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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82화 (82/226)

< 33, 제1차 화산연맹(華山聯盟). >

33, 제1차 화산연맹(華山聯盟).

망아취자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흑의인의 수족인 광무제라는 자가 남긴 말은 화두였다. 그는 오십 년의 은거를 깼지만, 내일의 일은 정하지 못했다. 그저 화산의 것으로 품은 깨달음을 자연스럽게 전하고 싶을 뿐이다.

‘얽매이는 순간 이길 수 있다고?’

광무제의 말이 옳다.

지금 이 순간은 깨달음에 심취하여 화산파의 제자를 인질로 삼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 것이라고 넘겼으리라.

한데 지금은 이미 얽매이고 있다.

찬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던 기분도 점차 사그라졌다. 몽롱한 기분을 유지했다면 절대지경에 성큼 다가설 수도 있었으리라.

하나 그러지 못했다.

‘얽매인 만큼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렇기에 점차 머리가 맑아졌다.

이훤이 장공잔도의 반대편에 나타난 건 망아취자가 미소를 되찾았을 시점이었다.

“괜찮으세요?”

근심 가득한 목소리가 손쉽게 칼바람을 뚫는다.

망아취자는 이훤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편안해하고, 기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던가. 어쩌면 그가 하고자 하는 일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녀석이기도 했다.

“괜찮다.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어.”

“이상한 새끼가 오지 않았습니까?”

“되었다. 건너오기나 해라. 술이나 한 잔 하자꾸나.”

이훤이 한달음에 쇠막대를 밟고 뛰더니 옆에 내려섰다.

“연화봉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망아취자는 쓴웃음을 흘렸다.

“혈겁이 계속 된다면 당연히 갔겠지. 하나 네 말대로라면 이미 위난이 지나갔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더냐. 지금은 스스로 정리하게 두는 편이 옳다. 괜스레 오십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나로 인해 소란스러워지는 건 원치 않아.”

“화산에 깨달음을 전하기로 정하셨군요.”

이훤이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망아취자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네게 전하지 않아서 아쉽더냐?”

“제가 어젯밤에 화산파를 구했답니다. 잊지 마세요.”

“오냐! 알았다. 이자까지 쳐서 넉넉히 메워주마.”

“무공 말고 술 이야기였는데요? 땅 속 깊이 숨겨둔 귀한 술을 꺼내셔야 할 겁니다.”

망아취자는 이훤의 너스레에 폭소를 터트렸다.

“예끼! 차라리 검법이나 하나 배워가거라. 어디 노인네의 보물을 탐내!”

이훤은 망아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계속해서 너스레를 떨려고 했으나, 이내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는 낙안봉 정상에 발을 올리고는 눈을 끔뻑였다.

“너희들, 아직도 살아 있었냐?”

정상에는 아직도 공능칠자와 삼영수룡이 떨떠름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일각 후.

삼영수룡과 공능칠자가 죽었다.

이훤과 망아취자가 진심으로 대하는 순간 그들의 죽음은 예정된 바였다.

“강림혼요술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평범한 미혼술이나 섭혼술과는 다르죠.”

“그러게 말이다. 신념이 없음에도 죽음을 자처하니 해약 없는 독에 중독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훤은 시신을 치우며 탄식했다.

“끝까지 압박하면 칠공에 피를 토하고 죽더군요. 물론 항복한다고 해서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요.”

망아취자는 혀를 찼다.

“신마의 깨달음은 시작과 끝이 없을 만큼 무궁무진하다. 그 중에서 섭혼을 깨달은 자라면 가히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스승님은 뭘 얻으셨습니까?”

이훤의 물음에 망아취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마디로 논하자면 근원이다.”

근원(根源)이라는 말에 저절로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물이 생성되는 바탕을 깨우쳤다면 결국 모든 것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였다.

“비단 무공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삶을 대하는 자세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거기에 더하여 집착과 아집을 버렸으니 무공에 대한 깨달음은 부수적인 것이나 다름없지.”

