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68화 (68/226)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4) >

*

이훤은 화청궁이 초행이다.

회귀 전의 기억까지 더듬어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는 험준한 창룡령을 손쉽게 오갔듯 헤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골목과 갈림길마다 고천락이 남겨놓은 밀어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없어도 너무 없는데?’

한데 너무 순조로웠기 때문일까.

앞을 막는 자가 없으니 오히려 의아했다.

남몰래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울 터였다. 한데 이렇듯 단순한 성동격서에 완전히 자리를 비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잠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으나, 멈추지 않았다.

함정이라면 부수고 나가면 그 뿐.

“형님!”

화청궁을 벗어나 산기슭에 이르는 순간 나무 위에서 고천락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생했다.”

“형님은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앞을 막는 놈이 없더라.”

고천락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엇! 함정인가?”

“이런 지세라면 관음동은 산을 파고 만든 동굴이 분명해. 한데 관음동 근처에 함정을 파고 나를 유인할 까닭이 없지. 함정은 아닐 거다.”

이훤은 가볍게 몸을 날려 고천락의 곁에 숨어들었다.

“위치는 대략 확인됐어?”

“더 가까이 가기에는 왠지 꺼림칙해서요.”

고천락은 영문 모를 감을 들먹이며 진저리를 쳤다.

이훤은 히죽 웃으며 고천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지금부터는 혼자 가마.”

“나는 안가도 되지요?”

대답 대신 두 눈 가득 혈륜을 휘돌렸다.

고천락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귀화(鬼火)에 인상을 썼다.

“혼자가 편해. 그리고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고.”

“혹시 화산 쪽에서 도사들이 오면 막아달라고요?”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회귀 전부터 탈마와 함께 움직이면 늘 편했다.

자신의 버릇과 탈마의 버릇이 묘하게 요철처럼 맞물리며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졌기 때문이다. 한데 회귀한 이후에도 녀석과 함께라면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마음을 나눈 것처럼 분업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못 볼 꼴을 많이 보여야 할 것 같다.”

“형님 눈만 봐도 오금이 지리는 걸요. 도사들이 보면 마공이라고 난리를 칠겁니다.”

“조절할 수 있어.”

고천락은 자심의 가슴을 치는 시늉을 했다.

“아! 그럼 조절 좀 해요. 내 앞에서 갑자기 그러지 말고. 그럴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미치겠다니까.”

“그거 반하는 거야. 두근거리는 거지.”

“흥! 술이나 마시지 마쇼. 만약에 도사들이 오면 적당히 다른 길을 안내하거나 해서 시간을 끌게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와요.”

이훤은 피식 웃었다.

“너는 내가 질거라고 생각하지 않냐?”

“이상하게 형님은 살 것 같아. 다 이길 거 같아.”

녀석의 응원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훤은 고천락의 어깨를 잠시 두드린 후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흩어지면서 숲 전체를 뒤덮는 듯했다.

고천락은 그 모습에 한 숨을 내쉬었다.

“하, 참 희한한 사람이야.”

그 또한 이훤이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만난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의 수족처럼, 가족처럼, 형제처럼 마음을 다해서 애쓰고 있지 않은가. 한데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고, 몸도 편했다. 늘 하던 대로 움직여도 이훤과 함께라면 거슬리지 않았다. 마치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 했던 사람처럼 편안한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게 인연이라는 건가?’

고천락은 반하지 말라던 이훤의 말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상상이 현실로 될까 두려웠는지 몇 번이나 가래침을 뱉었다.

퉤퉤퉤!

*

관음동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숲을 헤집고 다니던 중 뜬금없이 새겨진 관음상을 발견한 게다. 함정이라면 유치했고, 진짜 관음동이 있다면 너무나 허술했다.

‘신비조직이랍시고 너무 막나가는 아닌가?’

이훤은 혀를 차며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하나 그는 알 수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숲 주변을 감시해야 했던 기천대와  관음동 주변에 은신하고 있어야 할 경천대는 모두 화산으로 떠난 상태였다. 어쩌면 화청궁 내에서 가장 중요한 심처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이 애난의 공작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게다.

‘찾았다.’

이훤은 희미하게 남은 작은 발자국을 발견했다.

