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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79화 (79/226)

< 32, 화산쌍취(華山雙醉). >

32, 화산쌍취(華山雙醉).

화산의 주요 봉우리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가 않았다. 혹자는 운대봉과 옥녀봉을 더하여 다섯이라 했고, 누구는 운대와 옥녀는 연화봉에 속할 뿐이니 낙안봉과 선인봉을 헤아려 셋이라 주장했다.

- 그냥 다수가 주장하는 게 맞다!

하나 소속에 대한 이견과 달리 높이를 논할 때에는 모두가 한목소리로 낙안봉을 꼽았다. 지난 날 천문과 역학은 물론이고, 산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만박노객(萬博老客)이 일 년에 걸쳐 조사한 후 내놓은 결과였다.

“하지만 만박노객이 알리지 않은 정보도 있지요.”

화청궁에서 사라졌던 흑의인이 애난과 함께 선인봉 정상에 나타났다.

“그게 뭔가요?”

“낙안봉이 높기는 하나 선인봉과 큰 차이는 없지요.”

애난은 남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낙안봉을 보며 탄식했다.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거리의 문제 같네요.”

흑의인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그것을 눈에 가져다 대며 헤죽 웃었다.

“간절히 원하면 보이는 법이랍니다.”

“흐응, 흑의는 긍정적이어서 좋네요.”

“후후, 애난은 부정적인 게 매력적입니다.”

두 사람이 알맹이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선인봉 정상이 정리됐다.

“정리가 끝났으면 천봉을 가져와라.”

본래 선인봉은 조양봉이라고 해서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정상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도학사나 구도자들이 움막을 짓거나 토굴을 파고 수련에 열중했다. 하나 그들은 모두 죽었고, 빈자리를 채운 건 상의를 탈의한 채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사내들이다.

“준비하겠습니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인이 허리를 숙였다.

한데 흑의인 또한 평소보다 정중하면서도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철장방주께 큰 도움을 받네요.”

철장방주(鐵杖幇主)는 괘념치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친 후 방도들 쪽으로 걸어갔다.

애난은 그 모습을 보고 서글픈 듯 눈시울을 붉혔다.

“아깝네요. 철장방이면 외공으로 논했을 때 소림과 비견한다고 소문이 돌 정도잖아요.”

“운이 좋았지요.”

“휴우, 운이 좋은 것 치고는 오좌의 면면이 너무 화려하시네요. 박복한 이 년과는 달리 너무나 대단하세요,”

흑의인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나 그녀의 말처럼 오좌(五座)를 모아놓은 것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밀법대종사나 삼영수룡, 철장방과 같은 세력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좌의 으뜸과 차석을 알게 된다면 부러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흑의인의 혼잣말에 애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기심을 보였다. 하나 이번에도 명확하게 알려주는 대신 미소로 답을 대신할 뿐이다.

그때 철장방주의 우렁찬 일갈이 들려왔다.

“꽂아라!”

외공을 극한까지 달련한 방도들은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듯 사람의 허벅지만한 두께의 철봉을 들고 왔다.

쿵!

선인봉 정상의 제단에는 향을 사르고, 재를 뿌릴 수 있게 깊은 구멍을 뚫어 놓았다. 두터운 철봉을 구멍에 꽂았고, 이내 비슷한 두께의 철봉을 사선으로 덧댔다.

애난은 미간을 좁혔다.

철장방이 가져온 철봉은 아직도 십여 개 이상 남아 있었다. 저마다 이 장은 족히 될법한 철봉이며, 시작과 끝부분이 요철(凹凸)처럼 만들어져 맞물릴 수 있게 제작됐다.

“설마 높이를 해결한다는 것이······.”

쾅!

이장 높이의 철봉의 끝에 또 다른 철봉이 꽂혔다.

그리고 건장한 체구의 방도 두 명이 철봉과 철봉의 연결부위는 몸으로 감쌌다.

“만박노객이 그러더라고요. 낙안봉과 선인봉의 높이는 스무 길 남짓이라고요. 그러니 저렇게 열 개 정도 꽂으면 낙안봉보다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흑의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애난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발상의 전환은 둘째 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다른 자들이 흑의를 경계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그럴 리가요. 언젠가 제 진심을 알게 된다면 경계하지 않을 겁니다.”

