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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70화 (70/226)

< 28, 천룡전(天龍殿). >

28, 천룡전(天龍殿).

이훤은 환혼천사의 말에 집중했다.

이미 그는 회광반조의 상황에 이르렀다. 혈륜을 주입했다가는 오히려 죽음이 앞당겨질 터였다.

매난국죽(梅蘭菊竹).

네 명의 여인은 시인묵객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사군자를 이름으로 삼았단다. 한데 같은 능력을 지닌 네 명의 여인은 단 한 번도 협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생사대적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신마의 깨달음을 모두 모아 대업이 끝났을 때 가장 공을 크게 세운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단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신비조직의 수장인 천룡의 옆자리를 차지하여 진짜 이름을 받게 될 터였다.

‘미친 새끼들.’

이훤은 환혼천사의 말을 들으면서 혀를 찼다.

“그녀를 천룡전에 올려놓는 것이 내 일생의 목표였거늘······. 그것도 이제 끝이다. 모두 끝났어.”

적은 점조직의 형태로 이뤄졌고, 오직 수뇌부들끼리만 천룡전(天龍殿)이라 칭하며 과거의 유산을 수집 중이다. 본래 천룡(天龍)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아니던가. 누군지 몰라도 하늘로 오르고 싶어서 환장을 한 듯했다.

“그래서 그분이라는 자가 누구지?”

환혼천사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내가 알 것이라 생각하는가?”

“아니, 모르면서 왜 이렇게 당당해?”

이훤이 헛웃음을 짓자, 환혼천사는 어울리지 않게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죽은 이상 나도 끝이다. 대충 아는 것을 말했으니 그냥 죽여라.”

“대충? 대충!”

환혼천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훤이 짜증 섞인 한 마디를 내뱉더니 백매선자의 시신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죽은 백매선자의 목을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씨발! 지금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전설 속 원앙처럼 지옥에서라도 너희들이 이어지기를 빌어줄 것 같았냐?”

“뭐, 뭐하는 거야?”

혈륜을 휘돌리며 귀화를 드러내는 순간 서슬 시퍼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네 대가리 속에 희미한 기억까지다 다 토해내. 안 그러면 이 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짓이겨서 개 먹이로 줄 테니까. 알겠어?”

“미친놈아!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더냐?”

이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멀쩡한 소녀와 여인을 납치해서 실혼인을 만들어놓고, 그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지도 않나? 지금까지 몇 명 죽였냐?”

콰직!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목뼈가 가볍게 으스러졌다.

“백 명? 이백 명?”

퍽! 퍽! 퍽!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몸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면 천 명? 자! 이제 얼굴이야.”

이훤이 백매선자의 얼굴에 주먹을 겨누자, 환혼천사는 진저리를 쳤다. 그는 이훤이 사마외도일 것이라 확신했다. 제아무리 막 나가는 놈이라고 해도 정파인이 저렇게 잔악무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잠깐! 사색과 사상, 사군과 사신이 있다고 했다. 그 새끼들은 다 똑같이 생겼어. 그리고 서로 싫어해. 그리고 그 중에서 한 사람만 진짜가 되어 천룡전에 앉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게 전부야!”

“그건 뭐지?”

“모른다. 일전에 애마가 지나가는 말로 강림혼요술이라 했다. 신마가 깃들어서 천한 인간들은 모두 피할 수 없다고 했어. 너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팔황무극존은 신마의 이야기를 듣고, 육신의 단련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지. 천룡이라는 놈은 섭혼술의 경지를 몇 단계나 끌어올린 건가?’

환혼천마는 생각에 잠긴 이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녀를 놓아줘라! 내 곁에 있게 해줘!”

하나 이훤은 환혼천사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를 내려놨다. 그리고 온천 곳곳에 놓인 등잔을 챙겼다. 등잔에 고여 있는 기름을 백매선자의 몸에 부었고, 그 후에야 환혼천사를 돌아봤다.

“뭐, 뭐하는 거야?”

이훤은 불붙은 등을 쥔 채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천 조각처럼 만들어준다고 약속을 했지 뭐야. 일각은 지났지만, 이제라도 약속을 지킬까 해.”

“놈! 나와도 약속하지 않았느냐?”

“즐겁게 마시는 술은 취하지 않아.”

“미친! 무슨 개소리냐?”

이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말인즉슨 쓰레기와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그 말을 끝으로 불씨를 떨어졌고, 백매선자의 시신은 한순간에 활활 타올랐다.

“애매! 선자! 나의 백매가! 나의······.”

이훤은 백매선자가 까맣게 타들어갈 때까지 지켜봤다. 그 후에야 환혼천사의 앞에 섰다.

