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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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은 회귀한 이후 가급적이면 예전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굵직한 사건이나 유명한 사람을 활용하는 것과 별개로 회귀 전의 일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곤욕이었다.
아닌 말로 좋았던 적이라고는 술 마실 때가 전부였다.
- 육대괴마의 수장인 취마.
- 만취 상태로 울화가 치밀면 광야제.
- 한때 천마조차 귀찮아했던 존재.
언뜻 들으면 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육대괴마라고 해봤자 공적들의 모임이었다. 심지어 천룡전의 수뇌인 소마의 손바닥 위에서 부림을 받는 꼭두각시였다. 또한 광야제라는 멋들어진 별호 또한 저들끼리 부르던 것이다. 술주정뱅이가 패악을 부리면서 얻은 별호를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천마가 귀찮아하기는 했지.’
이훤과 육대괴마는 미친 듯이 도망을 다녔다.
무림맹의 공석 선포야 귓등으로 흘렸지만, 마교의 추살령은 생존이 달렸을 만큼 두려웠다. 하나 그러면서도 술은 마셔야겠으니 온갖 사고를 달고 살았다. 그 덕에 천마가 귀여운 새끼라면서 추살령을 풀어주더라. 그 후 마도십가(魔道十家)의 가주 중 한 명이 이훤과 술을 마시며 천마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
파리 같은 놈이니 그냥 두라고 했단다.
여름이니 왕성하게 날뛰지만, 겨울이 되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대꾸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그 자리에서 광야제로 변했다가는 정말 들판 어딘가에 묻힐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훤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진짜 이거 다 사실 겁니까?”
생각에 잠길 사이도 없이 상인이 재촉을 했다.
회음현에서 가장 큰 양조장을 지닌 상인은 부처라도 만난 사람처럼 헤벌쭉 웃었다.
이훤은 수레에 가득 실린 술 항아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다 주쇼. 배달은 해주나?”
“화산이라면서요.”
“우리가 거래한 게 몇 번인데 배달도 안 해줘?”
“화산이잖습니까. 술 가지고 거기 올라갔다가 화산파의 신선들이라도 만나면 그날로 문 닫아야 합니다.”
상인은 언제 그리 환하게 웃었냐는 듯 울상을 지었다.
이훤은 입구에 묶인 말을 가리켰다.
“덤으로 저거 주쇼.”
“아니! 저게 얼마짜리 말인데요.”
“그럼 내가 저걸 다 짊어지고 가란 말이야?”
짊어지고 갈 수는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국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이훤은 말이 끄는 수레에 앉아 진짜로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그 때도 무림맹이 있었지.’
하지만 당금 강호의 무림맹과 달랐다.
아마 천룡전이 암중에서 획책했으리라.
수많은 중소방파가 영문도 모른 채 멸문했고, 구파오가에도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망아취자가 거론했던 방파들은 봉문과 멸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 결과 새로운 무림맹이 만들어졌다.
이름은 같았지만, 구성원이 달랐다.
구파오가의 이름은 사라졌다.
오직 한 곳만 이름을 남겼고, 그곳은 새로운 무림맹의 중심축이 되었다.
바로 남궁세가(南宮世家)였다.
하지만 그 때에는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부터 무림맹의 핵심은 소림과 무당, 화산이 아니라면 남궁세가가 번갈아가며 차지하지 않았던가.
‘남궁천운이라.’
망아취자는 당시 함께 신마의 깨달음을 전해 들었던 자들을 열거해줬다.
- 무당파의 선린수(仙鱗手) 천문자(天聞子).
- 형산파의 무쇄검(霧鎖劍) 축융노도(祝融老道).
- 제갈세가의 소천기(小天機) 제갈삭.
- 산동악가의 벽력창(霹靂槍) 악재.
- 남궁세가의 제룡검존(帝龍劍尊) 남궁천운.
거기에 망아취자를 더하면 여섯이고, 팔황무극존을 더하면 일곱이다.
‘하지만 남궁세가가 미래의 무림맹을 차지했다고 해서 천룡전의 수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천운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 전 강호에서 남궁세가란 황실보다 더 큰 힘을 지녔을 정도였다.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지?’
이훤은 회귀 전 알고 있던 남궁세가에 대한 지식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가솔들은 극강의 고수였고, 언제 모았는지 모를 빈객들과 방계의 무공 또한 손에 꼽히지 않았던가. 단일 세력이지만, 마교와 담판을 지을 수 있으리라고 소문이 돌 정도였다.
