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화산쌍취(華山雙醉). (3) >
스무 길 넘게 솟구쳐있던 철봉이다.
이훤이 전력으로 후려치는 순간 철봉에 매달려 있던 자들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철장방주가 죽은 후에도 매달려 있던 방도들이다.
퍼퍼퍼퍼퍼퍼퍽!
이훤은 떨어지는 방도들이 땅에 닿기 전 후려쳤다.
이음새를 유지하던 방도들이 사라지는 순간 철봉은 괴음을 토하며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꼭대기에서 옷자락을 펄럭이며 누군가 떨어졌다. 한데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황급히 목덜미를 낚아채는 순간 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건 뭐야?”
여자다.
게다가 소마의 얼굴도 아니었다.
화청궁에서 불태워 죽인 백매선자와 똑같은 얼굴이다. 아마 사군사도 중 한 명이리라. 하루 전에 죽인 여인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을 보는 건 그리 즐겁지 않았다.
아닌 말로 역겨웠다.
“어!”
이훤은 일격에 여인의 얼굴을 뭉개려다 탄성을 흘렸다.
상대는 아혈과 마혈을 잡힌 상태로 철봉에 매달려 있었던 듯했다.
“하, 새끼들. 또 배신이냐?”
천룡전은 강림혼요술이라는 괴술법을 지녔다.
초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면 누구도 술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호감을 사고, 마음을 얻은 후 꾀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나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더라.
바로 천룡전의 자체적인 무력이다.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수뇌부라는 것들이 남의 손만 빌리고, 거기에 더해서 이렇게 반목을 하니······.’
이제는 천룡전이 오십 년 동안 세상에 나올 수 없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정파의 여섯 장로들이 얻은 깨달음을 얻으려 할 터였다. 돌이켜 보면 그들이 은거하기로 한 덕분에 천룡전이 지금껏 양지로 나올 수 없었던 게다. 사문에도 알리지 않고 은거를 했으니 위치를 알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열여섯 명에 달하는 사도를 만들고, 중원에 흩뿌려놓았으리라. 점조직처럼 강호의 어두운 곳에서 움직이면서 여섯 장로들의 행적을 추적했을 터였다. 한데 저들끼리 손을 잡아도 부족할 판에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족속들이다.
이훤은 회가 동한 듯 혀로 입술을 핥은 후 여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아혈과 마혈이 있는 부분을 강하게 후려쳤다. 적의 점혈법을 알지 못하니 힘으로 깨부수려는 게다.
퍽!
뚫렸다.
다만 상대는 심맥이 흔들릴 만큼 중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여인이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헛구역질을 했다.
“크허허헉!”
이훤은 여인이 정신을 차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악인들에게 틈을 주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멱살을 쥐고 흔드는 순간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름.”
“애난.”
생각보다 쉽게 나온다.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자들이다.
이훤은 애난을 뚫어져라 웅시했다.
원래부터 백매선자처럼 수심이 가득했던 얼굴이 아닌가. 그런 상태에서 부상을 당하고, 피를 토하니 처연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심약한 자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피와 눈물을 닦아줬으리라.
“어디 갔어?”
“그는 갔어요.”
대답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배신하기로 한 거야?”
“그가 먼저 했으니까요.”
“흑의?”
“검은 옷을 입기는 했지요.”
“어디로 갔지?”
애난은 그 순간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본래 울상이어야 할 그녀가 웃는 모습은 생각지 못했다. 희노애락에서 애(哀)라면 슬퍼해야 마땅하지 않던가. 한데 그녀의 미소는 즐거움보다 서글픔이 가득했다.
“그가 당신을 욕심내는 이유를 알겠어요. 하나 가질 수 없는 걸 탐하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어디 있을까요?”
“개소리를 계속 할 거면 이빨부터 다 뽑고 시작한다.”
이훤의 협박에도 애난은 먼 산을 보듯 한 숨을 흘렸다.
“그는 당신의 관심을 즐겼어요. 자신을 인지했다는 사실에 박수까지 치면서 애처럼 좋아하더군요. 그리고 나를 불렀어요. 내게도 좋은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저 위로 올라가라고 했지요. 안 갔어요. 안타깝게도 제 곁을 지켜주던 자를 아래로 내려 보낸 후였어요. 화산파를 도모하기 위해 잔뜩 모아오라고 했지요. 그게 실책이었네요. 그의 무공은 내가 어찌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결국 혈도를 잡히고 장대에 매달린 미끼가 될 수밖에 없었네요.”