“으아아아아! 가만 두지 않을 테다.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되어서 네 놈을 저주할 것이야!”

“어, 그래. 나 원망하는 것들끼리 조직이라도 만들었을 거야. 거기 가입해서 열심히 해.”

“놈!”

환혼천사의 말을 이어지지 못했다.

이훤은 얼굴을 걷어찼다. 혈륜이나 단전의 내공은 그대로 둔 채 각력만으로 후려쳤다. 환혼천사의 얼굴은 뭉개지고, 숨이 끊길 때까지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퉤!”

그 순간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렸다.

불구가 된 채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나희들이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아무래도 실혼을 하는 과정에서 환혼천사와 연결이 된 듯보였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피를 흘리며 죽은 후에는 온천 내에 귀기가 감돌았다.

“기분 더럽게 만드네.”

이훤은 돌아가서 몇 번이나 더 발길질을 한 후에야 돌아섰다. 조금 전의 왔었던 길을 벌써 잊어버렸을 리 없다. 하나 관음동을 떠나는 발걸음은 느릿했다. 아쉽게도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나 의협심과는 관련이 없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씩, 천천히.

‘천룡의 소속은?’

아직 알 수 없다.

백매선자를 통해 제갈세가와 산동악가의 존재는 알게 됐지만, 여전히 두 곳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러니 팔황무극존과 같은 예가 있는 한 여덟 번째 생존자도 염두에 둬야 할 터였다.

‘천룡전의 위치와 구성?’

위치 또한 알 수 없다.

하지만 천룡전의 음모를 겪을수록 놈들은 오랜 세월 강호에 침투한 상태였다. 아마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섭혼술이 통하는 곳이라면 모조리 장악하려고 했으리라.

다행히 구성은 파악됐다.

‘웃는 놈과 우는 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환혼천사는 사색과 사상, 사군과 사신을 논했다.

‘소마는 네 가지 색 중 한 명이겠네.’

절명곡에서 한 놈을 죽였으니 셋이 남았다.

다만 색을 알 수 없을 따름이다.

그에 비해 사상(四象)과 사군(四君), 사신(四神)은 예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사방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뜻하나, 천룡이라는 자가 수하에게 그것을 줄 리 없다. 어렵게 만들어낸 수하들에게 목숨을 걸고 경쟁하게 만드는 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흔히 알려진 일월성신의 의미보다 물, 불, 땅, 바위가 어울리겠다.

‘색이 희였고, 사군이 애였으니 사상은 노가 되겠네.’

수노, 화노, 토노, 석노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핫, 진짜 이름 대충 지었어.’

오히려 사신이라는 존재가 신경 쓰였다.

사령(四靈)이나 사수(四獸)라 불리는 사방신의 이름을 붙였다면 희노애락 중에서도 가장 아낀다는 의미가 아닌가.

‘일단 이름도 제일 있어 보이고 말이야.’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아무리 생각해도 취마나 탈마보다 있어 보였다.

“에잇, 재수 없어.”

동굴을 나서는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나타났다.

이훤은 관음동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있는 화청궁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하아, 불 안 끄나?”

이제 화마는 화청궁 전체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이 되면 여산까지 불타오를 것이다. 다행히 눈이 내리는 계절이니 멀리 퍼지지는 않을 터였다.

“형님!”

고천락이 미끄러지듯이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별 일 없었지??”

이훤의 말에 고천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있을 시간이나 됐나요. 그런데 내가 질렀지만, 너무 잘 타는 걸? 화청궁을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나 봐요. 여기저기서 잘도 타네. 그나저나 운이 좋았어요. 화재 때문에 놈들이 여기를 비우지 않았다면 피곤해졌을 걸요.”

고천락은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네가 보기에는 저게 화재 진압을 하는 것처럼 보이냐?”

“어.”

두 사람은 빠르게 화청궁 쪽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불을 끄려고 애썼지만, 불길을 잡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청궁에 속했던 무인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네. 그럼 다 어디 간 거지?”

고천락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훤은 인상을 풀지 않았다.

백매선자가 원망했던 애난이라는 존재가 뇌리를 스쳤다. 또한 신마의 깨달음을 들었던 존재들을 밝히는 과정에서 누군가와 귀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습도 떠올랐다.

‘제 삼의 누군가가 있다.’

처음에는 애난이 애매의 세력을 빼앗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라 여겼다. 한데 애매의 모든 것은 관음동에 있지 않았던가. 제아무리 똑같이 생긴 자가 명령을 했어도 관음동을 버릴 리가 없다.

