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제1차 화산연맹(華山聯盟). (2) >
당연히 관주들이 웅성거렸다.
장문인의 말은 문파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엄청난 선언이었다. 그렇기에 불신할 수밖에 없었고,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떠들썩했다.
그러던 중 장진관주가 일갈을 내질렀다.
“잠깐! 장문인은 지금 도관을 화산파의 방계로 삼을 생각이시오?”
관주들의 이목이 먹이를 가져다 준 어미새를 바라보듯 집중됐다.
하나 장문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첫 걸음이 어려웠을 뿐 뜻을 펼치고자 하니 막힘이 없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 증거로 여기 모인 화산파의 제자들이 앞으로 연합의 회의에 참석하게 될 겁니다.”
화산파가 쇠락했다고는 하나 인원으로는 으뜸이다. 게다가 고수의 숫자도 월등할 터였다. 한데 그들 중에서 열 명만 참석했다는 건 회의의 결과를 좌지우지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백진관주 서평은 우려하듯 말했다.
“지금껏 내외를 했지만, 화산파의 지분이 가장 큰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화산파의 장구한 역사에 누가 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되는군요. 하면 화산파의 이름을 내리시겠다는 의미입니까?”
장문인은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서 관주께서는 백진관의 이름을 버릴 수 있습니까?”
“불가합니다.”
“본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름을 바꿔서 부르고자 합니다. 잔꾀일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게 모두를 위해서도 좋을 듯하군요.”
“그게 무엇입니까?”
장문인은 내킨 걸음이라 여겼는지 편안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본파는 전진칠자에 속했던 광영자를 조사로 모십니다.”
화산파의 개파조사로 알려진 학대통의 도호가 광녕자(廣寧子)였으니 당연한 말이다.
“하여 광녕화산이라 칭하고자 합니다.”
서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큰 틀에서 화산에 속했음을 널리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서로의 조사와 학파, 교리를 인정한다는 의미로군요. 그렇게 되면 백진관은 관윤자를 조사로 모시니 관윤화산이 되겠군요.”
관윤자(關尹子)를 조사로 모시는 도관의 관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박노조(陳博老祖)를 조사로 모시는 도관들은 자연스럽게 진박화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서평이 말을 덧붙였다.
“의도는 좋습니다. 아니 서로 내외하기는 했으나, 은연 중에 화산파를 대표로 삼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일은 장문인과 화산파의 큰 양보와 더불어 대의명분을 위한 첫 걸음일 만큼 중차대합니다. 한데 이곳에 모인 관주들은 화산의 도관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장문인의 결의에 대한 가부를 지금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닌 말로 화산파가 쇠락했다고 해서 이런 선택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적이 또다시 난입한다면 도관들은 화산을 위해서라도 앞장서서 막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화산파 쪽에서 수백 년 간 이어온 전통을 바꾸려는 순간이다. 당연하게도 함께 할 수 없음이 아쉬울 터였다.
“역시 백진관주께서 사익을 탐하지 않고, 구도자의 진의를 품었다는 말은 틀리지 않군요.”
“과분한 칭찬에 감사하지만, 문제는 또 있습니다. 화산에 도관은 세 개의 도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주류에 오르지 못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못했으나 명백히 각자의 조사를 모시는 소규모 도관이 존재합니다. 그분들에 대한 배려 없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겁니다.”
그때 대전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매화검주께서 입실하십니다!”
장문인을 비롯한 관주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화산 장문인의 사형이자,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는 매화검주는 관주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다. 게다가 매화검주인 노군은 본래 성품이 소탈하여 두루두루 친분이 깊었다. 그렇기에 관주들도 일어나 예를 표했다.
노군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였다.
“서 관주.”
그는 초췌한 표정에도 장문인보다 서평을 먼저 찾았다.
“서악관주께서 귀천하셨다는 소식은 들었네.”
“화산을 지키기 위해 혼을 불사르셨으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본래 화산의 도관들 중 가장 명망이 높은 곳이 바로 서악관이다. 서악관주는 전대 백진관주와 친우였고, 노군이 한때 의형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서악관과 백진관은 관윤자를 조사로 모시는 가족이었네. 그러니 자네가 앞으로도 잘 이끌어주시게.”
