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화산(華山). >
31, 화산(華山).
회귀(回歸)의 장점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점은 결과를 안다는 점이다.
미래의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과거를 대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회귀 전 이훤은 화산의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눈과 귀를 닫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사건은 강호를 뒤흔들었기에 강제로 알게 됐다.
그 중 하나가 화산의 멸문(滅門)이다.
화산은 외적의 기습으로 인해 본산이 불탔을 만큼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일 년 정도 지났을 무렵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로 인해 멸문했다.
호사가들은 화산파가 끝났다고 떠들었다.
한데 그제야 도관의 존재 유무가 강호에 알려졌다.
첫 기습 때에도 도관의 도움으로 멸문의 위기를 넘겼다는 게다. 그러나 두 번째 기습은 도관의 힘만으로도 타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단다. 화산파는 살아남기 위해서 개파조사가 다른 도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문파로 태어났다.
당시 그들이 정한 이름이 바로 천여일지화산도문(天如一志華山道門)이다. 이름이야 우스웠지만, 단순한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 아래 만들어진 명칭이다.
게다가 명분도 충분했다.
도가의 조종이 노자(老子)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역사가 아니던가. 그때야 저들끼리 좋을 대로 정한다며 비웃은 것이 사실이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이훤은 백진관의 관주, 서평을 응시했다.
‘저 사람을 천여일지······. 젠장! 신화산파의 장문인으로 만들어야겠어.’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드는 건 복잡하다.
하나 될 일을 조금 앞당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화산파가 끝장나기 전에 시간만 조금 앞당기는 거야.’
이훤은 화산파의 역사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에게 있어서 화산파란 화산에 존재하는 세력 중 가장 큰 곳에 불과했다. 또한 반덕구의 존재가 아니라면 사적인 감정을 품을 이유조차 없는 문파였다.
관건은 저들을 납득하게 만드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한 지붕 아래로 모이라는 말에 찬동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터였다.
‘덕구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있다.
화산파를 부흥시키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아닌 말로 절대지경의 고수가 나타난다면 화산의 문도가 몇 명이든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 화산파는 오늘의 혈사로 인해 마지막 기력조차 잃은 상태였다.
‘학이 없으면 백 마리의 닭을 모은다.’
이훤은 장문인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장문인은 침묵했다.
갑작스럽게 혈사가 일어났고, 의지할 상대인 노군은 화산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니 공허한 복구와 재건을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저분들에게 의지하십시오.”
이훤은 도관의 관주들을 가리켰다.
장문인은 가타부타 없이 관주들만 바라봤다.
자존심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이 아닌 염치의 문제였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다가 위급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으랴.
“지금은 장문인이 아니십니까.”
이훤의 말에 장문인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식이 있다면 비슷했을 또래의 후학이 건네는 조언치고는 너무도 훌륭했다.
‘그래, 지금의 나는 도인이나 무인이 아닌 장문인이다.’
이훤이 생각에 잠긴 장문인에게 눈짓을 한 후 관주들을 향해 걸어갔다. 반덕구를 위해서 평소에 하지 않을 일을 참 많이도 하는 날이다.
“화산의 이훤이라고 합니다.”
평소와 달리 포권까지 했다.
백진관주 서평은 부상으로 인해 운기조식 중이다.
건장한 체구의 장진관주가 앞으로 나섰다.
“장진관의 청오자라고 합니다.”
장진관주는 손자뻘인 이훤에게 존대를 했다.
평소 성격과 달리 구명의 은인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나 보다.
“본의 아니게 듣자하니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은공은 어디에 계신 것인지······.”
아무래도 화산파가 아니라니 자신이 모르는 도관의 관주로 여기는 듯했다.
“아, 그것이...”
이훤이 잠시 말끝을 흐리는 사이 고천락이 불쑥 끼어들었다.
“저희 형님께서는 취선관에 계십니다.”
취선관(醉仙觀)이라는 명칭에 관주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하나 존재하지 않는 도관이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이훤은 슬쩍 고천락을 흘겨본 후 미소 지었다.
“낙안봉 위쪽에서 거주할 뿐입니다. 제대로 도관을 연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머무는 정도이니 모르시는 것이 당연하지요.”
술주정뱅이로 수십 년을 살았고, 회귀 이후에도 그렇게 살고 있다. 하나 보이는 것보다 두 배 이상을 살아온 사람으로서의 관록마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훤의 말에 관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넓고 넓은 화산에 이름 없이 수련하는 구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취선관이라 유가의 교리가 조금 섞인 듯하군요.”
관주들은 화산파의 문도보다 새로운 도관주의 등장을 반기는 듯했다. 그렇기에 저들끼리 취선관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대화를 주고받았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야?’
‘탈취관이라고 했는데 어감이 별로더라고요. 그렇다고 취마관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이훤의 책망하는 듯한 눈짓에 고천락은 당당한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된 이상 없던 취선관이라도 만들어야 할 상황이다. 하나 지금은 화산파와 도관들을 모으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크흠, 화산파 장문인께서 하실 말씀이 있답니다.”
장문인은 이훤이 만들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러 관주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예전의 일을 논해야 무엇하겠냐마는 일문의 장문인으로서 화산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들과 교류할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교묘하게 우리라는 테두리가 만들어졌다.
이훤은 슬쩍 발을 뺐다.
이제 화산파는 살아 남기 위해서, 여러 도관들은 이 기회에 화산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함께 할 터였다.
