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화산(華山). (2) >
이훤의 시선은 전방이 아니라 낙안봉 정상을 향했다.
쇄애애애액!
급한 마음보다 빠르게 몸이 움직였다.
어깨를 슬쩍 비트는 순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던 적의 기습이 무효화됐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팔을 목에 걸었다.
꽈득.
한 놈 더 죽였다.
죽은 놈의 아랫배를 걷어참으로서 추진력을 얻었다.
상대가 멀리 튕겨나가는 만큼 빠르게 나아갔다.
‘스승님.’
장난처럼 시작됐던 관계였다.
망아취자는 상단전이 열린 이훤에게 호기심을 보였고, 이훤은 주원경을 만들어낸 망아취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좋은 술을 공짜로 마시고, 좋은 술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도 배웠다.
그렇기에 주도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라 칭했다.
망아취자도, 이훤도, 노군도 그렇게 여겼다.
그저 외롭지만,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어울리는 방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나 지금도 그렀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암천군림보의 원형을 제공했기에?
귀한 술을 아낌없이 내줘서?
큰 비밀을 자신에게만 털어놔서?
아니다.
이훤이 망아취자에게 받은 건 더 컸다.
그가 화산을 집처럼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언제 돌아와도 반겨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살아왔던 집이라고 해도 텅 비어있다면 돌아가고 싶을지 모르겠다. 고향이랍시고 먼 길을 떠나왔거늘 아는 이가 없다면 하루라도 편히 누울 수 있을까 싶다.
‘씨발! 왜 이럴 때 폐관을 해가지고.’
이제는 알겠다.
회귀의 이유가 반덕구라고 해도 회귀한 이후 편히 지내온 건 오롯이 망아취자와 노군의 덕이다.
이제 반덕구는 죽고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비켜!”
이훤이 갑작스럽게 멈춰서며 양 손을 옆구리에 붙였다.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혈륜을 뽑아 올린 후 단전에 담아뒀던 공청석유의 내력까지 끌어 모았다.
솨아아아아아-
양 손을 중심으로 핏빛 기류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을 전방으로 후려치는 순간 공간 자체에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둥-
수풀 속에 숨어 있던 혈천궁도들이 개미떼처럼 튀어나왔다. 완숙한 절정의 무인이니 내력의 거대한 흐름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게다. 하나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재차 검을 고쳐 잡았다. 그 순간 한껏 응축됐던 공간이 나래를 펼치듯 전방으로 노도와 같은 기류를 흩뿌렸다.
콰콰콰콰콰콰쾅!
현재 천공혈륜겁의 성취는 칠 성이다.
거기에 공청석유의 내공까지 더했으니 회귀 전 광야제라 불렸던 팔 성의 경지와 다르지 않을 터였다. 비록 단전에 담아뒀던 이 갑자의 내공 중 반 갑자 이상이 흩어졌지만, 아깝지 않았다.
전방으로 십 장 이상 길이 뚫렸다.
파팟!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제대로 형체를 갖추지 못한 시신들이 좌우로 밀려났다. 하지만 노군동으로 향하는 이훤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안주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노군동에 있을 안주가 짖는다면 적들은 아직 잔공잔도를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놈들이 방해가 될 안주를 그냥 두고 지나칠 리 없지 않은가. 귀찮기만 했던 녀석의 개소리가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파파파파팟!
암천군림보는 은밀함과 장악력, 그리고 쾌속함을 핵심으로 만들어졌다. 하나 다른 장점을 버리고 쾌속함을 극대화하는 순간 속도만으로는 개방의 천지일의보(天地一意步)와 비견될 만 했다.
쾅!
돌아가면 금세 노군동이다.
하나 이훤은 삼 장 높이의 절벽을 뛰어올랐다. 중간에 손가락 한 마디만큼 튀어나온 동글동글한 돌을 움켜쥐는 순간 약력이 극대화됐다. 곡예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신형을 뒤집었고, 이내 발로 돌을 박차고 재차 뛰어올랐다.
그리고 한순간 노군동을 발아래로 뒀다.
‘······.’
*
혈천궁도 백 명이 낙안봉을 올랐다.
열 명의 조장과 다섯 명의 흑의인은 별개였다.
혈천궁의 부궁주는 밀법대종사와 이미 장공잔도를 건넜다.
하나 말로만 듣던 장공잔도를 궁도들이 건너는 건 불가능했다. 또한 조장 급 중에서도 경신술에 재주가 부족한 자는 노군동에 남았다. 결국 부궁주와 종사, 그리고 혈천궁의 비밀 병기라 불리는 자들만 장공잔도 너머의 낙안봉 정상으로 향했다.