‘만약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아예 새로운 걸 시킬 수는 없어도 예정되었던 것을 앞당겨서 시키는 건 가능할 터였다.

“야! 화청궁에서 빠져나간 놈들이 있는지 찾아봐.”

“형님은요?”

“나는 하오문 여산지부로 간다!”

*

이훤은 여전히 아수라장인 여산지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문도들을 닦달했다. 그리고 화청궁에서 나온 무인이 지부장의 서류를 살펴봤음을 전해 들었다.

“뭐야?”

하오문처럼 충성도가 낮은 집단은 수뇌부가 무너지는 순간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문도들은 지부의 정보를 내어놓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겁니다.”

이훤은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화산의 매화검수가 장문인을 독대한 후 일대제자들을 소집했다는 내용이다. 화산 내부의 일이 며칠 사이에 전해지는 것도 놀라웠지만, 보고서를 보는 순간 짚이는 바가 있었다.

“······.”

그 때 고천락이 구르듯이 뛰어 들어왔다.

“형님! 이 새끼들, 이상한데요. 마치 전쟁이라도 하러 가는 것처럼 말까지 타고 갔데요. 평소에는 얼굴도 보기 힘든 자들인데 대로로 지나갔고요. 어디로 갔느냐면······.”

이훤이 보고서를 구기며 말했다.

“화산.”

*

흑의인(黑衣人)은 관음동에 발을 들였다.

백여 구가 넘는 시신이 즐비했지만, 웃었다.

수많은 여인의 나신이 보였지만, 웃었다.

그리고 애매의 불탄 시신을 보았을 때 웃었다.

“재밌네.”

그 때 동굴의 입구에서 담담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재미없는 걸. 살아 있었으면 한껏 즐겼겠지만, 시간은 취향이 아니야.”

흑의인은 돌아서며 웃었다.

“늦지 않게 왔네요.”

관음동의 입구에는 삼십대로 보이는 세 명의 검수가 품 (品)자 형태로 대기했다. 각기 천공과 지별, 인속이라 불리는 자들로 장강 이남에서 삼영수룡(三影水龍)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호남의 터줏대감인 교룡세가의 가주를 살해한 것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장강과 동정호에서 삼영수룡의 눈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밀법대종사가 화산으로 갔다고 들었어. 우리는 왜 보내지 않은 거지?”

“닭 잡는 칼에 소 잡는 칼을 쓸 수 없다는 말로 납득해주면 안 될까요?”

삼영수룡의 대형인 천공이 인상을 썼다.

“천룡전이 만들어졌을 때 맨 윗자리에 앉는 건 희노애락, 너희들이겠지. 하지만 그 아랫자리 또한 경쟁을 해야 해. 내가 당신의 섭혼술을 허락해서 이런 꼴이 됐지만, 두 번째 자리까지 양보할 생각은 없어.”

흑의인은 환히 웃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수하는 두 부류였다.

강림혼요술(降臨魂要術)에 걸린 줄도 모르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다. 복천적, 환혼천사와 같은 자들이 그럴 터였다. 후자인 밀법대종사나 삼영수룡은 각자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흔쾌히 섭혼술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후자가 전자보다 강한 것이 당연했다.

삼영수룡이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다.

“따라오세요.”

흑의인은 콧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가볍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는 관음동 밖으로 나온 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코를 벌름거렸다.

“흐음, 동쪽인가요. 그가 화산으로 가고 있네요.”

삼영수룡은 영문 모를 소리에도 침착했다.

흑의인은 단 한 번도 의미 없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이걸 맡으세요.”

그가 죽통의 마개를 열어 삼영수룡의 코 밑에 가져다댔다.

“잘 모르겠는데.”

“저와 여러분은 신체 구조가 다르니까 내공을 써야 할 겁니다. 애난에게 부탁해서 애매의 몸이 추종향을 발라놨어요. 삼 일 정도 갈 것이니 냄새를 따라 가세요.”

잠시 후 삼영수룡도 흑의인과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훤이라고 있습니다. 그 자의 모든 것을 끌어내세요. 필요하다면 애난을 비롯한 아군을 죽여도 좋습니다.”

흑의인은 그들이 떠난 후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상반신을 드러낸 건장한 체구의 노인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상체만한 의자를 등에 매달았다. 흑의인이 의자에 앉은 후 밝은 목소리로 명령을 했다.

“화산으로 가세요.”

그 순간 노인의 신형이 빛살처럼 튕겨나갔다.

한 사람을 짊어졌음에도 한 걸음에 이 장 이상 뛰었고, 흔들림은 없었다.

< 28, 천룡전(天龍殿).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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