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71화 (71/226)

< 29, 화산의 괴물들. >

29, 화산의 괴물들.

구파오가는 정파 무림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어느 한 방파가 몰락하면 다른 방파가 빈 자리를 채웠다. 그러다 보니 구파오가는 끊임없이 세를 불리는 것이 가능했다. 유능한 이들이 알아서 찾아오니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었다. 오가의 으뜸이라는 남궁세가의 경우 가솔만 천 명에 가까웠고, 혈연으로 묶인 방계들까지 더하면 오천 명에 이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아닌 말로 남궁백검(南宮百劍)라는 말은 남궁세가에 속한 백 개의 방파를 의미했다. 오가보다는 덜했지만, 구파 역시 제자를 수급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구파 중 가장 융성함을 자랑하는 무당파의 경우 자소궁에만 이백 명이 머물렀고, 본산에 있는 제자들만 따져도 천여 명에 육박했다.

하나 예외가 바로 화산파였다.

화산파의 명성이 소림과 무당에 비견할 정도가 아니었다면 이미 구파에서 밀려났을 것이다. 그러나 구파에 속했다고 해도 쇠락했음이 알려졌기에 화산파는 비탈길을 구르는 수레처럼 점점 파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거 확실해?”

금검노호(金劍老豪) 복천적은 화산파를 감시하던 수하에게서 건네받은 보고서를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까지 취합했습니다.”

“아무리 쇠락했다고는 하나 화산파의 문도가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복천적에게 보고서를 건네받은 사대의 수장들도 헛웃음을 지었다.

“일흔네 명이라니. 저 크고, 넓은 화산에 무공을 익힌 자고 고작해야 일흔네 명이란 말인가?”

“최근 삼대제자 스무 명을 받아들였지만, 절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태반입니다. 하여 일대제자와 이대제자만 선별해서 정리했습니다.”

“클클, 그래도 하인의 숫자는 이백 명이 넘는군. 거기에 더하여 경전을 공부하는 구도자까지 합하면 오백 명 가까이 되지 않소이까.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떵떵 거리기에는 충분하지.”

기천대주의 조롱에 복천적이 이를 갈았다.

“웃지 마. 놀러온 것 아니다. 우리가 정녕 손쉽게 화산을 점령하고자 했으면 놈들이 하산했을 때를 노렸겠지. 하지만 우리는 놈들이 모여 있는 곳을 칠 것이다!”

야밤에 기습을 준비하면서도 당당하기만 했다.

복천적이 턱짓을 하며 물었다

“길을 잡아놨겠지?”

수하가 스무 명의 길잡이 불러 모았다.

“눈을 감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숙달된 녀석들입니다.”

애매, 즉 백매선자는 수 년 전부터 화산을 목표로 정했다. 천룡전의 수장인 천룡은 당시 신마의 깨달음을 들었던 자들의 신상내력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수하들은 입맛에 맞는 지역으로 흩어졌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상대를 공략하려 했다.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애매는 실혼인을 택했고, 오래 전부터 수하들을 화산 주변에 깔아뒀다. 농사를 짓는 자도 있고, 장사를 하는 자도 있으며, 화산에 생필품을 대는 자도 있으리라.

강림혼요술이 있는 이상 배신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성공을 자신했고, 자신감은 수하들에게도 전해진 상태였다.

복천적은 숨을 가다듬었다.

‘지금쯤 애매가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이 때 그녀에게 완벽한 성공을 안겨준다면······.’

그녀를 품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입꼬리가 절로 치솟았다.

“이제 곧 삼경이다. 달이 중천에 걸릴 때 둘로 나뉘어 산을 오른다.”

복천적은 기천대, 경천대와 함께 정면으로 산문을 통과하고자 했다. 비록 몰래 숨어들어야 하지만, 산문을 통과했다는 명분을 얻고 싶었다.

오직 애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저희는 놈들의 수련관을 지나 금지인 서현동 쪽에서 진입하겠습니다.”

“신호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대주들이 품에서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호각을 꺼냈다.

호각 소리가 늑대의 울음과 같으니 화산파 문도들도 적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할 터였다.

그 때 정찰을 나섰던 수하가 회음현에서 돌아왔다.

“급보입니다.”

복천적은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클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군. 들어라. 매화검주가 하산했다. 놈들이 화청궁을 도모하기 위해 산서지부와 협력을 하려 했단다. 하나 산서지부가 움직이지 않았어.”

“하하! 매화검주라면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는 자가 아닙니까? 그런 자가 지부장과 독대를 하기 위해 지부로 갔다는 거군요.”

구파오가의 장로만 하더라도 지부장과 독대가 가능했다.

