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화산의 괴물들. (3) >
*
데엥-
화산파의 문도들은 본산의 종이 울리는 순간 잠시 넋을 놓았다. 지난 백 년 간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종소리였다. 잠시 눈을 끔뻑인 후에야 피난을 위한 종소리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하인들은 빠르게 진무궁 뒤편의 동굴로 도망쳤다.
하나 도학사들은 경전을 챙기고, 그 동안 집필했던 문건을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화산의 무인들은 그런 도학사들을 지키느라 등을 보여야 했다.
쇄애애액!
매혼단을 먹은 경천대의 대원 세 명이 기척 없이 달려들었다. 초도각 진무관 출신으로 올해 본산에 입적한 삼대제자는 그들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푹! 푹! 푹!
청운의 꿈을 안고 화산에 올랐거늘 일 년도 채우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를 적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경천대원들은 도학사마저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인 후 눈빛을 교환했다.
“진무관으로 집결한다!”
“존명!”
화산 곳곳에서 피바람이 부는 와중에도 진무궁 앞은 인산인해였다. 수레를 끌고 온 도학사를 별채로 안내하고, 사방에 불을 밝혀 적의 기습에 대비했다.
“장문 사형!”
화산장문인은 일대제자들의 수를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무림맹에 파견했거나, 강호행을 하고 있는 사제들을 제외하면 총 열아홉 명이 모여야 했다.
한데 열일곱 명을 끝으로 더 이상 인기척이 없다.
이대제자는 더욱 심했다.
오십 명에 이르던 이대제자 중 진무궁 앞에 모인 건 서른 명을 조금 넘길 정도였다.
“큰일이다. 대사형께서 화산을 비우셨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일대제장 일곱 째인 맹염채가 어둠을 노려보며 말했다.
“화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도관만 해도 백여 개가 넘습니다. 그 중 장문 사형도 아시다시피······.”
장문인은 맹염채의 말을 끊었다.
“오랫동안 내외한 사이가 아닌가. 그분들이 돕겠다고 나서면 고마운 일이고, 모른 척해도 원망할 일은 아니다. 작금의 위기는 본파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화무십이검진을 준비하게. 백유검과 홍란검을 익힌 이대제자들을 짝지어 좌우를 대비케 하도록.”
“알겠습니다.”
맹염채가 물러간 후 화산의 정보를 관장하는 만무각의 각주가 고개를 숙였다.
“장문 사형,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게.”
“제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외적에게 화산을 허락했으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장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비단 자네의 문제겠는가? 대사형께서 며칠 전 강호의 위기를 경고하셨네. 하나 우리는 진무궁에 모여 회의만 했을 뿐 화산의 경계를 소홀히 했어.”
그는 장탄식을 흘렸다.
“후우,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면 자리를 내어놓고, 폐관을 자청하여 조사전에서 기거할 생각이야.”
“사형!”
“쉿! 온다.”
장문인은 검을 뽑았다.
맹염채는 슬쩍 고개를 돌려 준비가 다 되었음을 고했다.
장문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적이 온다. 예를 갖추며 검을 맞대고, 도를 행하며 휘두르는 우리와 다른 적이 오고 있다. 너희들에게 문파의 건물을 지키고, 전통을 수호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그저 매화만 떠올려라. 매화는 초겨울에 피고, 한풍과 폭설에도 고아한 정취를 발산한다. 너희가 매화라면 저들은 한풍과 폭설이다. 매화는 결코 꺾이지 않으니 따스한 날이 찾아올 때까지 이겨낼 수 있으리라.”
솨아아아아-
그가 내뻗은 검을 중심으로 자색의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소림의 사자후에 뒤지지 않는 경천후(驚天喉)가 터져 나왔다.
“불을 밝혀라!”
삼대제자 십여 명이 화시를 날렸다.
그리고 그것은 진무궁의 경계 너머로 날아가 청석에 꽂혔고, 동시에 뿌려놓은 기름이 타올랐다.
화르르르르르륵!
장문인은 미간을 좁혔다.
어둠의 장막이 걷히고, 불길 사이로 이백 명의 적이 등장했다. 적은 반구 형태로 포위망을 구성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 장문인은 적의 인원보다 기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백 명 모두가 혈안이야. 잠력단이라도 먹은 건가?’
정파가 사마외도와 대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천륜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실혼인이나 강시, 금용병기, 잠력단 따위는 모두 사마외도의 전유물이었다.
‘오늘 일진이 그리 좋지는 않겠구나.’
맹염채는 장문인의 눈짓을 받고, 화무십이검진(華霧十二劍陣)을 반구형으로 변형했다. 또한 각기 백유검(白柳劍)과 홍란검(紅亂劍)을 익힌 제자들의 어깨에 홍백의 띠를 엮어주었다. 장문인은 준비를 끝낸 후 화무십이검진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축이 되어 검진을 운용하겠다.”
열두 명의 이대제자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적의 무리에서 코웃음이 들려왔다.
