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2) >
*
하오문의 지부는 지부장 휘하 관리인이라 불리는 학사들로 이뤄졌다. 그들은 정보를 관장하며 고객과의 연결 고리가 되었다. 하나 학사들은 횡적인 관계였고, 오직 지부장의 명령만 받았다. 그러니 지부장이란 한 지역의 정보를 관장하는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음, 나는 눈이 싫어. 하지만 이렇게 따뜻한 곳에서 좋은 술을 마시며 창밖의 눈을 보는 건 좋아하지.”
지부장의 혼잣말에 운 학사가 아첨하듯 말을 건넸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좋은 분 곁에서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야 말로 인생의 홍복이지요.”
“클클, 자네는 태가 나지 않게 아첨을 해서 참 좋아. 대화하는 맛이 있거든.”
“헤헤, 아첨이라니요. 아! 제가 좋은 술을 한 병 가져왔습니다. 여흥 땅에서 유명한 술인데 금가루를 섞어놔서 장수할 수 있다는군요.”
지부장은 운 학사가 내어놓은 술병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허허, 이거 병만 봐도 가격의 품격이 느껴지는군. 그래, 지난번에 들어온 견과가 있었지. 황궁에 공물로 올린다는 그거 말이야.”
“예, 혹시 몰라서 제가 조금 챙겨놨습니다.”
“맛있겠네. 가져와.”
운 학사는 환관처럼 헤죽거리며 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문이 폭발했다.
콰쾅!
지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운 학사가 문과 함께 튕겨나가서 피떡이 되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너머로 이훤이 종 학사를 질질 끌며 들어섰다. 그는 종 학사를 공깃돌처럼 들어 올리더니 지부장을 바라보게 했다.
“저 놈, 맞아?”
“으으, 맞소.”
이훤은 종 학사를 내려놨다.
하나 종 학사는 앉은뱅이처럼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두 다리가 으스러졌기에 평생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신세가 됐다.
“상관부경!”
지부장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고인께서 뭔가 오해를 하셨구려. 문도들을 보내서 고인을 습격한 건 모두 저 놈의 짓입니다. 문도들을 신문해보시면 알 겁니다.”
이훤은 히죽 웃었다.
“알아. 자기는 문도들만 보냈다네. 그럼 살수는 누가 보냈을까?”
한순간 지부장이 멈칫했다.
이훤은 자연스럽게 지부장이 앉아 있던 서탁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운 학사가 준비했다는 값비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크어어! 퉤! 뭐 이런 거지같은 걸 술에 탔어?”
금가루를 보는 순간 미간을 좁혔다.
변화의 끝은 초심이라고 술은 술로 남을 때가 가장 좋았다. 지부장은 이훤의 종잡을 수 없는 언행에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하나 이훤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네 뒤에 누가 있지?”
“후우, 중원의 모든 하오문도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으면 이쯤 하는 것이 좋을 거요.”
“살수는 누가 보내줬지?”
“나는 모르는 일이외다!”
이훤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몸과 몸의 대화를 나눠야겠네.”
퍽!
지부장은 아랫배를 얻어맞고 혼절했다.
이훤은 그를 들쳐 업은 후 창밖을 바라봤다.
요란하게 들이닥쳤더니 사방에서 하오문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미끼답게 흔적을 남겨 볼까.”
그가 창을 박차고 몸을 날리는 순간 하오문도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동쪽이다! 동쪽에 적이 있다!”
*
화청궁은 여산 중턱에 위치했다.
하나 화려하기 그지없는 조경으로 인해 여산의 풍경보다 화청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복천적이 화청궁을 복원했을 뿐 아니라 몇 배 이상 증축했기 때문이다.
“자네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군.”
밀법대종사의 말에 복천적은 미간을 좁혔다.
“불청객마저 칭찬을 할 정도이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날 선 대화가 오고갔다.
전자는 서장삼대고수였고, 후자는 청해쌍괴라 불리던 노마두가 아니던가. 지리적으로 가깝다보니 예전부터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생사비무를 한 사이였다.
밀법대종사는 흑의인의 명령을 받고 화청궁에 왔을 뿐, 복천적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사색사도와 사군사도는 한 사람 밑에서 일하지만,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 밑에 있는 이들 또한 서로의 존재를 오늘에서야 알게 된 셈이다.