술을 사러 하산한 김에 남궁세가에 대한 정보도 모았다.
하나 눈에 띄는 점이라고는 후계 싸움이 심각하여 소가주와 이공자, 거기에 더하여 삼공자까지 암투를 벌이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산동악가를 가기는 가야겠어.’
회귀 전 고천락은 산동성 태산의 기문진 속에서 기연을 얻었다. 보물 쟁탈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강호인이 뒤엉킬 때 홀로 잠입하여 홍천기공(弘闡氣功)을 얻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보면······.’
맥락 없이 기문진이 나타날 리 없다 거기에 세상 사람들의 눈이 뒤집힐 만큼 수많은 보물이 있는 것도 이상했다. 거기에도 천룡전의 손길이 닿지 않았을까 싶다.
이훤은 항아리를 열고, 술을 들이켰다.
입가의 진득한 미소는 비단 맛좋은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고천락을 위하는 일이라고 해도 산동성을 오가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던가. 한데 천룡전을 때려잡는다는 목적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은 건 당연했다.
‘화산이야 알아서 잘 할 테고.’
취선관의 이름까지 빌려줬는데 뭘 더 해달라고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들도 사람이라면 염치가 있을 테니 저들끼리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가리라.
항아리를 기울이고, 목울대가 몇 번이나 꿀렁거렸다.
이제 폐부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탄성과 함께 술에 대한 여운을 즐기면 되는 게다. 한데 목구멍이 꿀렁거리며 한 마디를 쏟아내려는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엇! 술 냄새가 나는데요?”
“끄으.”
이훤은 한껏 치솟았던 입매를 축 늘어트린 채 힘없는 탄성을 흘렸다. 그러니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이 반가울 리 없다.
노인, 청년, 소녀.
녹빛 무복은 햇빛을 받아 번쩍였고, 허리춤에 매단 검은 더더욱 휘황찬란했다.
“허허, 다행이군. 영락없이 길을 잃는 줄 알았어. 이보시게. 여기서······.”
이훤은 노인이 지껄이는 것을 귓등으로 흘린 채 고삐를 흔들었다. 말이야 멈췄다가 가는 것이 더 힘들 터이니 오히려 푸드득 거리며 속도를 올렸다.
“이봐!”
청년이 멋들어지게 허공에서 몸을 뒤집더니 앞을 막아섰다. 녀석의 부리부리한 눈매만 봐도 앞으로 일어날 상황이 뇌리를 스쳐갔다. 하나 산속 깊은 곳의 마부는 귀찮은 일이 생긴다고 해서 마다할 사람이 아니었다.
“비켜.”
“뭐라고? 촌무지렁이가 아는 것이 없어도 그렇지. 저분이 누구신줄 알고 그냥 지나치는 게냐?”
그냥 죽일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으나, 꼴을 보아하니 화산을 찾아온 자들이다. 괜스레 건드렸다가 화산파 녀석들이 달라붙을 걸 생각하면 모른 척 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랴!”
“어, 어!”
청년은 자신을 향해 질주하듯 달려드는 말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때 노인의 신형이 번뜩이더니 고삐를 낚아챘다.
“무공을 익힌 듯한데 화산파의 문도신가?”
“아니.”
노인은 이훤의 반말에 미간을 좁혔다.
하나 한 가닥 예의마저 버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인상을 쓰면서 재차 물었다.
“화산의 수많은 도관에는 고인들이 즐비하다는데. 소형제도 도관에 머무는 건가?”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처음에는 노군 때문에 억지로 달라붙은 이름이다. 그 후 장난삼아 망아취자의 처소를 빼앗아 아예 취선관의 간판을 박아버렸다. 결국 도관에 속한 것이 맞기에 귀찮음을 무릎 쓰고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잘 됐군. 연화봉으로 가는 길이었네. 안내를 좀 해주겠나?”
이훤은 눈앞에 솟구친 봉우리를 올려다봤다.
낙안봉이다.
시선을 슬쩍 돌렸다.
연화봉이다.
지금이야 고개만 슬쩍 돌려도 보이지만, 실제의 거리는 엄청났다.
“저 앞에 갈림길이 있으니 거기까지만 갑시다. 뻥 뚫린 길을 잃지는 않을 거 아니오?”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타자. 청관아.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이훤은 청관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목에 징을 매단 것처럼 울리는 외침에 인상을 썼다.
“아! 드디어 앉아서 간다!”