“유언은 이제 다 남겼느냐? 세상 사람들이 구파를 강호의 중심이라고 하기에 어느 정도인가 늘 궁금했다. 한데 고작해야 중소방파와 다르지 않으니 조만간 천하를 쟁패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드는구나!”
금검노호 복천적은 쉼 없이 비아냥거렸다.
장문인은 낯선 장년인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흘러나오지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전면전을 원하는가 보오. 그렇다면 이름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겠소?”
복천적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예상 외로 순순히 대꾸했다.
“청해의 복천적이다.”
장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만무각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청해쌍괴임을 장문인에게 알리자, 의아함은 배가 됐다.
“청해쌍괴가 어째서 화산파를?”
복천적은 입꼬리를 올리며 외쳤다.
“그녀에게 화산을 바치러 왔다! 쳐라!”
화청궁의 궁도들은 조심스럽게 산을 올랐던 것과 달리 맹렬한 기세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매혼단을 복용하는 순간 활력이 폭발했다. 당장이라도 몸속을 가득 채운 힘을 발산하고 싶을 터였다.
“막아라! 진무궁만은 허락해서는 아니 된다!”
장문인은 기세 좋게 일갈을 내질렀지만, 적의 진형을 향해 돌진하지 못했다. 머릿수가 열세였고, 잠력단을 먹은 자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화산의 제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이대제자라고 해도 삼 할 이상이 산에서만 지낸 상태였다.
터터텅!
자색 검기가 핏빛 혈기와 얽히는 순간 폭발했다.
장문인은 상대를 날려버렸지만, 웃을 수 없었다. 일견하기에도 일반 대원의 복장을 하고 있지 않던가. 심지어 적의 조장급 무인들은 화무십이검진을 당장이라도 부술 것처럼 두들겼다.
채채채채채채챙!
복천적은 폭소를 터트리며 장문인을 손가락질 했다.
“크하하! 그 정도의 무위로 구파라고 자랑을 했던가? 우습구나! 우스워. 앞으로 화산파라 하지 말고, 정와파라고 부르거라!”
우물 안 개구리라고 비웃었지만, 맞상대할 여유도 없었다.
장문인은 황급히 검진 쪽으로 이동해 조장 급 무인들을 밀어냈다. 그 옆을 일대제자들이 줄지어 뭉치는 순간 찰나간 적의 진형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한 차례 적의 기세가 덩어리가 되어 폭발했다.
“버텨라!”
장문인은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검진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백유검과 홍란검을 익힌 제자들은 합공하여 수월하게 적의 목을 쳤다. 하지만 한 명을 베면, 두 명이 달려들었고, 그 뒤에 네 명이 뭉쳐 있었다.
“으악!”
삼대제자는 적의 손쉬운 요리감이다.
핏빛 기운이 공간을 베는 순간 거리를 조절할 수 없었던 삼대제자들은 일격도 버티지 못한 채 쓰러졌다.
“당장 삼대는 물러나고, 이대가 좌우를 받쳐라. 사제들이 나서게!”
장문인의 일갈에 일대제자들이 전면에 방벽을 세웠다.
그 순간 잠시나마 적의 비명이 연이어 들려왔다. 초절정에 미치지는 못하나, 오랜 세월 절정의 고수로 상승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화청궁의 대원 급은 일격을 버티지 못했고, 조장 급이나 되어야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나 복천적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아직도 잠력단은 반 시진 이상 운용이 가능했다.
‘흥! 한 번만 뚫리면 저들은 서로를 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한 명씩 포위하여 척살할 수 있을 것이고, 화산의 멸문은 기정사실이었다.
일대제자가 전방을 맡아줬기에 이대제자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한 사형제의 죽음에 슬퍼할 여유도 없이 검을 휘둘러야 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 중 유건평은 사형제들 사이에서도 꽤 오랜 시간 강호를 종횡했다. 별호가 없는 사형제들이 대다수인 가운데 홀로 돋보였을 정도였다.
그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적을 노려봤다.
적의 무위를 보면 잠력단을 먹은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잠력단까지 먹고 화산을 공격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본파의 비급을 노리는 것 치고는 너무 과하다.’
결국 복천적이 처음 외쳤던 것처럼 여인을 위해 화산을 공격했다는 결론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머리를 친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목적을 사제에게 전했다.
“사형, 위험합니다.”
“적은 지금 방심하고 있고, 적의 수괴는 홀로 동떨어져 있다. 지금이 기회야.”
사제는 유건평의 소매를 잡으며 말렸다.
“하나 청해쌍괴라고 했습니다. 청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고요.”
유건평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한다.”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제가 백유검을 익혔으니 사형의 보조를 하겠습니다.”
“좋다. 가자.”
두 사람은 은밀하게 횃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무궁의 앞마당에는 횃불이 가득했고, 적의 진형에는 기름으로 만들어낸 불길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일단 어둠에 몸을 숨기니 적의 뒤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쇄애애액!
유건평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적의 뒤를 공격했다. 복천적의 등이 훤히 드러난 상태에서 검 끝은 요혈을 노렸다.
“흥!”