“흥! 곤륜파의 공적으로 몰려서 쫓겨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도 이렇게 부자가 되었으니 저승에 있는 네 동생도 참 좋아하겠다. 그치?”
밀법대종사의 비아냥거림에 금검노호 복천적은 발끈하지 않았다. 형제가 쌍괴라 불렸지만, 정작 동생을 죽인 건 형인 복천적이었기 때문이다. 사군사도의 돈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조롱했지만, 그 또한 서로 마찬가지였다.
“자네야 말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해. 포달랍궁과 혈불사의 합공을 받고 밀천동이 무너진 게 십 년 전이던가? 자네의 처자식과 제자들까지 모두 죽었다지. 그래도 자네라도 살아서 제사를 지낼 테니 참으로 다행이야.”
밀법대종사가 부르르 떨었다.
앙숙이었던 쌍괴에 비해 그는 직접적으로 가족을 잃지 않았던가. 애초에 말싸움을 하면 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결국 화사한 외모의 미인이 등장할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살기를 늦추지 않았다.
“종사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한 많은 소녀를 도와주시겠다니 감격해서 눈물이 마르지를 않네요.”
여인은 흑의인을 만났던 애난처럼 울상을 짓고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애처로운 모습에 밀법대종사는 헛기침을 연발했다.
“크흠! 애매께서 굳이 차를 내오실 필요는 없는데······.”
밀법대종사의 말에 애매(哀梅)는 소매를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또한 애난(哀蘭)처럼 소매 끝에 자신을 증명하는 화사한 문양의 매화를 새겨놓았다.
“이런 곳에 사내를 들였으니 누가 볼까 두렵더라고요. 하여 제가 직접 종사를 뫼실까 해요.”
“하하! 이거야 원. 내가 민폐를 끼쳤구만.”
복천적을 자신을 대할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웃고 있는 밀법대종사를 씹어 먹을 것처럼 응시했다.
“민폐인 줄 알면 꺼지라고.”
“이쪽도 흑의의 부탁을 받고 나선 길이라 말이지.”
스윽-
애매가 차를 내어주는 순간 그녀의 손이 밀법대종사의 주름진 손등을 스쳤다.
“휴우! 백의가 죽었고, 흑의가 한 발 앞섰으니 종사의 앞길도 창창하시겠네요. 저는 언제쯤 되어야 동무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지 아득하네요.”
“클클, 올 겨울을 화산에서 보낼 수 있지 않겠소?”
“흥! 네 놈 한 명으로 무슨 효과를 보겠는가.”
복천적의 비아냥거림에 밀법대종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미 대막의 혈천궁도 백 명이 이미 소화산에 이르렀네. 약조한 그 날이 되면 반대편에서 산을 오를 것이야.”
애매의 눈이 반짝였다.
표정은 여전히 슬픈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은 환희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혈천궁(血闡宮)의 궁도들은 피에 미친 살인귀나 다름없었다. 그들에 더하여 자신의 세력이 움직인다면 화산파를 도모하는 건 식은 죽을 먹는 것처럼 쉬울 터였다.
“그나저나 밖이 조금 시끄럽던데?”
밀법대종사의 말에 애매는 고개를 내저었다.
“복 대협의 뒤를 캐는 자가 있어서요. 삼황칠괴와 일대를 내려 보냈으니 금세 해결될 거예요. 종사께서는 대업을 그르치지 않게 혈천궁만 챙겨주세요.”
삼황칠괴(三荒七魁)라면 새외를 주유하던 노마들이 아니던가. 밀법대종사라고 해도 홀로 일곱을 상대하려면 한참 동안 시간을 끌어야 했다.
“허허, 그들을 보냈다니 어디서 초절정의 고수라도 뚝 떨어진 건가?”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지요. 그분들도 최근 할 일이 없으셔서 많이 심심하셨고요.”
밀법대종사는 차를 한 입에 털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믿고 준비하겠소. 참! 흑의가 묻더이다. 국화와 대나무는 아직도 남쪽의 일에 매달렸는지 말이오.”
애매의 눈매가 가늘게 변하더니 구슬 같은 눈물이 줄지어 흘렀다.
“서운하네요. 저를 앞에 두시고 다른 동무들을 챙기시려고 하다니······.”