망아취자는 여전히 신마를 경계했다.

하나 예전과 달리 그를 무작정 배척하지 않고, 인정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이쯤 되니 살아 있다면 한 번쯤 보고 싶기도 하네.’

담소를 나누며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주원경이 정리됐다.

다만 한 번 깨진 진법을 다시 되살릴 수 없기에 초옥과 매화 숲은 장마철 태풍을 만난 것처럼 쉴 새 없이 요동쳤다.

“안쪽으로 가시죠.”

두 사람은 매화 숲 내부의 평평한 바위를 찾았다.

안주도 없이 술 한 병씩을 쥐었고, 이내 별다른 대화 없이 술병을 기울였다.

“만상조주라는 것이다.”

만상조주(萬象造酒)라는 이름부터 묘한 의미를 품고 있었다. 한낱 술에 붙이기에는 너무나 과한 이름이 아닌가.

“귀한 술처럼 보이시려고 급조한 이름 같은데요?”

“오십 년 전 친우가 준 술이다.”

이훤은 한 번 더 술병을 기울인 후 탄성을 흘렸다.

“크하, 정말 좋은 술이네요. 만 가지 형상이 조화를 이뤄 입 안에서 춤을 추는 듯합니다.”

망아취자는 피식 웃었다.

“이름은 방금 지은 게 맞다. 그가 내게 술을 가르쳤지. 그리고 헤어질 때 선물이라며 이것을 주었다. 이름도 없고, 재료도 알 수 없는 술이었지. 그러니 이름을 붙이는 것도, 마시고 싶은 시기도 마음대로 하라고 하더라.”

“살짝 과장되기는 했지만, 정말 좋은 술이네요. 그 분은 뭐하시는 친구입니까?”

이훤이 슬쩍 눈치를 봤다.

망아취자는 술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고 주향을 음미했다. 잠시 후 흘러나온 한 마디는 만상조주만큼이나 귀한 정보였다.

“벽력창 악재. 산동악가 출신으로 나와 함께 신마의 깨달음을 전해들은 녀석이지.”

이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해와 인접한 산동성은 고천락의 기연 때문이라도 조만간 방문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백매선자는 죽기 전 생존자들을 캐물을 때 제갈세가와 산동악가를 거론했다.

‘망아취자에게 술까지 가르쳤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그렇게 망아취자와 술을 마시는 사이 칠 일이 흘렀다.

*

화산파가 위치한 화산의 수려한 산세는 여전했지만, 며칠 사이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화산파는 본산에 적의 발길을 허락했고,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이 사망했다. 대부분 도학사나 삼대 제자였지만, 원래부터 쇠락했던 화산파가 아니던가. 그뿐 아니라 화산 곳곳에 퍼져 있던 도관 중 절반 이상이 불탔고, 관주들은 대부분 화청궁도들의 공격 때문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러니 화산 전체가 비통함으로 가득할 터였다.

하나 화산에 남은 이들은 슬픔을 빠르게 정리했고, 안도하면서 내일을 준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파는 적을 막지 못했고, 도우려 왔던 도관주들도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화산 전체가 침탈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한데 그 위기를 넘긴 게다.

그 결과 이대제자들을 필두로 삼대제자와 하인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회음현에서 의원들을 데리고 왔다. 대규모 위령제가 예정 되었고, 무림맹에 화산의 혈겁을 알리기 위한 파발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보낸 칠 일이었다.

“모두 오신 듯하군요.”

화산파 장문인인 서화종(徐和種)의 말처럼 대전에는 화산의 내일을 논의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모였다.

도관의 관주들은 웅성거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아직 화산의 일대제자가 모두 오지 않았는데?’

며칠 전 혈겁으로 인해 살아남은 화산의 일대제자는 모두 열두 명이다. 그 중 두 명이 중상이었기에 이 자리에는 열 명이 모여야 했다. 하나 아무리 살펴봐도 일대제자의 숫자는 네 명이 전부였다. 그뿐 아니라 화산파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이대제자는 세 명만 참석했다. 거기에 더하여 도학을 책임지는 도학사 세 명이 한 쪽 면을 지켰다.