“술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군요.”
노군동에 남은 삼조장 중 한 명이 고기를 뜯으며 혀를 찼다. 잠시 후 사조장이 노군동 내부에서 입맛을 다시며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 술이 꽤 많소.”
술을 마시고 싶다던 조장도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혀를 차며 고기를 뜯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궁주와 수뇌부가 장공잔도를 지난 상태에서 고기를 먹는 것도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고기 냄새야 강풍에 휘말려 사라질 테지만, 술 냄새는 아닐 터였다.
“목숨을 걸고 마실 필요는 없지.”
노군동에서 솥을 가져와 국을 끓이던 육조장이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소. 빙궁의 일이야 부궁주와 관련이 있으니 우리가 나섰다고 칩시다. 한데 우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장성을 넘은 것도 모자라 화산파까지 공격을 하고 있으니······.”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한다.”
“심심하군. 차라리 저 아래 험난한 길이나 점거하고 있을 걸 그랬나?”
삼조장은 진저리를 쳤다.
“저곳이 창룡령이라는 곳이랍디다. 바람의 세기가 대막보다 심하더이다. 이곳의 일을 끝내면 빙궁도 가야 하는데 굳이 고뿔에 걸릴 필요가 있겠소?”
사조장이 키득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것도 그렇군. 사실 나는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와본 것이 처음이외다. 그런 내가 전방은 탁 트였고, 아래는 수하들이 지키는 가운데 고기를 먹고 있소이다. 이 정도면 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요.”
그는 잘 익은 고기를 뼈째 꺼냈다.
혀로 입술을 몇 번이나 핥은 후 크게 입을 벌려서 고기를 베어 물려던 찰나였다. 시계가 탁 트였던 전방에서 갑작스럽게 사람이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어.”
사조장은 그 한 마디를 내뱉고는 머리가 호박처럼 터져버렸다. 삼조장과 육조장을 비롯한 자들이 이훤의 등장을 파악한 건 뇌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는 순간이었다.
“누구냐?”
삼조장이 재빠르게 쥐고 있던 뼈를 던졌다.
이곳에 남은 자들은 경공이 부족할 뿐 오히려 근력이나 무공 자체는 뒤지지 않았다. 하나 뼈는 쾌속하게 날아간 것에 비해 너무도 쉽게 잡혔다.
이훤은 뒷다리로 보이는 뼈를 쥔 채로 이를 갈았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마치 조장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 같았다.
쇄애애액!
대검을 양 손에 쥐는 순간 손목 자체가 으스러졌다. 동시에 목이 절반으로 꺾였고, 쓰러지는 자의 곁에 있던 다른 조장은 자세를 잡기도 전에 옆구리 한 쪽이 뜯겨나갔다.
늑대가 양떼 무리에 뛰어들었어도 이처럼 참혹하지는 않았으리라.
이훤은 분노를 억누르는 대신 가감 없이 표출했다.
콰직!
마지막 남은 놈의 머리통에 수도를 내리친 후 펄펄 끓고 있는 솥을 걷어찼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털도 제대로 뽑지 않은 고깃덩이와 누런 육수가 흩뿌려졌다.
“안주야!”
이훤은 다리뼈를 양손으로 감쌌다.
미운 정도 정이라지 않던가.
망아취자와 노군에는 미치지 못해도 안주와는 나름 정을 쌓은 상태였다. 아닌 말로 화산파 장문인하고 안주가 물에 빠졌다면 후자를 구했으리라.
“크흑! 형님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인가.”
이훤은 실의에 빠질 노군을 떠올리며 장탄식을 내뱉었다.
그 순간 개소리가 들렸다.
컹컹!
노군동과 이어지는 샛길을 막아버린 숲의 꼭대기에서 안주가 날개를 펄럭이듯 털을 흩날리며 나타났다.
“······.”
이훤은 자신 앞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 혀를 빼물고 헥헥 거리는 안주를 응시했다.
“그래, 너는 장공잔도도 건너는 놈이지. 그런 네가 얌전히 솥에 들어갔을 리가 없지.”
결국 녀석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에 헛웃음을 흘렸다.
“뭐 본 것 있느냐?”
그저 안주의 행보가 신묘하니 지나가는 말로 물었을 뿐이다. 한데 안주는 기다렸다는 듯 발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같은 곳을 세 번씩 파헤치고, 어떤 곳은 그냥 가볍게 발로 흙을 긁었다.