발자국의 크기로 보아 백매선자일 터였다.

‘이 년도 고수는 아니네.’

그가 개미굴에서 만난 문후는 있으나마나 한 무공을 지녔다. 그리고 회귀 전의 소마 또한 문후보다는 나을 뿐 절정의 무위도 갖추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신비조직의 수뇌부는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가능성어 커 보였다.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세뇌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닌가.

하찮은 사술의 일종이라 여겼던 미혼술로 천하를 휘어잡으려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게다. 무당과 무림맹에서조차 흔적이 발견되었으니 천하제일의 미혼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긴 말 필요 없이 초전에 박살내야겠군.’

이훤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이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넝쿨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혈륜을 극대화하여 안력을 증폭했고, 그로 인해 넝쿨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감지했다.

슬쩍 손을 뻗어 넝쿨을 건드렸다.

그리고 시각과 청각, 촉각을 더하여 넝쿨과 엮인 기관이나 함정이 존재하는지 확인했다.

‘허술하다. 허술해. 뒈지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이훤은 넝쿨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

신마의 유진을 탐하려는 애매는 스스로를 백매선자라 칭했다. 그렇기에 관음동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관음동 밖은 기천대와 경천대가 지켰고, 복천적이 자신을 위해 견마의 노고를 감수할 터였다. 심지어 이곳은 며칠 전만 해도 고관이나 부호들의 아내나 첩이 머물며 몸을 담그던 온천이 아니던가.

“이 냄새는 삼 년이 되어도 적응이 되지 않네요.”

백매선자의 혼잣말에 벌거벗다시피 한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눈을 부비며 말했다.

“클클, 환락산과 영고환, 철근제를 비롯한 영약과 독약은 물론이고, 최음제까지 섞었소이다. 백매선자처럼 고귀한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라오.”

하나 노인은 정중한 어투와 달리 백매선자를 힐끔거렸고, 그 때마다 번들거리는 눈빛이 욕망을 발산했다.

“환혼천사께서 저를 위해 만들어주시는 건데 어울리지 않을 까닭이 있나요.”

노인은 썩어 문드러진 이빨이 훤히 보일만큼 크게 웃었다. 참으로 볼품없는 모습에 무시당하기 딱 좋은 몰골이었다. 하지만 그가 관음동 밖에 있을 당시 누구도 그를 비웃지 못했다.

환혼천사(還魂天師)라는 별호가 지니는 힘이었다.

모산파의 마지막 전인인 환혼천사는 감숙성 북부 명사산에 터를 잡았다. 한데 그가 십 년 정도 명사산에 머물 때 사람들은 근처를 지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성의 통로인 옥문관과 인접한 명사산은 사람이 사라져도 찾을 수 없는 장소였다. 네 자리 숫자 이상의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은 유명했다.

“나만 믿으시오. 지금도 이 아이들은 완성체나 마찬가지외다. 하나 이틀만 더 숙성을 시키면 입과 몸에서 나는 향이 두 배는 더 진해질 것이야. 그렇게 된다면 스님이나 도사라고 해도 바지를 벗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그때쯤 되면 백매선자께서도 이 몸을 어여삐 여기셔야 하지 않겠소?”

백매선자는 환혼천사의 흉물스런 모습에도 얼굴을 구기지 않았다. 오히려 환혼천사의 어깨에 슬쩍 기댄 채 한탄하듯 말을 건넸다.

“저도 이제 힘드네요. 쉬고 싶기도 하고요.”

“그럼 내가 선자를 위해서라도 빨리 일을 마쳐야겠군.”

환혼천사가 눈을 빛내더니 온탕으로 향했다.

그는 옷을 모두 벗고, 온탕의 중심부에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구결을 왼다.

사공을 펼치는 과정마저 기이했다.

그가 수면에 손바닥을 대고 내력을 끌어올리는 순간 온천 전체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물속에서 여인들이 하나둘 씩 모습을 드러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인이 무려 백팔 명이다. 하나 미역처럼 늘어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일견하기에도 귀기가 감돌았다.

“합!”

환혼천사가 일갈을 내지르는 순간 여인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한데 크게 뜬 눈과 달리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딸랑- 딸랑-

종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으로 전해지는 듯보였다.