각파의 제일이라 불리는 자들이라면 지부장을 호출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한데 화산파는 매화검주가 직접 나섰으니 문파의 쇠락을 반증하는 모습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이 우리를 돕는군요. 그들이 산서지부와 논의하는 사이 화산파는 잿더미가 될 것입니다. 매화검주가 돌아왔을 때 불탄 본산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요.”

복천적은 코웃음을 치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흥! 생각해 봐라. 화산은 이름값으로 구파에 속했을 뿐이야. 강호의 법도는 오직 하나, 강자존임을 그들에게 새겨줘라. 오늘 우리가 화산파를 구파에서 끌어내린다!”

사백 명의 무인들이 눈을 빛냈다.

*

약속의 시간이 도래했다.

화청궁의 복천적을 비롯해 경천대, 기천대, 염천대, 화천대의 무인들이 좌우로 나뉘어 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숲으로 스며들어간 후 어둠에 몸을 숨겼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복천적이 계획대로 움직였으니 돌아가자.”

혈천궁의 궁도들은 이미 복천적과 수하들의 집결지까지 확인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경공까지 펼치며 반대편으로 향했다. 화산의 산세는 여산과 종남에 이어질 정도였고, 섬서성 전체를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일각 쯤 이동한 것만으로도 수풀로 우거진 자그마한 구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고합니다. 복천적과 휘하 수하들이 움직였습니다.”

보고를 받는 자의 복색은 특이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런 옷을 뒤집어썼고, 복면으로 인해 눈만 내어놓은 상태였다. 또한 옷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온 몸을 밧줄로 묶었다. 한 마디로 사람을 면포에 싸놓은 듯한 기이한 복장이다. 다만 가슴에 새겨진 두 글자가 그들의 소속을 나타냈다.

복면인은 혈천(血闡)이라 수놓은 문양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모래를 잔뜩 삼킨 듯한 텁텁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준비해라.”

혈천궁의 부궁주는 백여 명의 궁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의 곁으로 피부가 유달리 흰 청년이 다가왔다.

“숙부! 저도 준비가 다 됐습니다.”

부궁주의 시선이 청년에게 향했다.

“화나지 않더냐?”

“무슨 말씀인지요?”

“네 어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빙궁으로 갔어야 할 우리다. 한데 천 리 밖 화산파를 도모하고자, 이렇게 떠나왔으니 네가 화를 낸다고 해도 이해한다.”

청년의 이름은 북리청으로 불과 반 년 전까지만 해도 북해빙궁의 소궁주이자, 차기 궁주라 불렸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북리혜에게 밀려나 쫓기듯 대막으로 도망쳐야 했다.

북리청은 북리혜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년에게 빙령단의 단서를 준 것이 화산의 제자라지요? 어차피 그냥 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차라리 천룡전에 은혜를 입히고, 빙궁을 도모할 때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이득이 아니겠습니까?”

부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큰 마음을 지녔구나. 큰 사람이 되었어. 네 말이 옳다. 하나 천룡전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면 안 된다. 그들은 깊게 얽혀서 좋을 것이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북리청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숙부를 안심시켰다.

하나 속으로는 부궁주를 겁쟁이이라고 여겼으며 천룡전과의 관계를 더욱더 진전시키고자 마음을 먹었다.

“가족 간의 대화는 끝냈는가?”

놀러 나온 사람처럼 유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흑의인이 혈천궁에 보낸 밀법대종사였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에도 엄청난 존재감을 보이며 부궁주에게 다가왔다.

“종사께서도 슬슬 움직이시면 될 듯합니다.”

“클클, 어차피 복천적을 미끼로 던질 것이니 위험할 것도 없네. 올라가다가 심심하면 복천적의 수하들도 좀 죽이고 그러시게나.”

“그러지요.”

부궁주는 말없이 화산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막에서도 열흘 동안 움직이지 않고 먹잇감을 기다릴 만큼 인내하던 살귀들이 하나둘 씩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매화검주가 없다면 화산의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북리청은 부궁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은 이미 화산이 아니라 빙궁을 향하고 있었다.

*

노군은 이훤에게 개미굴의 비사를 전해들은 후 장문인과 독대를 했다. 그리고 일대제자들을 모아 강호에 큰 환란이 도래할 것이니 준비하도록 경고까지 해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무림맹 섬서지부로 향하는 중이다.