애난의 신세한탄에 이훤은 인상을 썼다.
“무공? 흑의인이 무공을 펼쳤어?”
“당신은 우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네요. 하긴 백의는 몰라도 애매가 쉽게 죽어줬을 리 없지요. 더러운 년이니 수하를 시켜서 발설하게 했겠지요.”“무공을 익혔냐고 물었다!”
손에 힘을 주는 순간 애난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그건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를 업고 다니는 자가 오좌의 수장일 줄은 몰랐네요.”
“오좌?”
“밀법대종사나 당신을 상대하러 간 세 명의 무인들이 오좌에 속했지요. 하나 오좌의 모두를 더해도 흑의인을 업고 다니는 노인에게는 미치지 못해요.”
이훤은 잠시 미간을 좁힌 채 생각을 정리했다.
그 순간 고개를 돌려 낙안봉 쪽을 바라봤다.
“설마 그 새끼가 저기로 간 건가?”
애난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당신은 더 익혀서 먹겠다고 했어요. 하나 화산의 늙은이는 지금 당장 끌고 가서 천룡전의 제물로 바치겠다고 하더군요.”
콰직!
이훤은 애난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내 백회혈을 내리찍었고, 심장을 터트렸으며, 단전을 짓밟았다.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절명한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수심이 가득했다.
강림혼요술이 깨지기 전에 죽어버린 게다.
이훤은 그런 그녀를 버려둔 채 선인봉을 달려내려갔다.
“안주야!”
몇 번이나 목소리를 높여 불러봤지만,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
망아취자는 이훤의 부탁을 충실히 이행했다.
공능칠자와 삼영수룡을 상대로 쉴 새 없이 어우러졌다.
이제는 저들도 안다.
망아취자는 진짜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병법에 이르기를 적이 전력을 다하지 않을 때가 절호의 기회라 했다. 한데 그들이 아무리 절예를 펼치고, 혼신의 힘을 다해도 찌르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실 뭉치를 풀려다가 더욱 엉켜드는 꼴에 좌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게 매화삼조수라는 것일세.”
망아취자가 손을 활짝 펴고 휘젓는 순간 장영이 난무했다.
“매화가 난무할 때 그것을 잡으려던 아이의 손놀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비급에 적혀 있지. 응형조였네. 그리고 지금부터 보여줄 것이 호형조지. 마치 호랑이의 발톱 같지?”
공능칠자 중 셋째는 자신의 옷자락이 뜯겨나간 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방금 전 망아취자의 손이 세 치만 더 들어왔어도 심장을 뜯겼으리라. 하지만 여전히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파팟!
망아취자가 대뜸 물러났다.
그는 뒷짐을 지더니 한숨을 흘렸다.
“나는 본래 매화삼조수를 좋아하지 않았네. 왠지 소림오조와 흡사했거든. 한데 이번에 깨달은 바에 의하면 동물의 형태보다 아이의 손놀림이 맞아. 그저 이름을 잘못 붙인 게지. 응형조는 매소아조라 부르는 게 좋을 것이야. 아이가 웃으며 매화를 잡는 모양이니까.”
삼영수룡의 둘째인 지별은 속으로 욕설을 쏟아냈다.
‘망할 미친 늙은이야! 애가 웃으면서 내 심장을 파낸단 말이더냐?’
조금 전 공능칠자가 당했던 것을 그도 당했기 때문이다.
한데 여전히 투기를 끌어올린 삼영수룡과 달리 공능칠자는 망아취자가 물러나자 안도하는 듯했다. 초절정에 근접했다는 건 말 그대로 가깝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초절정 고수처럼 마르지 않는 내력을 사용할 수 없지 않겠는가. 삼영수룡과 달리 공능칠자의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흐음.”
망아취자는 한탄을 하듯, 누군가를 가르치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침음을 흘리더니 삼영수룡이나 공능칠자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했다.
“오늘은 불청객이 꽤 많군.”