“화산파는 열 명이 전부입니까?”

백진관주 서평(徐平)의 한 마디에 관주들은 입을 닫았다.

암암리에 경전에 조예가 깊고, 무공이 뛰어난 서평을 대표로 삼은 듯했다.

“그렇습니다.”

서화종은 순순히 대꾸한 후 되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서평은 쓴웃음을 흘렸다.

며칠 동안 운기조식을 했음에도 조금은 더 요양이 필요한 듯했다. 하나 파리한 안색과 달리 두 눈에는 정광이 번뜩였다.

“자만했으니 벌을 받은 게지요. 화산파의 도움으로 괜찮아졌습니다.”

“아닙니다. 백진관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화산파는 현판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

“별 말씀을요. 장문인의 배려로 치료를 할 수 있었으니 공을 논할 입장은 아닙니다.”

어쩌면 서화종과 서평은 성만 같은 것이 아니라 성격도 비슷한 듯했다. 전형적인 정파의 인물로 무의미한 대화를 통해 명분을 쌓고, 서로의 속내를 가늠하며 각자 원하는 것을 드러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하나 이런 상황에서도 언제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 존재했다.

장진관의 관주인 청오자(靑伍仔)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 대화는 지난 며칠 동안 지겹도록 들었소이다. 오늘은 화산의 행보를 논하기 위함이 아닌가? 이렇게 시간을 보낼 때에도 화산을 노리던 적들은 무언가를 획책할 수 있소이다.”

화산파 장문인은 장진관주의 재촉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손짓을 하여 다과를 내오게 할 만큼 여유로웠다.

“화산은 오악 중 서악이라 불리며 도가의 성지로 일컬어집니다. 성지라 함은 참으로 대단한 말입니다. 불문의 성지인 소림에도 도관이 있고, 도가 계열의 방파 중 으뜸이라는 무당산에도 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계열만 모인 곳은 중원에서 두 곳뿐이지요.”

서평이 말을 받았다.

“오태산과 화산.”

“그렇습니다. 오태산의 절, 화산의 도관. 하나 오태산은 오래 전에 쇠락하여 사마외도의 집결지인 개미굴로 변질됐고, 오늘에 이르러 화산은 외적의 침입을 구사일생으로 막아냈습니다.”

“어이구! 장문인은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을 빙빙 돌리시는구려!”

장진관주는 가슴을 쳤고, 앙숙인 용호관주는 만류하느라 여념이 없다.

“화산 또한 오태산처럼 될 수 있습니다.”

서평이 장문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우려했으니 도관의 관주들마저 한 마음이 되어 연화봉에 오른 것이지요.”

서화종은 눈짓으로 서평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 마음. 좋은 말씀입니다. 하여 본 파는 최근의 겁난을 겪은 후 내부적으로 오랜 회의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화산의 중흥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관주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화산파와 도관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태상노군인 노자에게서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왕래가 없었을 뿐 한 마음, 한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서화종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오늘 하려는 일은 오롯이 화산을 위함이다.

하지만 자칫 와전되면 문파의 선조들을 욕보일 수도 있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숙고한 끝에서야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하나 큰 결심을 했음에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본 파는 화산의 여러 고인들에게 연합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관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예전처럼 화산파와 담을 쌓고 사는 건 불가능했다. 언제 어느 놈들이 다시 쳐들어와 분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서로 힘을 합하여 외적에 대항하자는 건 지극히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장문인의 뒤이은 말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말뿐인 연합을 넘어 도학과 무론을 공유하고, 서로의 교리를 해석하며, 만사를 함께 논의하기 위한 연합을 제안하는 겁니다.”

장문인의 말은 새로운 화산파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 33, 제1차 화산연맹(華山聯盟).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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