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65화 (65/226)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섬서성에서 가장 유명한 산이라면 응당 화산이다.

제아무리 종남파의 성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화산의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산이라면 의외로 여산(驪山)을 꼽았다. 화산과 종남산을 잇는 산세가 섬서성을 가로지르다 보면 어딘가에 걸리는 것이 바로 여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산은 사시사철 사람들로 붐볐다.

바로 온천(溫泉)이다.

보통 땅을 파다보면 어디선가 종종 뜨거운 물이 솟구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산의 온천을 으뜸으로 치는 까닭은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길을 뚫었고, 당태종이 온천 위에 궁을 지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당현종이 궁의 이름을 화청궁이라 바꾸고, 양귀비만을 위한 온천을 만들어줬다.

그 이름이 해당탕(海堂湯)이다.

‘해당탕을 지나야 신분이 확인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관음동이 나오는 건가?’

그런 화청궁은 당현종 말기 안사의 난으로 인해 잿더미가 되었다. 여기서 나타난 사람이 강호 칠대거부이자, 기행으로 유명한 복천적이다.

금검노호(金劍老豪)라 불리는 복천적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화청궁을 복원했고, 관부와 군부는 물론이고, 명문거파에 손을 써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보니 화청궁의 이름은 예전과 다른 의미로 하늘을 찔렀고, 이제는 부자들의 유흥지가 되어 외인을 출입을 엄금했다.

그나저나 복천적은 누구지?”

이훤은 주루에 눌러앉은 매담자가 지껄이는 화청궁의 역사를 엿들으며 침음을 흘렸다.

‘내가 어지간한 부자들하고는 다 친했는데 말이지.’

물론 그만의 생각일 뿐이다.

회귀 전 술을 마실 돈이 부족할 때마다 부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이훤을 혐오하고, 기피했을망정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니 못했으리라. 취마가 광야제로 돌변하는 순간 마을 전체가 쑥대밭으로 변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저 똥이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며 돈을 건넸다. 어쨌든 회귀 전 복천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금검노호나 화청궁의 주인이라면 응당 기억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기억에 없다.

예전이었다면 알지 못했으리라.

하나 개미굴의 일을 겪으며 어렴풋이 적의 행동 방식을 알 것 같았다.

‘아마 그 놈도 세뇌됐겠지.’

그리고 관음동의 일이 마무리되면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출 터였다. 시선을 돌려 주루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여산을 올려다봤다. 여산 중턱에는 화려한 전각군이 머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화청궁 너머 어딘가에 소마가 유혹하듯 말을 남겼던 관음동이 존재할 터였다.

“그 안에 뭐가 있을까?”

이훤은 술잔을 기울이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아무래도 술이 있으면 가장 좋으리라.

하나 낭만을 모르는 적들이 술처럼 좋은 것을 숨겨뒀을 리 만무했다.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관음동에 있을 법한 무언가를 궁리해봤다. 그 과정에서 열여섯 병의 술이 사라졌고, 점소이의 불안한 눈빛을 마주하게 됐다.

“중간 정산을 해줄게.”

이훤의 말에 점소이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아이고! 대협께서 이렇게 배려해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일단 지금까지 드신 금액이······.”

“아! 계산은 이쪽이 할 거야.”

고천락이 혀를 내두르며 맞은편에 자리했다.

“진짜 어떻게 아는 거지?”

귀호영체술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점소이를 가리켰다. 점소이는 은자 주머니를 받고 희희낙락하여 자리를 떴다.

“그냥 알게 돼. 너도 알잖아. 절정과 초절정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어.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한다고 해서 알 수가 없지.”

이훤이 거드름을 피우듯 말하자 고천락은 입술을 삐죽였다. 인왕전에서 자신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초절정이 아니었지만 따지지 않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화청궁의 별명이 뭔지 알아요? 소항주랍니다. 항주의 향락을 화청궁 내에 고스란히 옮겨뒀데요. 그런데 막상 화청궁 내에 뭐가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해요. 뭐가 있기는 있나 봐요.”

“화산은?”

“큰 형님은 본산으로 가셨어요. 무림맹 섬서지부 쪽은 잠입할 방법을 찾았어요. 형님이 원하는 때에 서찰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아무래도 저기를 그냥 들어가는 건 포기해야겠어.”

고천락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화청궁으로 쳐들어갈 줄 알았는데요. 설마 겁먹은?”