그러더니 대뜸 공능칠자 쪽으로 걷는 것이 아닌가.
공능칠자는 표정을 굳혔고,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망아취자가 지척에 이르고, 그들을 지나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죽는다.’
하나 삼영수룡은 달랐다.
그 중에서 막내인 인속은 망아취자의 놀림감이 된 듯하여 심중에 울화가 가득했다.
“무시하는 거냐!”
대갈일성과 함께 극쾌의 검초가 번뜩였다.
촤악!
망아취자는 여전히 낙안봉의 입구를 바라봤고, 인속은 달려던 기세 그대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가 달려나간 자리에는 검을 쥔 손이 주인과 이별한 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손목과 목.’
망아취자는 검을 두 번 휘둘렀다.
공능칠자의 대형인 대유자가 천공을 바라봤다.
하나 천공 또한 대유자와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안 보였어.’
망아취자는 공능칠자와 삼영수룡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정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장공잔도를 앞두고 뒷짐을 진 채로 섰다.
“뉘신가?”
장공잔도의 맞은편에는 흑의인과 그를 업은 노인이 위치했다. 그뿐 아니라 애난이 호위라고 여겼던 사객이 수하들과 도열한 상태였다.
그 숫자만 오십여 명이 넘었다.
흑의인은 이훤이 자취를 감추는 순간 그의 의도를 눈치 챘다. 그렇기에 애난을 철봉의 꼭대기에 매달아 놓고 다른 길을 택하여 낙안봉에 이르렀다.
‘이훤은 지켜볼수록 좋다.’
마치 과실이 익는 시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선인봉을 내려오자, 산 아래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사객이 따라붙었다. 애난은 사객을 호위라 여겼지만, 그야말로 오좌의 차석을 차지한 자였다.
그러니 흑의인은 장공잔도를 앞뒀음에도 환히 웃었다.
자신을 업고 있는 노인과 사객(士客)이 있는 한 패배는 생각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갑시다.”
하나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흑의인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맺혔다.
노인은 오좌의 수장이면서도 자신을 업고 다닐 만큼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껏 흑의인의 명령이나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지금은 좋지 않구나.”
흑의인은 노인의 한 마디에 미간을 좁혔다.
“왜지요?”
“저 자는 지금 신마의 깨달음을 멀리 하지 않는구나. 신마의 깨달음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체득한 상태야. 절대지경의 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마치 자식이나 제자에게 설명하듯 인자한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훤을 차후로 미룬 이상 저 자라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설마 광무제라 불리는 당신이 진다는 의미인가요?”
하나 노인은 요지부동이다.
“그건 모르지. 하나 상대는 아직도 절대지경을 엿본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지금 상대하면 저 자는 여운에 취하여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게다. 너는 저 자를 살려서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나는 저 자를 이길 수는 있지만, 살릴 자신이 없다.”
“사객은요?”
사객이 고개를 조아렸다.
“광무제께서 불가하시다면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흑의인은 자신의 계획이 완성 직전에서 무산됐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군요. 결국 둘 다 익지 않은 과실이었네요.”
“다만 저 자가 화산에 얻은 전하여 인연이 늘어난다면 지금처럼 간결하게 활동할 수 없을 게야. 그 때가 된다면 네 뜻대로 데리고 갈 수 있겠지.”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고, 사객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흑의인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돌아갑시다. 오늘 화산에서는 더 이상 얻을 게 없네요.”
그 때 망아취자가 장공잔도 맞은편에서 일갈을 내질렀다.
“거기! 그냥 간다는 게야?”
동시에 강맹한 기세가 광풍을 뚫고 장공잔도 너머까지 휘말아치기 시작했다. 노인은 흑의인을 업은 채로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광풍이 미풍으로 변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음에 좋은 날을 잡겠소이다.”
광무제는 그 말을 끝으로 흑의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사객과 수하들마저 사라진 장공잔도에는 서늘함이 휘몰아쳤다.
“하아.”
망아취자는 잠시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보며 침음을 내뱉었다. 그도 광무제라는 자가 한 말을 들었고, 공감했던 바였다.
“전해야 할 것이 있으니 건널 수가 없구나.”
< 32, 화산쌍취(華山雙醉).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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