“허허, 애매의 미색이 중원제일임을 어찌 모를까? 실언을 했으니 괘념치 마시오. 그럼 그 날 다시 봅시다.”
밀법대종사는 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복천적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놈을 믿을 수 없소. 아니, 애초에 흑의를 믿을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애매는 눈물을 훔쳤다.
“국화와 대나무를 거론하면서 난을 빼놨네요.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헉! 그렇다면 설마 흑의와 애난이 손을······.”
복천적의 다급한 물음에 애매가 말을 끊었다.
“일부러 알려준 거예요. 분명 애난이 그를 찾아가 저를 물 먹이려고 했겠지요. 흑의가 종사를 통해 알려줬으니 신세를 졌네요.”
“흑의의 속내는 참으로 알 수가 없소.”
“그럴 수밖에요. 그분께 처음 은총을 받은 게 흑의였어요. 열여섯의 사도 중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가장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잖아요. 그가 제게 빚을 지웠으니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예요. 제가 빚을 갚기 전에는 죽이지 않을 테니까.”
애매의 서글픈 한 마디에 복천적은 침음을 흘렸다.
그 또한 모든 사도를 마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단 한 명도 정상의 범주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홀려야 한다면 이쪽이 낫다.’
애매가 몸을 일으켰다.
“휴, 이제 관음동의 대법이 삼 일이면 끝나요.”
“제가 직접 경계를 책임지겠습니다.”
복천적의 다짐에 애매가 빙긋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지만, 그 모습마저 정인과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듯하여 가슴이 쿵쾅거렸다.
“삼 일 후에 뵐 게요.”
삼 일 후에 만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복천적은 그것을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소.”
*
용천대(龍泉隊).
이들은 화청궁 소속의 무인으로 오랜 세월 단련을 한 자들이다. 열 명의 조장은 절정의 무인이었고, 대주는 십오 년 전 절정에 이른 완숙한 고수였다. 심지어 일개 대원들마저 일류의 문턱을 오갔으니 정예(精銳)라고 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뭐 아는 것 없느냐?”
이훤이 피에 절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나 백여 명의 무인 중 누구도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훤과 삼황칠괴를 번갈아보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삼황칠괴의 합격술이면 초절정의 무인도 상대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지 않던가. 장성 일대에는 삼황칠괴의 이름만 대도 우는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고 했다. 일화는 무수히 많았고, 비사 또한 알음알음 전해졌다. 그만큼 삼황칠괴는 유명했다.
“으으. 살려······.”
삼황칠괴의 대형인 거검철괴(巨劍鐵魁)가 솥뚜껑만한 손을 들어올렸다. 이훤은 여전히 용천대를 응시한 채로 발을 내리찍었다.
콰직!
목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거검철괴는 손을 떨어뜨렸다.
“으으, 외공을 익혀서 그런가. 때려도 때려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네.”
이훤은 징그러운 걸 본 사람처럼 거검철괴의 시신을 몇 번이나 걷어찼다. 고깃덩이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시신을 뒤로 한 채 다시 물었다.
“아무 것도 모르냐?”
용천대주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을 건넸다.
“너는 누구냐?”
쇄애애애애액!
이훤이 던진 거검철괴의 검이 벼락처럼 공간을 찢어발기며 꽂혀들었다. 용천대주가 황급히 검으로 빗겨 치는 순간 허공에서 이훤이 내리꽂혔다.
콰직!
무릎에 찍힌 손목이 으스러졌고, 주먹에 얻어맞은 쇄골이 움푹 파이는 순간 용천대주가 무릎을 꿇었다.
이훤은 용천대주의 머리를 밟은 채 말했다.
“나는 질문을 하고, 너희들은 대답을 한다.”
용천대의 대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랐다.
이훤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입구라고는 하나밖에 없는 협곡에 들어선 상태였다. 한데 상대가 입구를 막고 있으니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도망칠 수 없었다.
“다시 묻는다.”
이훤의 입이 열리는 순간 대원들은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일단 술 가진 놈 있느냐?”
역시 향락의 중심지인 화청궁의 무인들다웠다.
이훤은 자신 앞에 놓인 술병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크하! 좋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 보자. 웃는 새끼나 우는 새끼를 본 적이 있는 사람?”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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