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5) >
혼백(魂魄)을 뒤흔들 만큼 기괴한 소음이다.
동시에 환혼천사가 몸을 날려 온천 밖으로 나왔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주술을 외기 시작했다.
이훤은 한 쌍의 남녀가 보여주는 광경에 혀를 찼다.
“미친 거야?”
그 순간 기겁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김을 뿜어내고 있던 온천의 수면 위로 머리카락이 촉수처럼 흐느적거리더니 이내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보통 사람이 보았다면 기절을 하거나 심장이 멈췄을 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나 이훤은 호기심을 보였다.
“뭐야? 실혼인인가.”
고금을 통틀어 약물로 세뇌하고, 이지를 없앤 후 꼭두각시로 삼는 실혼대법(失魂大法)은 흔했다. 하나 실혼인을 만든 후 위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지를 상실하는 순간 판단력과 행동력이 유아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데 백매선자와 환혼천사의 표정만 봐도 성공했음이 느껴졌다. 쓸 만한 실혼인을 넘어 대단한 실혼인을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대규모로 만들어냈다고?”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회귀 전 이렇게 많은 실혼인이, 그것도 여자들로 이뤄진 무리가 활동을 했다면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데 실혼인이나 강시, 또는 색목인처럼 특이하면서도 다수가 돌아다닌 건 듣도 보도 못했다.
호기심은 금세 의문으로 이어졌다.
‘회귀 전에도 있었을 텐데 이걸 어디에 쓴 거지?’
만들어 놓고 쓰지 않았을 리 만무했다.
그저 신비조직이 늘 하던 것처럼 써먹은 후 폐기처분했으리라. 궁금한 것은 회귀 전 저들을 어디에 써먹었느냐는 것이다.
환혼천사는 사교도의 수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렁차게 외쳤다.
“환희백팔나희가 삼백 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도다. 구천의 선조들이시어! 모산의 역사가 현세에 드리워졌으니 원혼을 모아 응원하소서!”
반면 백매선자는 별다른 감흥 없이 환혼종을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환혼천사에게 이훤은 그저 고수일 뿐이지만, 백매선자에게는 ‘그분’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백팔 명의 소녀와 여인들이 이훤을 향해 움직였다.
똑같이 세뇌가 됐을지언정 살아생전의 버릇이나 성품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부끄러워하면서 속살을 드러냈고, 누군가는 당당하게 유혹하듯 손짓을 했다. 백팔 명의 육향이 코를 찔렀다.
하나 이훤은 미간을 찡그렸다.
환혼천사는 그 모습에 대법이 통한다고 여겼는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훤이 한 숨을 내쉬며 내뱉은 말에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 신기한 걸 보느라 시간을 너무 끌었네.”
저자의 경극패를 보아도 저것보다는 신기해할 터였다.
환혼천사가 입술을 오물거리는 사이 환희백팔나희와 이훤의 거리가 지척에 이르렀다.
꽈드득!
주먹을 쥔다.
만약 이지(理智)만 상실했다면 바보에 불과하니 처리하는 것도 귀찮았으리라. 한데 여인들이 뿜어내는 육향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종류였다. 이미 몸 전체가 망가져서 약의 힘으로 살아 숨 쉬는 상태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여인이 방실방실 웃으며 손을 뻗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릴 수 있었다.
퍽!
이훤이 자세만 살짝 낮춘 채 양 주먹을 연이어 내뻗는 순간 두 명의 백팔나희가 튕겨나갔다. 얼굴을 맞은 쪽은 하관이 뭉개졌고, 아랫배를 맞은 쪽은 척추에 금이 갔을 터였다. 어느 쪽이든 살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한데 일 장이나 튕겨나간 여인들이 비척거리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예상은 확신이 됐다.
‘되돌리기는 글렀다.’
따라라라랑-
“환희백팔나무를 펼쳐라!”
명칭만 들어도 무슨 짓을 하려는지 훤히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여인들은 이훤을 포위한 채 다섯 겹에 걸친 진법을 시전했다. 저마다 표정과 외모, 몸매가 달랐으니 어느 한 명에게는 혹하기 마련이다.
사내라면 두 명만 있어도 눈이 돌아갈 터였다.
하물며 백팔 명이라면 황제도 누리지 못할 호사가 아닐까 싶다.