“그리 하겠습니다.”
노군은 서평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장문인 앞에 섰다.
“조금 늦었네.”
“아닙니다. 대사형께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장진관주가 호기심을 보였다.
“노군께서 이 일과 관련된 일을 하셨나 보오?”
노군은 대답 대신 죽간을 내밀었다.
장문인은 죽간을 살핀 후 미소를 보였고, 잠시 후 죽간을 돌려본 관주들은 탄성을 흘렸다.
“아.”
노군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난 며칠 간 화산의 도관들을 돌며 서명을 받아왔네. 서 관주의 우려와 달리 소규모 도관들은 네 번째 도맥으로 인정받는 것에 찬성했네. 이것이 그 증거일세. 그리고 대전 밖에는 지금 당장 합류할 수 있는 자들이 모였네.”
그가 말을 끝내며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스무 명에 가까운 도관주들이 모여 있었다.
장문인 서화종은 탄성을 흘렸다.
개개인이 완숙한 절정의 고수였고, 혹자는 초절정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화산파의 고수와 도관의 관주들까지 더하면 어지간한 방파의 핵심 세력보다 월등한 무위를 자랑할 터였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은 듯하구나.’
노군은 장문인의 결심을 응원하듯 말을 이었다.
“본래 화산의 도관은 논쟁하고, 교류하며 발전했었네. 비록 화산파가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지만, 선후의 문제였을 뿐이야. 애당초 화산파의 도맥 또한 광녕자의 것만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네. 하여 나는 장문인의 선택을 지지하네.”
서평이 관주들을 돌아봤다.
관주들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신 바가 있으신 듯하군요. 들을 수 있겠습니까?”
노군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망아취자나 이훤에게는 식사를 챙겨주는 식모나 술을 함께 마실 수 없을 만큼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지만, 매화검주로서의 그는 무림맹에서도 위엄을 드러낼 만큼 대단한 고수였다.
“우리가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정치를 할 것도 아니야. 그저 화산에 처음 도맥이 생겼을 때처럼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목표일세. 그러니 각 도맥에서 대표를 뽑고, 화산의 행보에 대하여 함께 의논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화산파는 그것으로 되겠습니까?”
“안 될 건 무엇인가? 비록 지금에야 찢어져서 내외를 했다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그대와 나의 조종이 하나임을 만천하가 다 알고 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서평이 입을 열려고 하자, 노군이 제지했다.
“잠시! 한 가지 더 전할 것이 있네. 가져오라!”
노군의 외침에 도학사인 소요자를 필두로 삼대제자가 수십 권의 서책을 가져왔다. 묵향이 자욱하고, 표제가 깨끗한 것으로 보아 방금 엮어온 서책이 분명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서평과 관주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군은 서책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회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노도가 삼십 년 간 은거한 이유일세.”
“그것이 무슨······.”
“제목을 보게.”
서평은 서책을 꺼내 제목을 살핀 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매만전(萬梅萬傳).
제목은 간단했지만, 함의는 엄청났다.
“설마 이거 비급입니까?”
노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모르지. 한 가지는 확실하네. 그것은 화산의 총화이며, 정수이다.”
그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자, 말을 덧붙였다.
“비인부전이라 했다. 명문의 상승절예일수록 세상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니 자격이 없다면 전하지 말라는 의미지. 한데 그것은 보고, 느끼는 이가 스스로 자격을 증명해야 하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그저 저자의 흔한 도경과 다를 것이 없을 게야.”
서평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화산의 상승 절예가 담긴 비급이라는 의미였다.
관주 중 누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강해지고 싶다면 화산파의 절예를 익히라는 뜻인가?”
“노군은 혀를 찼다.
“쯧쯧, 자네의 언행을 보니 이것을 보아도 아무 의미가 없겠군.”
관주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렸다.
노군은 서책을 가져온 소요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사질은 무공에 대한 재능이 부족하네. 하나 도학에는 조예가 깊지. 그는 이것을 가리켜 광녕자의 정수가 담긴 기록이라 했네. 하나 내게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화산파의 무공 비급이었지. 자네들에게는 어떨 것 같은가?”