하나 복천적은 이미 정혼단을 복용하고, 초절정의 경지를 상회할 만큼 무공이 상승하지 않았던가. 그는 허리를 슬쩍 숙이며 검지와 중지로 불길에서 불씨를 뽑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유건평에게 튕기면서 좌수로 검을 뽑았다.
반면 유건평은 불씨가 암기처럼 쇄도했지만, 피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목숨을 도외시한 채로 적과의 양패구사를 노린 게다. 다행히 뒤따르던 사제가 불씨를 향해 검을 휘저었다.
“정파 놈들이란 늘 그렇지!”
복천적은 검을 휘돌려 가볍게 유건평을 튕겨냈다.
가볍게 내지른 검격 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했고, 뒤이은 공세에는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너부터 죽어라!”
핏빛 광채가 일렁이는 순간 사제의 손목이 날아갔다.
유건평이 황급히 사제의 뒷목을 당기지 않았더라면 팔 전체가 잘려나갈 뻔했다. 하나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나뒹구는 순간 복천적의 검에서 강기가 솟구쳤다.
솨아아아아아!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철봉이 공간을 찢어발기듯 꽂혀들었다.
쩡!
마의를 입은 장년인은 철봉을 던진 후 주먹을 쥐었지만,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클클, 도관에 있던 놈이냐? 기다려! 이 놈들부터 죽인 후 없애주마!”
하나 복천적이 몸을 돌렸을 때에는 화려한 도복을 입은 장년인이 두 사람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장진관주와 농을 주고받던 진박노조의 후예인 용호관주였다.
그는 유건평에 한쪽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자네, 나한테 신세진 걸세.”
“그 빚, 나도 지워야겠다!”
장진관주가 허공에서 포탄처럼 내리꽂혔다.
그는 소림의 외공을 익힌 나한처럼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여 있는 힘껏 장력을 내질렀다. 그 순간 화청궁의 대원은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장진관주를 필두로 어둠 속에서 각양각색의 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산파의 상황이 사상누각인 가운데 누란지위에 처했으니 호풍환우의 상징이자, 태상노군의 적자인 풍우관에서 십시일반하여 위기를 타파하도록 할 생각이외다.”
잘 차려입은 문사가 어려운 말만 골라서 떠들더니 대뜸 철적을 던졌고, 하반신에 홑옷만 걸친 삐쩍 마른 노인이 장창을 휘돌렸다. 부채질을 하는 자와 쌍검을 쓰는 자가 뒤이었으며, 멀리서 콩알만한 철구를 튕겨내는 자도 있었다. 그 중 발군이라면 응당 백진관의 관주인 서평이다. 그가 비검술을 펼칠 때마다 잠력단까지 복용한 대원들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으아악!”
“뒤에도 적이 있다!”
화청궁도들의 대형이 금세 어지러워졌다.
장문인은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저들 중 대부분은 위치와 이름도 알지 못하는 화산의 고인들이 아니던가.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 병신 같은 것들이 드디어 모두 모였구나!”
복천적이 광소를 터트리는 순간 숲속에서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개떼처럼 달려왔다. 그는 본산에 오르면서 도관의 관주들을 염두에 뒀다. 그렇기에 대주들과 무공이 크게 증진된 오십여 명을 따로 빼둔 상태였다. 그들이 합류하는 순간 도관의 관주들은 한순간 포위망에 갇혀서 위기에 처했다.
“진무궁 쪽에 합류해야 합니다!”
서평의 외침에 관주들이 호응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잠력단의 특징 상 파국으로 치달을수록 위력을 더했다. 죽기 직전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회광반조의 현상처럼 잠력단의 효용이 바닥날 즈음이 가장 강력할 때였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복천적의 일갈에 다시 한 번 혈전이 일어났다.
장문인은 진무궁의 수호를 포기했다.
이렇게 된 이상 관주들과 합류하는 것만이 활로(活路)임을 직감한 것이다. 적들 또한 그것을 알기에 목숨을 도외시 한 채 무기를 휘둘렀다.
채채채채채채챙!
일대제자가 쓰러지고, 적의 조장급이 절명했다.
다행히 백진관주 서평의 검에 경천대주의 목이 잘렸다. 하나 기천대주와 염천대주의 협공에 서평은 옆구리를 베인 채 물러서야 했다.
복천적은 연화봉 정상에 드리워진 피 냄새를 맡으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애매, 어서 오시오!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소이다!”
화산장문인은 기천대주의 검을 밀어낸 후 인상을 썼다. 본산의 입구 너머에서 복천적의 외침에 호응하듯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맙소사! 적이 더 늘다니······.”
마치 붉은 안개가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 중에서도 눈이 있어야 할 곳에서 번뜩이는 붉은 안광은 마치 귀화(鬼火)처럼 타올랐다. 장문인의 검 끝이 허망함으로 인해 땅을 가리키려는 순간이었다.
붉은 안개가 난입하더니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비켜! 이 새끼야!”
동시에 기천대주의 머리가 호박처럼 박살나며 사방에 피를 흩뿌렸다.
< 29, 화산의 괴물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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