“훗, 무인들만 있으면 그랬겠지. 한데 저 안에는 강호와 상관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방벽처럼 데리고 있는 거겠지. 놈들을 끌어내야겠어.”

술꾼이 되고 싶었지, 범죄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관부와 얽히는 순간 강호의 묵계도 그를 지켜줄 수 없으리라. 귀찮은 일에 연루되는 것만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형님도 생각을 하는군요.”

“당연하지. 나는 술주정뱅이지, 바보가 아니란다.”

고천락은 미심쩍은 표정을 보였다.

“설마 저보고 미끼가 되라는 건 아니겠지요?”

“미끼는 따로 있어.”

“그럼 저는 뭘 하는데요?”

“놈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경계가 느슨해질 거야. 그 때 불을 지르거나, 소문을 퍼트려. 외부인들이 빠져나가면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거야.”

이훤의 명령에 고천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형님은요?”

마지막 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오문에 갈 거다.”

*

하오문의 표식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데 하오문의 여산 지부는 화산 아래와 달리 번화가의 중심부에 위치했다. 심지어 주루의 별관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초객이신데 어떻게 알고 오셨소이까?”

자신을 종 학사라 밝힌 관리인은 이훤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이훤은 갑급 고객의 음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하오문을 처음 방문한 사람처럼 주변을 살폈다.

“아! 그냥 건너 건너 들어서 왔소.”

“흐음, 초객은 선불이 원칙인데······.”

이훤은 사람의 머리통만한 주머니를 꺼냈다.

그가 손을 넣어 휘젓자 은자 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뒤이었다. 잠시 후 은자 열 냥을 꺼낸 후 탁자 위에 던지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하하, 충분합니다.”

종 학사는 돈을 마다하는 사람이 없다는 격언처럼 환히 웃으며 은자를 거둬들였다. 하나 눈빛은 처음보다 더 깊이 가라앉았다.

“그래, 무엇을 알고 싶어서 오셨소이까? 화청궁의 출입증이나 근처 홍등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겁니까?”

일견하기에도 이훤을 무시하는 말투였다.

하나 이훤은 강호초출처럼 눈을 끔뻑일 뿐이다.

“다 필요 없고! 화청궁을 복원했다는 복천적이라는 자의 신상과 자금 출처, 그리고 궁 내부의 은밀한 공간이라는 관음동에 대해서 좀 알고 싶소.”

종 학사의 눈빛은 이훤의 말이 이어질수록 가늘어졌다.

“글쎄요. 이걸로는 부족할 만큼 중요한 정보인데.”

이훤은 히죽 웃으며 커다란 주머니를 흔들었다.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알겠습니다. 대신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시간이 하루 정도 필요합니다. 어디로 연통을 드리면 될까요?”

“길 끝의 태평객잔으로 사람을 보내시오. 잔금은 그때 치르리다.”

종 학사는 아들 뻘인 이훤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하오문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부탁하겠소.”

이훤은 아랫사람을 격려하듯 종 학사의 어깨를 두드린 후 지부를 빠져나왔다. 종 학사는 벽에 붙은 족자를 치운 후 작은 구멍을 통해 말했다.

“지부장께 잠시 뵈었으면 좋겠다고 전해라.”

*

이훤이 말했던 미끼는 자기 자신이다.

그가 지금껏 겪었던 신비조직이라면 화청궁에서 음모를 꾸밀 때 하오문의 지부를 그냥 뒀을 리 만무했다. 세뇌가 특기인 놈들이니 무슨 수를 써도 썼으리라.

이훤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저자를 내려다 본 후 침상에 몸을 던졌다.

“어느 쪽이든 내가 손해 볼 건 없지.”

여산 지부가 신비조직과 관련이 없다면 원하는 정보를 얻고, 건방진 후기지수로 남으면 될 일이다. 하나 신비조직과 관련이 있다면 복천적과 관음동을 거론한 이상 자신을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꼬리부터 하나씩 자르다보면······.’

언젠가 머리가 알아서 나타날 것이다.

이훤은 술병을 비운 후 눈을 감았다.

하나 채 잠이 들기도 전에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급하기는 엄청 급한가 보네. 최소한 삼경 정도까지는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혈륜을 휘돌리는 순간 문밖의 대화가 들려왔다.

“돌아와서 술을 열두 병이나 비웠답니다.”

“허허, 돈 많은 강호초출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군. 버릇없는 놈이라니 죄책감도 덜하고 말이야. 이거 그냥 횡재하는 거잖아.”