서평의 눈이 번쩍였다.
“설마 이것이 단순한 비급이 아니라면······.”
“아니라면?”
“제게는 관윤자의 정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노군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그렇다! 창을 쓴다면 창을, 도를 쓴다면 도를, 경전을 읊는다면 경전을, 농사를 짓는다면 농사에 대한 깨달음이 될 것이다. 하나 오롯이 화산의 품에서 살아온 자만이 무언가를 얻더라도 알 수 있으리라.”
서평은 진저리를 쳤다.
노군의 말이 사실이라면 만매만전은 천고의 기물이 아니던가.
“이렇게 귀중한 것을 어떻게······.”
“백진관주. 눈으로 보지 말고, 온 몸으로 느껴시게. 화산의 도맥은 하나에서 갈라졌지. 하나 예를 들어 무당파와는 같은 도가방파지만, 도맥 자체가 달라. 만에 하나 그들에게 이것을 선물로 준다고 해도 경전으로 치부될 것이네. 또한 그들 중에서도 누군가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지 않은가?”
노군의 말에 서평은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잠시 눈이 멀었습니다.”
“괜찮네.”
이번에도 장진관주가 진중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흉중의 의문을 드러냈다.
“한데 이걸 만드신 분은 어느 고인이신가요?”
사실 장문인을 비롯한 관주들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당금 화산에서 배분이 가장 높은 자는 당연히 매화검주였다. 그가 누군가에게서 화산의 정수를 받아왔으니 궁금한 건 당연했다.
노군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
‘아! 사숙의 존재 유무는 지금 알릴 수가 없는데······.’
이제는 그도 신마와 생존자들의 비화를 전해들었다.
그렇기에 망아취자가 깨달음을 전했다고 해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셈이다. 자칫 적이 집결하거나, 생존자들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날 소지가 농후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 순간 노군의 머릿속에 이훤이 스쳐갔다.
아닌 말로 망아취자와 이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던가. 비록 칠 일 내내 술을 퍼마시면서 작성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 덕에 소요자는 꼬부랑 글씨를 해석하느라 밤을 지새야 했다.
“그대들도 본 적이 있을 게요.”
“어디의 어느 고인이신지요?”
노군은 당당하게 진실을 밝혔다.
“취선관주 이훤이외다!”
*
같은 시각 이훤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후에야 찾아낸 평평한 바위를 짊어진 채로 낙안봉에 올랐다.
망아취자는 미간을 좁힌 채 술을 들이켰다.
“이 놈아! 진짜 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제가 화산파에 입문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게 만매만전은 왜 만드신 겁니까? 노군 형님에게 천천히 알려준 후에 가르치도록 했으면 되잖아요.”
“이 놈아! 화산의 모든 이들에게 좋은 말씀을 전하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이훤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덕에 제가 지금 이걸 하고 있는 겁니다.”
“후우, 그건 알지. 그런데 진짜 하려는 게냐?”
“아까우세요?”
망아취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훤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주원경 입구에 박혀 있던 비석을 뽑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가져온 돌을 박아넣었다.
“이미 스승님의 거처가 노출이 됐고, 진법도 망가졌잖아요. 거기에 더해서 술까지 다 마셨으니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수십 년을 살아온 곳이거늘······.”
이훤은 노군의 진중한 표정을 흉내 내며 말했다.
“만매만전 4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육신은 비우고, 심기는 채우라. 진정 마음이 일어나면 비어 있는 육신은 바람을 탄 솜털처럼 저절로 따르리라. 라고 쓰신 게 스승님입니다.”
망아취자는 술을 항아리 째로 들이키면서 연거푸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웃는 듯, 우는 듯한 묘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네 마음대로 해라!”
이훤은 히죽 웃으며 바위에 세 글자를 새겼다.
취선관(醉仙觀).
몇 번이나 입안에서 되뇌어도 어감이 좋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고천락의 작명 실력은 발군이다.
‘드디어.’
회귀 일 년째, 이훤에게 집이 생겼다.
< 33, 제1차 화산연맹(華山聯盟). (2) > 끝
ⓒ 김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