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75화 (75/226)

< 30, 누가 화산의 제자래? (2) >

이훤은 복천적의 시신을 걷어찼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타격음이 들렸다. 그리고 복천적의 시신은 시체를 쌓아놓은 곳에 섞여 들었다.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시신을 모았다. 복천적의 뭉개진 얼굴도 다른 시신에 가려 자취를 감췄다.

하나 그가 원망하듯 내뱉었던 마지막 말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 네, 네가 어떻게 애매를 알아? 그러고 보니 종사와 혈천궁도 보이지 않아! 이 놈들이 다 짜고서 나를 속였어.

종사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하나 혈천궁(血闡宮)의 이름은 기억에 있다.

고천락이 훔쳐온 서찰을 통해 확인하지 않았던가.

빙령단의 제조법을 알아낸 북리혜가 빙궁의 후계자로 책봉됐고, 원래 유력했던 소궁주는 대막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그 소궁주의 외가가 혈천궁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때 빙궁과 혈천궁이 대립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새외가 시끄러울수록 중원은 조용했다

한데 새외의 한축이라 할 수 있는 혈천궁의 흔적이 발견된 게다. 화산을 공격한 복천적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회귀 전 혈천궁과 잠시 얽혔던 적이 있다.

취마의 이름으로 중원의 모든 술을 마음껏 탐닉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전설의 마유주(馬乳酒)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연하게도 대막으로 떠났다. 중원에도 말의 젖을 발효하여 만든 마유주가 존재했다. 하나 우윳빛이 아니었고, 투명한 백주의 일종일 뿐이다. 호기롭게 대막으로 떠났지만,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길을 헤매다 혈천궁을 만났으니 훈훈한 광경이 벌어졌을 리 만무했다.

싸우고, 또 싸웠다.

하나 이훤은 마유주를 얻지 못했고, 혈천궁을 멸문시킬 수도 없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그들을 모조리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다만 취마를 죽이겠다고 대대적으로 알린 혈천궁주가 창피를 당한 것에 만족할 따름이다.

‘혈천궁은 쉽지 않은데······.’

놈들은 그 자체로도 은밀하고, 끈질겼으며, 강인했다.

만약 화청궁도들이 먹은 잠력단까지 복용한다면 당금 화산의 힘으로는 버텨낼 도리가 없다.

“하아.”

한데 지금은 그것까지 염려할 상태가 아니었다.

이훤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체력이 바닥나거나, 내공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천적은 약을 먹고 일시적으로 강기를 발현했다. 초절정 고수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강기를 상대했지만,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약을 먹고 만들어낸 강기와 진정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강기가 같을 리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훤은 잠력단을 패착이라고 여겼다.

적은 힘을 얻는 대신 날카로움을 잃었다. 하수들끼리의 싸움이라면 모를까 문파와 전면전을 하기에는 오히려 악수(惡手)나 마찬가지였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하루 사이에 화산파를 도모하기 위해 최악의 선택을 한 셈이다. 아무래도 애매에 대한 복천적의 감정이 원인이었으리라.

강림혼요술에 대한 혐오감이 다시 피어났다.

‘더러운 새끼들.’

화산파는 그런 악적들에게 멸문당할 뻔했다.

이훤은 자신의 욕설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반덕구의 시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덕구야.’

그 때 이훤의 앞에 누군가 술병을 내밀었다.

뒤늦게 도착한 고천락이다.

녀석의 귀호영체술이 신묘하다고 해도 혈전의 틈바구니를 오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모든 것을 지켜본 녀석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형님, 마셔요.”

이훤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천락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는 바닥에 앉았다. 엉덩이가 축축해진 만큼 눈시울도 불거지는 듯했다.

그는 반덕구의 시신을 앞에 두고 술병을 기울였다.

화끈한 주향이 목구멍을 찢을 것처럼 불태웠다.

“하아.”

녀석, 아주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지금 상황에 잘 어울리는 술을 가져왔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한 숨 이후에 재차 술병을 기울였다.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화주였지만,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정리하기에는 제격이다.

쪼르륵-

반덕구의 시신 옆에 술을 뿌렸다.

그렇게 술 한 병을 비웠을 때 장문인이 곁에 다가왔다.

“비록 내가 덕구를 오래 보지는 못했지만, 선량하면서도 용감했소. 장차 정파 무림의 동량이 되어 많은 이들을 도왔을 아이였소. 내게는 사손이 되니 장례를 맡을까 하외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러세요.”

이훤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꾸했지만, 장문인은 개의치 않았다. 평소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위급 상황이고, 심지어 상대는 화산파를 구원한 은인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운을 뗐다.

“은공께서는 덕구와 어떤 관계인지······.”

이훤은 여전히 반덕구의 시신을 바라봤다.

명문정파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화산파 장문인이 다가왔지만, 지금은 오직 반덕구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회귀한 원인은 반덕구일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덕구의 얼굴이 처음보다 조금은 편해 보이는군요.”

장문인은 미간을 좁혔다.

하나 이훤의 말을 끊지 않았다.

“복수를 해줬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화산파가 무사하기 때문일까요?”

딱히 대답을 원하는 물음이 아닐 터였다.

하나 장문인은 헛기침을 했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화산의 장문인 정도 되는 사람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히 서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라면 아마 후자일 게요.”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으로 결심했다.

화산파와의 인연을 오늘로서 정리하기로 말이다.

이훤은 지금껏 여러 기연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바로 회귀였다.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기이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회귀해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아무리 좋게 봐도 이훤에게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늘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왜?

하나 이유라고는 오직 한 가지더라.

바로 반덕구였다.