백매선자는 종을 흔들고, 환혼천사는 주술을 외웠다.

여인들은 웃었다가, 울었다가, 화를 냈다가, 즐거워했다. 하나 백팔 명이 동시에 감정의 변화를 보일 때마다 색정적인 향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딸랑- 딸랑-

백매선자의 눈빛에 기쁨이 맺혔다.

그러나 오롯이 밝음이 아니라 슬픔과 뒤섞였기에 기괴한 표정일 뿐이다.

‘환희백팔나희만 완성되면 화산파는 내 수중에 떨어진다. 아니지. 그 뿐이겠는가? 사내라면 누구도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야.’

그녀는 환희종(歡喜鐘)을 수련하듯 더욱 거세게 흔들었다.

한데 그 순간 온천의 밖에서 누군가 화답하듯 외쳤다.

“어! 거기야? 금방 갈게.”

마치 친구를 만나러 온 듯한 밝은 목소리.

백매선자는 종을 멈췄고, 환혼천사의 중얼거림도 끊겼다.

“뭐지?”

환혼천사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너무나 해맑은 목소리에 누군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그럴 일은 없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외부를 지키는 기천대와 경천대만 해도 이백 명이다. 그리고 그들이 지급받은 특수한 재질의 호각이라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외부인이 흔적 없이 들어오려면 이백 명을 동시에 제압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웠다.

쾅!

관음동의 입구인 철문이 요동을 쳤다.

쾅! 쾅! 쾅!

철문의 중심부가 움푹 패이며 우그러졌고, 이내 굉음과 함께 강제로 문이 개방됐다.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 개의 불꽃이 타올랐다.

“아, 부잣집만 사용하는 온천이라면서 냄새가 왜 이래?”

윗사람이 시찰을 나온 것처럼 짜증 섞인 한 마디에 환혼천사는 자신도 모르게 온천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소리 없이 일어났던 여인들이 하나둘씩 다시 온천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환혼천사는 자신의 흉물을 드러냈지만, 가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머리카락 사이에 꽂아놓았던 대침을 손에 쥐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훤은 무방비한 자세로 흙먼지를 헤치고 나타났다.

“보아하니 그쪽이 백매선자고, 당신은 뭐야? 꼴을 보아하니 화난 쪽인가?”

환혼천사가 미간을 좁혔다.

반면 백매선자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더니 슬쩍 한 걸음 내딛었다. 그것만으로도 폭발적인 방향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권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쪽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 듯하네요.”

그녀는 의식적으로 소매를 들었다가 내리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한숨과 눈물이 이어질 때마다 이훤의 눈동자에서 귀화가 잦아들었다. 심지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환혼천사마저도 홀린 것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백매선자가 이훤의 지척에 이르렀다.

세 걸음.

가볍게 걸어도 한 순간이만 도착할 거리였다.

하나 백매선자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발을 떼지 못했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미혼술이 듣지 않아서 놀랐나?”

“하찮은 미혼술 따위가 아니거든요. 그럼 지금 기분은 어떻지요?”

백매선자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다가오지도, 슬퍼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내비쳤다.

이훤은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화가 나. 아주 많이 화가 나.”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첫 째, 관음동의 썩은 내가 코를 찌르잖아. 술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은 나았을 텐데. 둘 째, 네가 웃든, 울든 상관없어. 하지만 매화는 새기지 말았어야지.”

그 순간 이훤의 눈동자에 피가 몰린 듯했다.

이내 짙은 귀화가 번쩍였고, 신형 또한 안개처럼 좌우로 찢기듯 사라졌다.

촤악!

백매선자가 눈을 부릅떴다.

붉은 안개가 지척에 이르는 듯하더니 어느새 멀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나 이훤이 제자리로 돌아갔음에도 등허리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의 찢긴 소매를 보며 진저리를 쳤다.

이훤은 소매에 새겨진 매화를 본 후 혀를 찼다.

동시에 삼매진화를 일으키니 천 조각은 한순간 재가 되어 사라졌다.

화르륵!

“이게 일각 후 네 모습이야.”

백매선자의 찢어질 듯한 교성이 관음동 전체에 퍼져나갔다.

“환혼천사!”

동시에 그녀는 환혼종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따라라라라라랑-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4)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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