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누가 화산의 제자래? >
30, 누가 화산의 제자래?
이훤은 본래 낙안봉으로 가려 했다.
화산에 대한 애증이 예전과 다르다지만, 우선순위를 고르자면 응당 망아취자였다. 그와 함께 술잔을 나누고, 시를 읊으며 매화를 구경하던 흥취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했다.
아, 물론 천공혈륜겁은 예외다.
그건 회귀 전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편의주의 적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화산에 들어선 이후 생각을 바꿨다.
이훤은 도관의 관주들이 점혈을 하거나, 버리고 간 궁도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연화봉으로 향했고, 낙안봉에 대하여 무지함을 확인했다.
이럴 거면 뭐하려고 화산을 습격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거기에 더하여 매화검주인 노군동주가 소요자와 함께 산서지부로 향했다는 정보도 전해 들었다. 이렇게 되면 화산의 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겸사겸사 화산의 상황을 확인하고자 했다.
상황이 영 심상치 않으면 어느 정도 도움도 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자신의 좋은 술친구인 망아취자에게 화산의 멸문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본산에 접근할수록 화산문도와 도학사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그에 비하여 적의 시신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러던 중 묘한 광경을 발견했다.
다른 곳과 달리 적의 시신이 세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나무에 기댄 채 숨진 화산문도는 도학사들을 구하려다가 힘이 다한 듯보였다. 복장은 삼대제자였고, 덩치는 매우 컸다. 순한 인상이지만, 온몸에 피칠을 한 것으로 보아 수십 번의 칼질을 당한 후 절명한 듯했다.
이훤은 그 앞에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시신을 들쳐 없고 뛰었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교차하던 두 다리가 뜀뛰기를 하듯 길게 벌어졌다. 이내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일 장 이상 튕기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천공혈륜겁이 극성으로 발현되는 순간 두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여기까지라면 평소와 같았지만, 거기에 더하여 단전의 내공까지 꿈틀거렸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이 갑자의 내공은 모공을 통해 흘러나왔다. 혈륜의 감화를 받은 내력이 핏빛으로 물드니 마치 붉은 안개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 때 복천적의 일갈이 들려왔다.
“크하하하하하! 애매, 어서 오시오!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이다!”
저런 미친놈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게다.
이훤의 신형은 빛살처럼 솟구쳤고, 한순간 본산의 입구를 관통하듯 질주했다. 그 와중에 길을 막아선 기천대주의 머리통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칠성에 이르렀으니 파륜권(破崙拳)은 이름처럼 산을 부술 듯한 기세로 기천대주의 머리통을 산산조각 냈다.
휘리리리리릭!
이훤은 화산장문인이 만들어 놓은 기름 불길 사이에 내려섰다. 귀화가 번뜩이는 가운데 발아래서 불길이 일렁이니 심약한 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터였다.
‘누구지?’
‘아군인가?’
‘기천대주를 한 방에 죽였어.’
‘도관의 관주 중에 저런 사람이 있던가?’
이훤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덩치 큰 청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다리에 기대어 눕게 만들었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얘 죽였냐?”
“······.”
“생기가 다하여 죽었지만, 치명상은 검이었다. 하나 근처에는 도를 쓰는 자들의 시신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
복천적은 미간을 좁혔다.
오라는 백매선자는 오지 않고, 낯선 자가 등장하여 시선을 사로잡았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다. 만약 기천대주를 한 방에 날려버린 무위가 아니었다면 벌써 수하들을 부려서 공격을 했으리라.
일단 정체부터 파악해야 했다.
“어디 소속이냐?”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이 놈이 누군 줄 알아?”
“모른다.”
“이 놈은 착해. 그리고 만두를 좋아해. 아! 술은 못 마셔. 내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르치려고 했는데 늦어버렸네. 그래도 열심히 했더라. 군살만 많은 돼지였는데 그래도 약 처먹은 너희들을 셋이나 데려갔더라고.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졌으면 녀석에게 진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늦어버렸다. 돌이킬 수 없게 됐어.”