차후 망아취자를 설득하고, 저들에게 현실을 알린다면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화산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상황이 시급하니 잠시 도관을 닫겠소이다.”
“화산파로서는 여러 귀빈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본산의 모든 구역을 개방하겠습니다.
이훤은 멀찍이서 웃었다.
이제 본산은 불타지 않을 것이고, 화산파는 예전의 성세를 되찾으리라.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딛었지만, 하늘에 있을 반덕구에게 거드름을 피워본다.
‘하늘에서 실컷 내려다봐라.’
그러던 중 본산의 입구 쪽에서 뛰어오는 자가 보였다.
통통 튕기듯 구불구불한 길을 가볍게 헤쳐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신술에 제법 조예가 있는 듯했다.
‘누구지?’
용호관주가 의문을 풀어주었다.
“어! 상식이. 이제 온 거야? 다 끝났는데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기어왔느냐?”
그러면서도 장문인에게 황급히 달려온 사내를 소개해주는 것으로 보아 오랜 친우처럼 보였다.
“황법관의 관주입니다. 경전은 못 외워도 경신술에 대한 구결은 잘 외웠는지 제법 잘 뛰는 놈이지요.”
황법관주는 용호관주를 흘겨봤지만, 금세 뒤로 한 채 장진관주의 곁에 섰다.
“관주! 관주! 서악관의 관주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서악관의 이름은 낯설다.
하나 운기조식을 하던 서평이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도관주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은 사람인 듯했다.
“뭐라고? 그 분이 왜? 무공이 그리 높은 분께서 저런 잡배들에게 돌아가셨단 말인가? 물경과 아풍은 어디에서 뭘 한 거야?”
황법관주는 고개를 숙인 채 도리질을 쳤다.
“도관을 기습하는 놈들이 있기에 몇 놈 처리하고 서악관으로 갔습니다. 아무래도 그분 곁이 제일 안전할 것 같아서요. 한데 관주와 두 제자는 이미 절명했고, 적의 시신들만 남아 있더이다.”
“아.”
도관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장문인조차 서악관주의 명성을 알고 있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서악관주께서 귀천하셨으니 화산의 큰 도맥이 하나 끊긴 셈이로구나.”
누군가의 탄식은 망설이던 관주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비명과, 서군동, 양지관을 비롯해 본산에 모인 모든 관주들이 함께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심지어 본산에 모이지 못한 관주들을 찾아 설득하기로 약속까지 했다.
‘휴우, 누군지 모르지만, 죽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게 만드셨구려.’
세상을 살다 보면 지극히 어려운 일처럼 여겨지지만, 너무도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있다. 화산파와 도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도가의 교리를 숭상하고, 화산에 대한 애착이 충만했기에 이처럼 쉽게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역시 꽃은 매화고, 산은 화산이로다.’
이훤이 저 멀리 낙안봉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릴 때였다. 황법관주가 본산을 내려가려는 관주들을 만류하면서 경천동지할 말을 전했다.
“이곳의 적이 전부가 아닐세. 낙안봉 인근에서 기괴한 자들을 발견했어. 다행히 본산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 하지만 지금쯤 어디 있을지 모르니 개개인이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장문인은 황법관주의 말을 듣고, 문도들을 불러들였다.
“불을 밝히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라. 본산의 주요 전각의 출입구를 다시 살피고, 도학사와 하인들의 안위를 신경 써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훤은 낙안봉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장문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들리는 순간 이를 갈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복천적이 죽을 때 종사라는 별호와 혈천궁을 거론하지 않았던가. 그 이전에 애매는 죽는 그 순간까지 애난을 저주했다. 자신의 세력을 빼돌렸다며 반드시 죽여 달라고 애원까지 하지 않았던가.
‘천룡전은 신마의 깨달음을 모은다.’
그러니 애매 또한 복천적과 화청궁도를 통해 신마의 깨달음을 얻으려 했을 터였다. 하나 저들의 주인은 애매에서 애난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그리고 애매가 세력을 지녔다면 애난도 지녔을 것이 분명했다.
‘애난이 애매의 세력으로 화산을 공격하면 망아취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은신처에서 스스로 나선 망아취자를 애난의 주력으로 상대하는 건······.’
성동격서(聲東擊西).
한데 망아취자는 현재 폐관 중이다.
만에 하나 적이 주원경에 난입하는 순간 망아취자는 손도 쓰지 못하고 잡힐 것이 분명했다.
“이런 씨발!”
이훤의 두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순간 관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때 관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취선관주. 조금 전에 취선관이 낙안봉 위쪽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소?”
이훤은 그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땅을 박찼다.
쾅!
청석이 뭉개지면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훤은 먼지구름을 꼬리처럼 달고 허공으로 솟구친 채 낙안봉으로 질주했다.
*
혈천궁은 대규모 작전에 능했다.
그런 그들이 창룡령처럼 수비하기 좋은 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수뇌부 십여 명과 밀법대종사가 노군동으로 향했고, 백여 명의 무인들은 창룡령에 대기했다.
일 장 거리를 두고 한 명씩.
좁고, 미끄러운 창룡령 전체에 매복한 셈이다.
그러니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라면 창룡령을 무사히 지나칠 수 없으리라.
하나 잠시 후 창룡령의 좌우로 혈천궁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다.
퍼퍼퍼퍼퍼퍽!
< 31, 화산(華山).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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