이훤보다 서너 살 어려보이는 소녀는 수레에 오르자마자, 항아리에 몸을 기댄 채 투덜거렸다. 청관이라 불린 청년은 몇 번이나 이훤을 흘겨보다가 수레를 탔다. 노인은 자연스럽게 이훤의 옆자리를 차지한 후 물었다.
“최근 화산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지?”
수다스러운 노인네다.
귀찮음이 배가됐다.
“도관들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극복했다고 하더군.”
청관이 코웃음을 쳤다.
“화산파의 쇠락이 어디 하루이틀의 일입니까?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자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거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니 화가 날 이유도 없다.
그냥 듣고 귓등으로 흘렸다.
“놈! 여기 소형제도 화산의 도관 소속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혀를 함부로 놀렸다가는 경을 칠 것이다.”
이훤은 히죽 웃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뒤통수나 후려치지 그랬냐?’
청관이 노골적으로 화산파를 비웃었다면 소녀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조소를 흘렸다.
“화산파의 상징이 꽃이라면서요? 어찌 사내가 수많은 취향을 뒤로 하고 꽃을 좇는지 모르겠네요. 사내답지 못하니 제 집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거잖아요.”
매화를 조롱하기는 했지만, 참았다.
그저 매화의 고아함을 알지 못하는 계집의 천박한 취향이 안타까울 뿐이다.
“크흠, 노부는 종남파에서 왔네. 이번 일로 화산의 세가 크게 기울었으니 종남파에서 도와주라는 맹의 부탁이 있었거든. 본파로서는 지근거리에 존재하는 화산의 쇠락이 안타까워서 몇 번이나 도움의 손길을 보내려 했네. 하나 고집스런 자들이 거절하더군. 이제야······.”
이훤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도연명의 시도 좋았고, 이백의 시도 좋았다.
최근 망아취자에게 왕희지의 시를 배웠다.
다소 뻣뻣한 양반인 줄 알았거늘 제법 주도를 아는 것처럼 좋은 시구를 남겼더라.
그 때 주향이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이훤은 상념에서 깨어나 미간을 좁혔다.
술 냄새라면 십 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는 후각이 아닌가. 지금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냄새는 분명 수레의 둘째 칸에 쌓아놓은 백주 중 네 번째 항아리가 분명했다.
“야! 뭐하냐?”
이훤의 말에 청관은 술을 홀짝이다가 인상을 썼다.
“술 한 잔 마실 수도 있지. 너 아까부터 계속 혀가 짧은데 말이야. 죽고 싶으냐?”
검배에 손을 올린 채 살기를 드러낸다.
그 꼴이 참 우스워서 고삐로 놈의 하관을 후려쳤다.
쫘악!
노인은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채찍이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볼 수 없었다. 소녀가 벌떡 일어나 교성을 내지르려다 아랫배를 얻어맞고 널브러졌다.
“저, 저!”
“공짜로 마차에 탔으면 마차의 법을 지켜야지.”
이훤의 말에 노인은 황망함을 금치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누군 줄 알아? 종남파의 칠대검호 중 셋 째인 무량패검 장치결이다!”
장치결이 소개를 끝내는 순간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는 종남파의 장로임을 증명하듯 한순간 허리를 비틀며 검을 뽑으려 했다. 하나 이훤이 손이 먼저 검의 끝을 눌렀고, 다른 손이 턱 밑에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언제 이렇게 가까이······.’
장치결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청관과 소녀 위로 널브러졌다.
이훤은 세 명을 탑처럼 쌓아놓은 후 자리에 앉았다.
말은 저 혼자 푸드득 거리며 잘도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흐음, 종남파의 장로도 한 주먹이네.”
아무래도 천공혈륜겁의 팔 성이 머지 않은 듯했다.
“노군 형님도 바쁜데 잘 됐어.”
심부름과 청소를 시킬 사람이 세 명이나 늘었다.
이훤은 망아취자에게 칭찬 받을 생각에 기분좋은 휘파람을 연호했다.
삐이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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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의 중추인 진무궁에서는 온갖 불만이 쏟아져나오는 중이다.
“아니!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온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오지 않는 이유가 뭐랍니까?”
“종남파가 화산연맹을 이렇게 무시하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태극관주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크하하! 어차피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지 않으니 차라리 잘 되었어요. 그냥 없던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하던 일이나 하시지요.”
“그럽시다. 갑시다!”
수뇌부 회의는 금세 마무리됐다.
그리고 화산연맹의 누구도 더이상 종남파를 거론하지 않았다.
< 34, 미래를 알기에 움직이련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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