“뒷배는 없어 보이니 깔끔하게 정리하라고 하더이다.”

“깔끔은 무슨. 이 동네에서 하루에 사라지는 놈이 몇인지 알기나 하는가? 아무도 신경 안 써.”

저것들은 진짜 하오문에서 보냈으리라.

혈륜을 휘돌려 오감을 증폭시켰고, 그 방향을 창밖으로 정했다.

이번에는 세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회귀 전에는 자주 느꼈던 종류의 것이다.

‘아! 내가 살수를 그리워할 줄이야.’

살수(殺手)는 체질적으로 일격필살의 무공을 익히고, 기척을 감추는데 능해야 했다. 그렇기에 수련할 수 있는 무공이 한정적이다. 그러니 살수의 무공이 완숙한 절정의 경지만 이뤄도 일급으로 평가되며 두어 단계 윗줄의 고수를 죽이는 것이 가능했다.

딱 봐도 하오문에서 다룰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저쪽이 진짜로구나.’

이훤은 기세 좋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방문의 아랫부분을 통해 연기가 스며들었다.

하오문에서 산공독처럼 귀한 것을 쓸 리 없으니 기껏 해야 수면향이거나 미혼향일 터였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연기를 빨아들여보았다.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미혼향 중에서도 싸구려 하품이었다. 이내  저자에 안개가 깔린 것처럼 방안에도 연기가 자욱했다.

끼이익-

“일단 배에 칼 한 번 박고 끌고 나가자.”

두 명을 복도를 경계하고, 여덟 명이 들어섰다.

이훤은 하오문도가 지척에 이르는 순간 침음을 흘렸다.

“으으, 너희들 뭐야?”

“쳐!”

몸을 비틀어 아랫배로 내리꽂히는 칼을 피했다.

푹! 푹! 푹! 푹! 푹!

오리의 깃털을 넣어 만든 값비싼 이불이 찢겨나갔다. 깃털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사이로 적들이 짓쳐들었다. 제법 무공을 수련한 듯하지만, 일류나 될까할 실력이다.

“크흑! 이 새끼들이!”

이훤은 비틀거리면서도 주먹과 발을 놀렸다.

서너 명이 나뒹굴었고,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효과가 있어. 몰아붙여!”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짜증 섞인 일갈을 내뱉는 사이 살수들이 움직였다. 한 명은 복도 쪽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하오문도 두 명을 정리했다. 그리고 안개와 깃털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서서히 다가왔다. 동시에 창문이 슬쩍 열리더니 두 명의 살수가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아, 지겨워.’

이훤은 그 모든 것을 눈과 귀, 내력으로 느끼면서도 힘겹게 하오문도들과 박투를 이어가야 했다.

잠시 후 하오문도의 칼이 가슴을 스쳤다.

옷이 잘리고, 피부가 옅게 베이는 순간 이훤의 몸은 허우적거리며 벽 쪽으로 향했다. 그 때 세 명의 살수가 하오문도들 사이에서 동시에 협봉검을 내질렀다.

“새끼들! 조심성은 많아가지고.”

이훤의 짜증 섞인 한 마디에 살수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쾅!

하나 암천군림보를 펼치는 순간 눈앞의 표적은 안개처럼 흩어졌고, 붉은 안개가 연기에 섞여드는 순간 세 명의 살수는 동시에 아랫배와 턱을 얻어맞고 혼절했다.

“어! 어! 뭐야?”

하오문도들이 웅성거렸다.

이훤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살수들을 구석에 던져 놨다. 그리고 하오문도들을 향해 돌아서며 주먹을 쥐락펴락 했다.

“살인을 우습게 여겼으니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하오문도가 입술이 달싹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주먹이 꽂혀들었다.

콰직!

턱이 통째로 으스러졌고, 두 발목 또한 같은 꼴이 됐다. 하오문도들은 으스러진 발목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수고를 무릅쓰고, 놈들을 점혈했다. 아마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이훤은 침상을 들어올렸다.

침상 아래에는 낮부터 준비해놓은 수십 병의 술이 보기 좋게 줄지어 놓여 있었다. 원래 술을 함께 마시면 가슴을 탁 터놓고 대화하게 되는 법이다.

“자! 진솔한 대화를 나눠볼까.”

이훤은 살수의 입안에 박혀 있는 독단을 제거한 후 술을 들이부었다.

콸콸콸콸.

< 27, 붉은 안개가 산을 덮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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