복천적은 이훤의 정체를 확인하려도 죽은 청년의 신상만 전해 들어야 했다. 그가 짜증 섞인 일갈을 내지르려는 찰나 반대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어! 덕구야. 덕구잖아!”
화산파 문도 사이에서 장문인이 나섰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청년의 시신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훤의 눈치도 보지 않고, 청년 앞에 무릎 꿇었다.
“이 놈아! 종이 울리면 도망치라고 몇 번을 가르쳐주었더냐. 기껏 이름 모를 고인에게 절예를 배워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간단 말이더냐!”
이훤은 탄식했다.
장문인의 말처럼 죽은 청년은 반덕구였다.
그는 하산하기 전 천룡혈륜겁의 일부와 회귀 전의 깨달음을 더하여 반덕구에게 무공을 외우게 했다. 대충 뭉뚱그려 만든 무공이지만, 초도각의 관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했으리라. 그러니 본산에 오른 후 장문인의 눈에 들었을 터였다.
“녀석, 그래도 화산장문인에게 이름은 각인시켰구나.”
복천적은 경극의 슬픈 장면을 흉내내는 듯한 광경에 일갈을 내질렀다.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것이더냐? 어차피 너희들은 모두 죽어!”
이훤은 복천적의 경고에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주인 없는 검을 주웠다.
두 자루를 주운 후 검신의 중간부분을 후려쳐서 쪼개버렸다. 그는 반 토막 난 검을 양 손에 든 채 궁도들을 향해 선고했다.
“그래, 그냥 다 죽자.”
화르르륵!
혈륜을 끌어내는 순간 강렬한 기세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장문인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가 황급히 반덕구의 시신을 들쳐 업고 물러났다.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청년이다. 하아! 본파가 쇠락하여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무력하기 짝이 없구나.’
하나 허탈한 마음은 잠시였다.
이훤이 불길을 헤치며 내달리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저 청년은 누구란 말입니까?”
맹염채는 이훤과 함께 화북장을 다녀왔음에도 알아보지 못했다. 아닌 말로 두 눈의 귀화 때문에 다른 신체적 특징이나 얼굴을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엇!”
일대제자 중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이훤이 포위망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적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뭉쳤다. 한순간 이훤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적들이 빼곡하게 포위했다.
하나 궁도들 사이로 붉은 안개가 스멀거리더니 마치 굉천뢰가 폭발한 것처럼 굉음이 울렸다. 청석을 깔아놓은 연무장은 움푹 파였고, 그로 인해 솟구친 돌과 모래가 암기처럼 사방을 수놓았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장문인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일견하기에도 서른 명 남짓한 적이 피떡이 되어 튕겨나갔다. 땅바닥을 나뒹구는 자들 중 단 한 명도 숨을 쉬지 못했다. 조장과 대원을 구분하지 않고, 붉은 안개에 휘말린 순간 하나 같이 칠공에서 피를 쏟았다.
“덕구의 복수인 건가?”
장문인은 안력을 돋은 후에야 이훤의 공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으로 쪼개진 검은 지근거리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가볍게 손목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벨 수 있었다. 하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무력화된 적의 몸뚱이에 주먹까지 꽂아넣었다. 저렇게 되면 피부가 찢어지고, 살이 뭉개지며, 뼈가 으스러질 것이고, 나아가 혈맥을 짖이겨버릴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적은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갈 수밖에 없다.
반덕구가 죽었을 때처럼 적을 죽이고 있는 게다.
“우열이나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마치 배부른 호랑이가 쥐떼를 짓밟듯 능욕하고 있는 상태였다.
“후우.”
장문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외쳤다.
“반덕구는 화산의 제자다. 복수를 하더라도 우리가 한다. 화산의 문도들과 도학사들이 무수하게 죽어갔으니 저들에게 피값을 받아내야겠다!”
화산파는 도문(道門) 계열이지만, 속세의 끈도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은원(恩怨)에 대처하는 모습 또한 집착이라고 느껴질 만큼 끈질겼다. 한 때 고금제일이라 불리던 신마에게 사제의 목숨 값을 받겠다고, 문파가 쇠락하는 것까지 감수하지 않았던가.