애난에게는 흑의인의 겸양 어린 말이 경계할 수 없도록 모두 죽이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속내를 숨기려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저렇게 높은 봉 위에는 어찌 올라갈 것이며, 꼭대기에는 어떻게 버티실 생각인가요?”

“글쎄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쾅! 쾅! 쾅!

철봉이 십여 개 가까이 꽂히는 순간 꼭대기는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안개나 구름을 뚫고 솟구친 듯하여 이야기 속 여의봉처럼 보였다. 게다가 철봉과 철봉이 연결될 때마다 방도들이 달라붙어서 힘으로 붙잡고 있는 기괴한 광경 또한 섬뜩하기만 했다.

벌써부터 가장 아래쪽에 있는 자들은 얼굴에 피가 몰려서 시뻘게진 얼굴로 가쁜 호흡을 쏟아내고 있었다.

“반 각도 버티지 못한다면 내가 죽여 버리겠다!”

철장방주의 말에 방도들은 사력을 다해 버텨야 했다.

잠시 후 그가 흑의인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오르셔도 될 듯합니다.”

흑의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화청궁에 나타났던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등에 의자를 매달고 있었다. 흑의인이 의자에 앉는 순간 그가 솟구쳤다.

파파파파팟!

방도들을 밟고, 철봉을 움켜쥐는 행위는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반복됐다. 그리고 애난이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에는 이미 구름을 뚫고 사라진 후였다.

“하아, 진심으로 부러워지네.”

애난은 유달리 빨간 혀로 입술을 핥으며 손짓을 했다.

그녀의 눈에 살기가 흐르는 순간 백면서생처럼 보이는 점잖은 표정의 중년인이 다가섰다. 철봉 근처를 지키던 철장방주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지금껏 근처에 있으면서도 사내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객.”

“예. 대부인.”

애난은 자신의 위장 신분인 대부인(大夫人)이라는 말에 슬쩍 눈을 감았다. 다른 자들과 달리 자신의 위장 신분에 대하여 큰 애착을 지닌 듯했다.

“휴우, 모두 불러 모아요. 오늘 흑의를 재끼고, 모든 걸 가져야겠어요.”

백면서생은 슬쩍 철장방주 쪽을 둘러봤다.

“그리 하겠습니다.”

흑의인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번들거렸다.

그 순간 안개와 구름을 뚫고, 수백 장 밖에 있을 낙안봉의 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백의나 애매, 또는 애난과 달리 강림혼요술 외에도 다른 것을 익힌 상태였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다른 수뇌부에 비하여 앞서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하. 혈천궁의 부궁주라는 자가 직접 나섰군요.”

그는 자신을 짊어지고 있는 노인에게 중계를 하듯 혼잣말을 이어갔다. 잠시 후 망아취자가 나타나고, 밀법대종사가 허무하게 죽는 모습이 보였다.

“아.”

그는 망아취자가 밀법대종사를 죽였음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이훤과 혈천궁 부궁주와의 싸움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진짜 탐나는 자라니까요. 저기서도 저렇게 수작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부궁주라는 자가 불쌍할 따름이에요. 자! 그리고 이제 선수들이 입장할 때인데······.”

때마침 흑의인이 보낸 삼영수룡(三影水龍)이 모습을 보였다. 오대세가의 한 곳인 교룡세가의 가주를 죽였을 만큼 대단한 무위를 지닌 자들이다. 삼영수룡과 더불어 일곱 명의 문사가 등장했다. 애난이 화산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파견한 공능칠자(孔凌七子)다. 여차하면 삼영수룡을 죽여 깨달음을 빼앗는 역할도 맡았을 터였다.

흑의인은 강림혼요술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었다.

“자! 이훤. 연기는 그만 해요. 언제까지 부궁주 따위와 어울릴 수는 없잖아요.”

아니나다를까 이훤은 삼영수룡이 등장하는 순간 부궁주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흑의인은 본능적으로 이훤의 꿍꿍이를 알 것 같았다.

“아하, 정말 남 주기 아까운 사람이라니까요.”

흑의인은 박장대소를 하며 자신을 떠받들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하하하! 나를 노리고 있어요. 그가 나를 신경 쓰고 있다고요. 하하하!”

*

흑의인의 예상이 옳았다.

이훤은 처음부터 흑의인을 염두에 뒀다.

그는 천룡전의 무리를 상대하면서 놈들의 습성을 어느 정도 예상한 상태였다.