이훤 또한 사내였다.
여인이 옷을 벗고 달려드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 술만 있었으면 제대로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한탄하듯 한 마디를 내뱉는 것과 달리 주먹만은 본능적으로 투로를 찾아 움직였다.
콰직!
맨손이 아니라 혈륜이 담긴 일권이다.
이미 여인들의 입김과 육향이 효과를 보이지 않는 한 대진을 펼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게다가 이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적아(敵我)일 뿐 남녀노소가 아니었다. 여자라고 봐주고, 아이라고 용서했다가 등에 칼 맞은 무인만 지옥에서 데리고 와도 천하를 지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다리가 기이하게 꺾인 채 뼈가 드러나고, 교성과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적은 죽인다.
하물며 소마와 관련된 신비조직이라면 말살한다.
콰직! 콰직!
십여 명의 여인을 박살 난 후 온천의 수면을 걷어찼다.
쏴아아아!
수십 바가지를 채울 정도의 물이 솟구쳤다.
이훤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양 손을 모아 휘돌리면서 내뻗었다.
콰콰콰콰쾅!
물이 곧 암기가 되어 나희들을 덮쳤다.
피부가 찢기고 눈이 멀었으며, 뼈에 구멍이 났다.
수십 명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는 광경은 지옥도의 재현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잔혹했다.
이훤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백매선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절반 이상의 나희가 쓰러진 후부터는 환혼종을 흔들지도 못했다.
“뭐해?”
“뭐, 뭐요?”
“시간 얼마나 지났어?”
백매선자는 이훤의 말에 불현 듯 조금 전 삼매진화에 불태워진 천 조각을 떠올렸다. 상대는 일각 후 자신을 그렇게 만든다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당신 누구지요? 어디서 온 거예요?”
그 순간 이훤은 재밌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미 문후를 상대하면서 예상했지만, 자신에게는 신비조직의 섭혼술이 통하지 않았다. 아마 이훤이 아니라 팔황무극존이 만든 천공혈륜겁을 익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걸 나는 알지만, 쟤는 모르잖아?’
팔황무극존의 깨달음이 섭혼술을 막았다면, 무당의 천문진인이 남긴 깨달음으로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화산의 망아취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한데 저 년은 그걸 모른다.
이훤은 어수룩해보일만큼 여유를 부렸다.
“크큭, 우는 년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엄청 기괴한 걸? 좋아. 기회를 주지. 맞춰봐. 어디서 왔을까?”
백매선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신비조직은 점조직의 형태로 중원 곳곳에 퍼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당시 신마의 깨달음을 직접적으로 전해들은 여섯 명의 장로들을 주시하는 건 당연했다.
‘저 놈의 사문을 알면 활로가 열릴 수도 있어.’
백매선자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이훤의 외양을 보고 선입견을 지녔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훤의 나이는 많게 봐도 이십 대 중반을 넘지 않는다. 잘 보면 장난기 많은 표정으로 인해 십대 후반으로도 보였다. 그러니 신마의 깨달음을 익혔으면 얼마나 익혔을 것이고, 강호의 경험이 있다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화산은 아닐 것 같고, 무당도 아니니······.”
이훤이 눈을 빛냈다.
본래 망아취자를 설득해서 다른 장로들의 사문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한데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에게 정보를 습득하게 생겼다.
백매선자는 이훤의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고 여겼나 보다. 그녀는 조금 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구파의 느낌보다는 제갈이나 산동악가의 느낌이 나는군요.”
두 명이 추가됐다.
제갈세가(諸葛世家)와 산동악가(山東岳家)는 각기 호북과 산동의 패주로 오대세가의 한 축이다.
두 명만 더 파악하면 당시 남아 있던 모든 장로들의 소속을 알게 되는 셈이다. 하물며 백매선자가 하는 말로 인해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자가 일곱이나 여덟이 될 수도 있는 상태였다.
‘팔황무극존이 숨어서 들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또 있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한데 백매선자가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누군가의 귓속말을 듣는 사람처럼 묘하게 흔들렸다.
“당신, 제게 정보를 캐내려 했군요!”
이훤은 이 와중에도 눈시울을 붉히며 울상을 짓는 백매선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 또한 개미굴의 문후처럼 죽기 직전에야 제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걸렸네.”