“쳐라! 단 한 놈도 화산을 내려가게 두지 마라!”
장문인의 일갈이 터져나오는 순간 화산의 문도들은 잠깐의 휴식으로 채워 넣은 활력을 아낌없이 방출했다. 포위망에 갇혀서 수세에 몰렸던 도관의 관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앞장서겠네!”
도가 계열의 무공을 익혔음에도 외공에 큰 성과를 이룬 장진관주가 터질 듯한 근육을 앞세워 적을 밀어붙였다.
“진박노조의 구 대손인 용호관의 관주, 척발영이다!”
“흥! 관윤자의 도맥이 살아있거늘 감히 사마외도가 화산에 발을 들여!”
퍼퍼퍼퍼퍼퍽!
이훤이 맹수처럼 날뛰고 있으니 적들의 기세도 한 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훤은 절반 이상의 궁도를 자신 쪽으로 끌어오지 않았던가. 화산파와 도관주들이 운신할 수 있을 만큼 공간이 열렸다.
“막아라! 다 죽여라!”
복천적은 목이 찢어져라 외쳤지만, 이미 칼자루는 화산 쪽으로 넘어갔다.
특히 이훤은 광기를 발산하듯 화청궁도를 짓이겼다.
죽은 놈의 아랫배를 걷어차서 터트리는 것은 대수였고, 등을 보이며 도망치려는 놈을 굳이 쫓아가 팔다리를 잘랐다. 이제야 매혼단의 약효가 떨어지는지 몇몇 놈들은 발작을 하듯 토악질을 했다.
쉽게 죽여서는 아니 된다.
이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새끼는 인간처럼 죽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배웠다.
푹푹푹푹!
“꺼어”
허물어지는 놈의 두 다리를 벤 후 적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곧장 내달려 다섯 명을 뭉쳐놓은 후 백여 번의 칼질을 했다.
자르고, 찌르고, 으스러트렸다.
경천대주와 염천대주는 이미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훤은 복천적의 좌우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부러진 검을 던졌다. 비록 이기어검에는 미치지 못하나 칠 성의 천공혈륜겁이라면 물방울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땅!
두 대주는 정혼단의 위력을 빌려 검을 튕겨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자세가 무너졌고, 붉은 안개가 휘몰아치면서 아랫배에 구멍을 뚫었다.
복천적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순간 이훤의 신형이 둘로 갈라지는 듯하더니 대주 두 명이 동시에 죽어버렸다. 분명 선후는 있었으나, 명확하게 어느 쪽이 먼저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너, 너!”
이훤은 어느 정도 장내가 정리된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피에 절어서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후 복천적 앞에 섰다.
“누구냐?”
복천적의 물음에 잊고 있었던 옛이름이 흘러나왔다.
“광야제.”
취마의 역린을 건드리면 나온다는 광야제(狂夜帝).
회귀 이후에는 회귀 전만큼 효과를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복천적의 두려움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놈!”
놈의 검에서 강기가 솟구쳤고, 공간을 찢어발겼다.
검강이 일렁일 때마다 주변은 폐허가 됐다.
하나 십여 초가 흐른 후 복천적은 피를 토했고, 다시 삼 초가 흐른 후에는 검을 놓쳤다. 그렇게 이십여 초를 상대한 후 복천적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무릎을 꿇었다.
“으으, 백매, 백매선자를······.”
이훤은 죽어가는 복천적 앞에 쪼그려앉았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새끼들은 편안한 죽음조차 사치였다.
그는 복천적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애매, 그 씨발년이 홀딱 벗고 모산파의 도사 놈이랑 붙어먹었더라. 그래서 내가 전신의 뼈를 잘근잘근 으깨버린 후에 불태워버렸어. 잘했지?”
“네, 네가 어떻게 애매를······.”
복천적은 이훤이 애매를 거론하는 순간 믿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눈이 좌절과 분노, 치욕으로 물들어가는 가운데 이훤의 수도가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콰직!
< 30, 누가 화산의 제자래?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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