놈들은 양지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놈들은 언제나 지켜보기를 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백의인은 문후가 되어 인왕의 곁을 지켰고, 애매는 백매선자가 되어 화청궁을 직접 운영하지 않았던가. 강림혼요술이라는 희대의 섭혼술을 익혔으니 대리인을 만들거나, 꼭두각시를 내세워도 될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언제나 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화산을 도모한 놈도 화산을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쳇! 이 정도로는 나타나지 않는 건가?’

어차피 부궁주와의 싸움은 혈인사가 혈륜을 뚫지 못한 상황에서 승패가 정해졌다. 하나 놈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백중세를 유지하던 중이다. 그러나 암중의 적은 한 번 더 수하를 보냈다. 그러니 더 이상 부궁주와 얽혀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삼영수룡과 공능칠자가 나타나는 순간 부궁주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스승님!”

이훤은 망아취자의 곁에 내려섰다.

한데 망아취자는 여전히 몽롱한 눈빛으로 꿈을 꾸듯 먼 산을 응시했다.

“날이 춥네. 이상해. 주원경은 늘 따뜻했는데 말이지.”

“설마 술에 취한 겁니까?”

이훤의 물음에 망아취자는 눈을 끔뻑였다.

“어, 너로구나. 그나저나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아! 그리고 이 놈이 누군 줄 아느냐?”

밀법대종사의 시신을 가리키며 묻는 모습만 봐도 평상시와 달랐다.

“몰라요. 그것보다 정신 좀 차려보세요. 폐관 수련을 하다가 뭔 일이 있었던 건데요?”

망아취자는 눈을 끔뻑이다가 폐관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아! 맞아. 폐관 중이었지. 한데 말이야.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겼단 말이지. 그러다보니 모두 부질없더라고. 내가 뭐라고 하늘이 준 걸 버리고, 챙겨? 살아 있는 것이 선물이거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릴 수는 없잖아. 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황한 이야기의 핵심은 간단했다.

폐관수련을 하던 중 신마의 깨달음을 완전히 받아들였단다. 그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정체되었던 무위가 폭발하듯 성장한 듯했다. 아닌 말로 밀법대종사를 일격에 죽이는 건 이훤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회귀 전의 나보다······.’

이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망아취자의 나른한 기세는 회귀 전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검신(劍神)이나, 천권(天勸), 선도(仙導)와 같은 절대지경의 고수들이 뇌리를 스쳤다.

‘강하다.’

그래서 미소가 절로 나왔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엄청나게 강해졌으니 오늘의 일을 원하는 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확률도 상승했다.

‘그 새끼는 꼭 잡아야지!’

기왕이면 회귀 전 자신을 농락한 소마였으면 좋겠다.

“자! 스승님, 이제 저 새끼들을 처리하죠.”

이훤의 호기로운 외침에 망아취자가 눈을 끔뻑였다.

“쟤들은 또 누구냐? 오늘 잔치라도 열었어?”

맥 빠지는 한 마디에 반응한 건 오히려 삼영수룡이다.

“크큭! 노망이 들었나?”

“우리와 상관없지. 우리는 저 어린놈만 흑의에게 데려다주면 돼. 그쪽은 어때? 위에서 서로 동의한 사안이던데.”

공능칠자의 대형인 대유자는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저 노인을 데려가지.”

“잘 됐네. 서로 할 일을 하자고.”

삼영수룡은 이훤에게 다가왔고, 공능칠자는 투기를 발산하며 망아취자를 응시했다. 대유자는 망아취자를 떠보듯 물었다.

“술에 취한 건가?”

노망이나 치매, 광증과 같은 종류가 아니기를 바라는 절박한 질문이다. 하나 망아취자는 언제 주워왔는지 술병을 기울이며 탄성을 흘렸다.

“크하! 삶에 취한다.”

결국 삼영수룡은 폭소를 터트리며 망아취자를 비웃었다.

“크하하! 본인이 달을 잡겠다고 강에 빠져 죽은 시선이라도 된다고 믿는 건가?”

“노망이 나도 제대로 났군.”

그 때 이훤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대, 대단해.”

취마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망아취자의 호방함은 한순간 천룡전에 대한 분노마저 잊을 만큼 멋있었다.

대유자가 삼영수룡을 보며 조롱했다.

“흥! 그쪽 물건도 정상은 아니네.”

< 32, 화산쌍취(華山雙醉).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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