
“종남파의 칠대검호에서 셋 째인 장치결이라 합니다.”
장치결은 담담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나 얼굴이 퉁퉁 부은 채 무릎까지 꿇고 있으니 그리 멋진 모습은 아니었다.
청년 또한 장치결과 얼굴 상태가 비슷했다.
좋은 가문에 좋은 사문을 지녔다고 기고만장하다가 몇 대를 더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종남파의 청관입니다.”
“도둑놈의 새끼가 술 쳐 마실 때는 실실 웃더니, 지금 인상 쓰는 거야?”
이훤의 이죽거림에 청관은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니라 원래 잘 못 웃어요.”
소녀는 눈치가 빨랐다.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방실방실 웃었다.
“종남파의 소연명이라고 해요. 오라버니와 진인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나 소연명의 밝은 표정은 금세 무너졌다.
이훤과 망아취자가 세 명을 없는 사람취급하며 대화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장치결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빛냈다.
‘흥! 제멋대로 날뛰지만, 종남파의 눈치를 보고 있구나. 아닌 말로 내가 화산파로 돌아가서 책임을 묻겠다고 하면 저들이 어쩔 것이야?’
하나 속내와 달리 자세는 단정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화를 내거나, 책임을 묻을 수 있을 터였다. 아닌 말로 무도한 작자들이 살인멸구라도 한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야. 더 높이 뛰기 위해 잠시 움츠렸을 뿐이다!’
하지만 모두가 장치결처럼 노련하지 않았다.
청관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눈을 빛냈다.
“종남파는 화산파의 우군으로! 수백 년 간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잖소. 그러니 지금이라도 우리를 풀어준다면 없던 일로 하고, 화산파에 책임을 묻지 않겠소이다.”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슬쩍 일어나 청관 앞에 섰다.
퍽! 퍽!
“했잖소? 여기 네 친구들이 있냐?”
청관은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더듬거렸다.
“그게 아니라······.”
이훤은 제자리로 돌아가 망아취자에게 말했다.
“저 놈이 화근이니 그걸 시키지요.”
“혼자?”
“아니면 제 사부랑 함께 하겠지요.”
그렇게 세 사람의 보직이 정해졌다.
청관은 싸리비를 들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낙안봉 정상을 매일 같이 쓸고 닦아야 한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반면 소연명은 주방을 맡고, 희희낙락이다. 오히려 장치결이 똥 씹은 표정으로 흐느적거렸다.
“술 가져와.”
하루아침에 술시중을 들게 된 장치결은 대충 아무 술병이나 내밀었다.
망아취자는 술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술인지 설명을 해줘야지. 지금 우리보고 뭔지도 모르는 술을 마시란 말인가?”
“아니, 다 똑같은 술인데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이훤은 억울해하는 장치결을 뒤로 한 채 술병을 들어올렸다. 잠시 병의 모양을 확인하고, 코로 냄새를 맡은 후 탄성을 내뱉었다.
“좋은 술이군요. 이건 회음현의 정가 양조장에서 지난 해 담근 과실주입니다. 아! 지난 여름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과실이 일찍 결실을 맺었지요. 하여 초여름에 따서 술을 담갔을 때 향이 제일 좋았습니다. 이건 초여름과 여름의 중간 즈음에 만들어진 술이군요. 최고급은 아니지만, 가볍게 여흥을 즐기시기에는 가격 대비 아주 훌륭한 술입니다.”
망아취자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훤은 그제야 마개를 뽑고,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웠다.
쫄쫄쫄쫄-
망아취자는 술잔을 비운 후 탄성을 흘렸다.
“하아, 좋구나. 지난여름의 햇살이 떠올라.”
이훤은 그 모습을 보고 장치결에게 말했다.
“알겠나?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야. 자연을 마시는 것이야. 그리고 나아가 삶을 돌아보는 과정인 거지.”
장치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들이.’
<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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