파팟!
이훤은 온천 위를 질주했다.
암천군림보를 익힌 후 능력이 있음에도 선보일 수 없었던 경공의 상승묘리를 펼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몸을 가볍게 한 후 물 위를 달리는 등평도수(登萍渡水) 또한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백매선자는 땅 위를 달리는 것보다 빠르게 접근하는 이훤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그녀는 문후가 좌우사자에게 그랬듯 환혼천사를 향해 외쳤다.
“막아요!”
“놈! 멈춰라!”
환혼천사가 흉물을 덜렁거리며 쇄도했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모습은 환희백팔나희보다 더 한 충격과 공포였다. 하지만 환혼천사의 무공만은 우습게 볼 수 없었다. 그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가 뺄 때마다 수십 개의 대침(大針)이 쇄도했다
슉슉슉슉슉슉!
혈륜이 절로 반응하며 손바닥에 맺히는 순간 강맹한 장풍이 전방을 수놓았다. 대침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쓰러져 있던 나희들에게 꽂혔다. 하나 환혼천사는 약간의 시간을 벌었고, 이훤의 앞을 막아서는데 성공했다.
“이 놈! 모산의 혈공부박술이 네 놈을······.”
망한 문파의 절예 따위를 알아서 무엇 하랴.
이훤은 앞을 막아선 환혼천사를 향해 전력으로 혈륜을 쏟아 부었다.
콰콰콰콰쾅!
환혼천사가 대경실색하여 몸을 띄웠지만, 이미 강기(罡氣)가 하반신을 쓸고 지나간 후였다.
“으아아아아아악!”
이훤은 돌이 된 것처럼 멀뚱히 선 백매선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너도 뭐 남길 말이라도 있느냐?”
백매선자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원독한 눈빛을 발산했다.
“크흐흐흑! 경천대와 기천대가 있었다면 당신의 기습에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환희백팔나희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았을 거야!”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도 없던데?”
“뭐라고요?”
“밖에 아무도 없었어. 단 한 명도 없더라.”
“복천적, 금검노호는 어디 갔단 말인가?”
“없더라.”
“왜?”
이훤은 넋 나간 사람처럼 되묻는 백매선자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 차려. 다 너 버리고 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어! 그분의 능력에 감화된 이상 다른 사술에 현혹될 리가 없단 말이다. 오직 그분의 능력에만 반응하는······.”
백매선자는 현실을 외면하듯 울부짖다가 멈칫했다.
“설마 애난, 그년인가? 그년이 나를 물 먹인 거야?”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매와 애난, 두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자연스럽게 사군자가 떠올랐다. 하면 관건은 개미굴의 문후와 어용협에서 문후를 퇴각하게 만든 누군가를 사군자에 포함해야 할지였다.
백매선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지녔던 모든 기반을 송두리째 빼앗겼으니 재기는 불가능했다. 하물며 눈앞에는 상극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생명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눈빛이 변했다.
“그래, 나 혼자 슬퍼할 수는 없어요. 그년도 똑같이 피눈물을 흘려야 해.”
백매선자는 이훤에게 목을 잡힌 상태에서 환혼천사를 향해 외쳤다.
“말해! 다 말해줘.”
환혼천사는 갑작스런 상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말 할 수 없으니 당신이 다 말해주란 말이에요!”
그 순간 백매선자의 칠공에서 저절로 피가 솟구쳤다.
아무래도 섭혼술에 반항하여 대립하는 순간 저절로 발동하는 듯했다. 문후가 그랬듯 그녀의 슬픈 얼굴 또한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눈동자가 빛을 잃고, 침과 피가 범벅이 되어 흘렀다. 그녀의 상이 완전히 깨지는 순간 원한 가득한 한 마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소매에 난초를 새긴 년, 꼭······.”
이훤은 웃었다.
저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하겠다니 이처럼 즐거운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 죽여주마. 다 죽여주마!”
이훤은 잠시 후 축 늘어진 채 절명한 백매선자를 내던지고, 상반신만 남은 환혼천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말해봐.”
“끄으으으.”
환혼천사는 애정의 대상인 백매선자의 흉수에게 반항하고 싶었으리라. 하나 혼백을 묶인 그로서는 백매선자의 말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군사도의 첫 째인 애매다. 그리고······.”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5)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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