그에게 빚진 만두 세 개를 갚고자 마음을 먹었고, 어쩌다보니 회귀한 셈이다.

만두 세 개를 떠올렸다고 회귀라니.

천하를 구원하거나,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해야 만두 세 개였다.

‘만약 너로 인해 내가 회귀를 했다면···.’

만두 세 개에 대한 빚은 무공을 가르쳐줬을 때가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서야 갚은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화산파를 지켜줬다. 그것으로 되었냐?’

이훤이 회귀 전부터 품고 있던 화산파에 대한 애증은 망아취자와 어울리면서 해소한지 오래였다. 화산파에 대한 미련도, 집착도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반덕구와의 인연도 오늘로 끝내려 했다.

남은 건 끝내는 방식이다.

이제는 반덕구로 인해 회귀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이유를 찾을 때까지라도 그렇게 하련다.

그러니 화산파와 헤어지는 방식 또한 회귀를 한 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베풂을 통해 진행할 것이다.

“저는 화산이 좋더이다.”

장문인은 영문 모를 대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고맙소이다.”

“장문인이 고마워하실 일은 아니지요. 저는 화산을 좋아합니다. 화산파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훤의 냉담한 눈빛에 장문인은 미간을 좁혔다.

한평생 화산과 화산파를 동일시했던 그였기에 이훤의 의중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흐음,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이 익은······.’

장문인은 피칠을 하고 있는 이훤을 유심히 살폈다.

피를 지우고, 머리카락을 정리하면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 확실했다. 게다가 상대가 입고 있는 옷은 찢어지고, 헤졌을 뿐 도가의 구도자들이 입는 종류였다. 그는 눈을 끔뻑이다가 이훤의 뒤쪽에서 멀뚱히 서 있는 청년을 바라봤다.

“어! 종남파의 제자.”

고천락을 떠올리는 순간 낙안봉 정상에서 암향표를 수련하던 사내가 생각나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면 너는 대사형의 제자가 아니더냐!”

장문인은 어찌나 놀랐던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슬픔에 젖어 힘없이 돌아다니던 화산문도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노군동주께서 제자를 들이셨다고?”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들이 몰려들었고, 살아남은 삼대제자들도 쭈뼛거리며 다가섰다. 부목을 대고 있던 이대제자 유건평이 이훤을 보고 말했다.

“그럴 리가요. 잠깐! 너는 이훤이 아니더냐?”

뒤이어 삼대제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어, 이훤이네.”

그 중에서는 반가운 사람도 있었다.

초도각에서 이훤에게 술을 대주던 사마충과 포대웅이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그러고 보니 정무관주 양통도 나서지 못할 뿐 싱글벙글 웃으며 이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장문인은 그제야 탄성을 흘렸다.

“아! 일전에 대사형의 술을 훔친 관도를 노군동으로 데리고 가셨다고 했지.”

“허허, 역시 대사형이시군요.”

“그분께서 화산을 살리셨습니다.”

하인으로 부릴 것이라 여겼는데 무공까지 가르쳤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평소였다면 배분의 문제나 출신과 자질을 탓했을 수도 있다. 하나 지금은 화산의 위난을 극복하게 만든 은인이 아니던가. 매화검주의 제자라면 화산의 부흥에 손을 보탤 것이니 이미 가족처럼 여기는 듯했다.

화산 곳곳에 펴져 있던 도관의 관주들도 뒤늦게나마 덕담을 나눴다.

“저렇게 대단한 무공을 지닌 자가 누굴까 궁금했소이다. 한데 매화검주의 제자라니 과연 대단하구려.”

“화산파가 쇠락했다고 하나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화산파의 발전을 빌겠소.”

평소에 내외한다지만, 뿌리는 같았다.

애당초 저마다 시조가 다르다지만, 도가의 조종은 누가 뭐라고 해도 노자가 아니던가.

장문인은 관주들의 인사에 예를 갖춰서 허리를 숙였다.

“평소에 따로 인사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큰 도움을 주셨으니 앞으로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별 말씀을 다하시는군요. 평소 견원처럼 지냈다고 해도 사마외도가 화산에 발을 들이는 꼴을 어찌 보겠소.”

덕담을 주고받으며 훈훈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하나 이훤의 한 마디는 혈겁을 잊으려는 사람들에게 다시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저는 화산파의 제자가 아닙니다.”

“뭐라고?”

유건평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하나 이훤은 담담했다.

“화산파에서 먹은 몇 그릇의 밥값은 모두 갚았으니 더 이상 은혜도, 원한도 없군요. 오늘은 노군과 덕구를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매화검주를 노군이라고 부르는 말에 화산의 문도들은 미간을 좁혔다.

하나 이훤은 여전히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적으로 의형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화산의 제자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네가 암향표를 익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낙안봉 정상에 만들어놨기에 따라해봤을 뿐입니다. 이미 노군도 알고 있고요.”

이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확하게 말씀드리지요. 저는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화산파에 입문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 때 고천락이 슬쩍 손을 들더니 말을 보탰다.

“사실 저도 종남파의 제자가 아닙니다.”

이훤은 말을 잇지 못하는 화산의 문도들을 둘려봤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관주들 사이에서 부축을 받고 있는 한 사내에게 꽂혔다.

‘일 년 후 화산은 멸문할 것이고, 살아 남은 자들은 곳곳에 퍼진 도관의 관주들과 힘을 합쳐 새로운 화산파를 재건하고자 한다.’

이훤은 반덕구를 위해서라도 화산파를 부흥시킬 셈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화산파가 아니라 화산의 모든 총화가 깃들 새로운 화산파였다.

이훤은 백진관주 서평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새로운 화산의 장문인.’

< 30, 누가 화산의 제자래?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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