“설마 이게 깊게 파헤친 게 강한 거고, 얕은 건 약한 거야? 맞아?”
컹컹!
노군이 애지중지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저 술 냄새만 잘 맡는 개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몇 명인데?”
그 결과 안주가 알 수 없는 일곱 명과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은 여섯 명이 장공잔도로 향했음을 파악했다.
“하하, 오늘 일 중에 제일 즐거웠다.”
이훤은 안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돌아섰다.
폭소를 터트린 것과 달리 눈빛에는 혈기(血氣)가 번뜩였다.
열세 명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단다.
‘쉽네.’
*
북리청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새외오대금지 중 북해빙궁의 소궁주였다. 그리고 외가 또한 새외오대금지에 속한 혈천궁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끊임없이 경험했을 터였다.
하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눈동자는 어느새 욕망을 내비쳤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낙안봉 정상에 펼쳐진 주원경을 보고 누가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과 밖의 날씨가 달랐고, 시간의 흐름조차 빗겨간 듯한 지상낙원처럼 여겨졌다.
북리청은 주원경이라 새겨진 비석 앞에서 진법을 깨기 위해 애쓰는 궁도들을 보며 혀를 찼다.
‘젠장! 대막에서는 호풍환우마저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더니······.’
일조장은 대막 내에서 천기를 관찰하고, 진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니 부궁주가 데리고 와서 주원경의 진법을 해체하려고 했을 게다.
“깰 수 있습니다. 한데 억지로 생문을 개방해야 합니다. 아마 저 안의 풍경이나 물건이 어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궁주를 대신해서 밀법대종사가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어! 빨리 깨. 어차피 우리가 필요한 건 사람이니까.”
일조장은 부궁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법 해체를 시작했다. 밀법대종사는 그 모습을 보고 충성스럽다며 칭찬을 했지만, 눈으로는 주변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딘가에 흑의가 있을 텐데······.’
그가 아는 흑의라면 화산의 깨달음을 손에 넣기 위해 자신만 보냈을 리가 없다. 본래부터 손해를 보지 않고, 이득 보는 것을 즐기는 자였다. 그러니 애매의 세력을 빼앗아 애난에게 주었고, 그로 인해 애난의 세력인 혈천궁을 움직이고 있지 않던가.
‘누가 됐든 나보다는 강하겠지.’
그렇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열었는가?”
밀법대종사는 본능적으로 기감을 가로막던 진법이 해제됐음을 인지하고 외쳤다. 일조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하나둘씩 내부로 향했다.
“저쪽은 쓸 만한가?”
부궁주는 종사의 물음에 은밀하게 이끌고 온 다섯 명의 무인을 바라봤다.
“검총에서 특급 대우를 받던 자들입니다. 제 밑에서 십 년 됐지요.”
밀법대종사는 탄성을 흘렸다.
부궁주가 데리고 온 다섯 명은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형으로 인해 특별한 구석을 찾을 수 없던 자들이다.
“호오, 평범한 낭인이 아니었군.”
낭인(浪人)들이 모여 매검(賣劍)을 하는 곳이 낭시(浪市)였다. 하나 검총(劍塚)은 평범한 낭인이 아니라 저마다 경지를 이룬 자만이 자격을 증명한 후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오등검작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귀족들의 등급을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아 부궁주가 아끼는 자들일 터였다. 그 정도라면 뒤를 맡길 만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가세나.”
부궁주는 고개를 끄덕인 후 조장들에게 손짓을 했다.
“입구를 지켜라.”
“존명!”
네 명의 조장이 남아서 입 구(口)의 형태로 비석 주변을 지켰다. 그들은 노군동에 남은 자들과 달리 경박하지 않았다. 그저 검배에 손을 올린 채 전방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다.
하나 그저 보는 것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더라.
바람이 그랬다.
쉬이이이이잉-
한차례 돌풍이 몰아치는 순간 조장들은 찰나간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마치 온몸에 불이 붙은 듯한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이 생애 마지막 목격이었다.
퍼퍼퍼퍽!
이훤이 양 손으로 절혼지를 날리는 순간 네 명의 조장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절명했다.
“아홉 명.”
입구의 비석을 한차례 쓰다듬은 후 발을 들였다. 하지만 주원경에 주원경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는 자들이 보였다.
하나 이훤의 시선은 그들 너머의 구릉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망아취자가 들어갔던 폐관수련장의 입구는 산산조각 난 후였다.
이훤은 얼굴을 붉히며 일갈을 내질렀다.
“누가 내 집에 허락 없이 발을 들여!”
< 31, 화산(華山).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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