“백도가 득세하여 강호가 평안해졌다지만, 도리는 오히려 쇠퇴한 듯합니다. 어찌 강호의 위기를 논하자는 말에 직접 오라고 대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초도각의 각주를 맡았던 소요자는 마차 안에서 한 숨을 내쉬었다. 반면 노군은 매화검주의 신분이면서도 소탈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되었다. 본파가 쇠락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잖아. 이렇게 된 것은 본산을 떠났던 내 책임도 있다. 그래서 직접 가는 것이야. 노부가 직접 간다면 지부장도 허투루 대할 수 없겠지.”

“저 때문에 검주께서 마차를 타셔야 하니 송구하기만 합니다.”

노군은 이대제자인 소요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의협과 법도를 논하려면 도학자인 네가 있어야 설득하기 쉬울 것이야.”

소요자는 억지웃음을 지으면서도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시설이 하수상하지 않습니까. 화산의 제일검께서 하산하셨으니 본산에 별 일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노군은 웃었다.

이훤이 하산했고, 망아취자는 폐관 중이다.

그러니 적들이 헤아린 것처럼 화산 내에서 무공을 익힌 자는 백여 명도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노군이 보기에 믿고 등을 맡길만한 제자는 서른 명 정도에 불과했다.

하나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껏 맹에서는 몇 번이나 본파를 구파에서 제외하려고 회의를 열었다. 구파에 속하지 못했으나, 전통 있는 방파들이 돈을 쓰고, 사람을 얻어서 밀어붙였지만 모두 기각됐지.”

소요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껏 화산의 위세가 쇠락했다지만, 명성만은 그대로라고 여겼다. 그렇기에 무림맹 내에서 화산의 제외를 논의했다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행히 본파의 명성이 아직 빛이 바래지 않았군요.”

노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퇴색됐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말이야. 하나 몇몇은 잊지 않고 있을 게다.”

소요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군은 옛 이야기를 하듯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화산에 괴물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괴물이라니요!”

웃으면서 말하기에는 너무도 부정적인 내용이다.

“본파의 시조가 누구였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안다면 감히 화산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

복천적의 명령을 받은 염천대와 화천대는 초도각 방면으로 잠입 중이다. 두 명의 대주는 화산의 문도를 한 명도 놓치지 않기 위해 수하들을 나눴다. 스무 명을 한 조로 하여 그물을 펼치듯 쓸면서 올라갈 계획인 게다.

염천대의 삼조는 적인종이라는 자로 완숙한 절정의 무인이다. 십 년 전 다툼이 있던 중소방파를 멸문시키고 도주하여 화청궁에 의탁했다.

“눈 똑바로 떠라.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인다!”

그는 자신의 무위에 비하여 화청궁의 대접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눈도장을 찍어서 복천적의 심복이 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숲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으니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본산으로 가는 길목이니 화산의 문도가 있겠군!’

그는 수하들에게 손짓하여 숲을 헤쳐 나갔다.

잠시 후 폐가처럼 보이는 작은 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때마침 중년의 사내가 낡은 마의를 입고 달빛에 의지하여 독경(讀經)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갑작스런 외인의 등장에도 평온한 눈빛을 내비쳤다.

“이곳은 백진 도관의 영역이외다.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적인종은 사내가 도경을 읽는 것을 보고 화산의 문도라고 확신했다.

“화산파의 문도구나. 클클, 내 검에는 눈이 없으니 원망을 하려거든 화산파를 원망하려무나.”

사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화산파는 이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가야 하오.”

적인종은 미간을 좁혔다.

화산의 문도가 칼을 든자들에게 사문의 위치를 알려줄 리 없지 않은가.

“너 뭐야?”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경전을 덮었다.

“나는 관윤자의 법통을 이은 백진 도장의 십칠대 제자로 백진관의 관주를 맡고 있는 서평이외다. 물론 화산의 시조가 학대통이라고 주장하는 화산파와는 교류를 하지 않소.”

적인종은 코웃음을 쳤다.

“흥! 먹물을 먹은 새끼들은 말을 다 어렵게 하는 재주부터 배우는 건가? 죽여라!”

수하들이 포위망을 좁히자, 서평은 혀를 차며 말했다.

“화산파조차 백진관을 건드리지 못하거늘······.”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나무에 기대어놓았던 검이 저절로 허공을 날았다.

쇄애애애애액-

적인종은 눈을 서너 번 정도 깜빡였다.

그 사이 수하들은 모두 심장이 꿰뚫린 채 절명했다.

서평이 검을 거두고 적인종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저쪽에 절벽이 있으니 시신을 그리로 던지게. 그리고 자네는 나와 함께 화산으로 가세나.”

그는 연화봉을 올려다보며 한 숨을 흘렸다.

“쯧, 미운 정도 정이라더니······.”

< 29, 화산의 괴물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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