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64화 (64/226)

<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3) >

아무래도 이훤의 당부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고천락은 육포를 옆구리에 낀 채로 낙안봉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운치 가득하던 눈밭이 올라갈 때에는 늪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소마가 분명해.’

도둑의 필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눈썰미였다.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고, 함정을 찾아내야 했으며 적의 접근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야 했다.

고천락은 태생적으로 눈썰미가 좋았다.

그런 그가 방 숙수와 대화를 나눈 묘한 사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활처럼 휜 눈매와 기괴할 정도로 과장되게 올라간 입꼬리만 봐도 인왕전에서 보았던 소마가 분명했다. 그리고 좌우사자를 말 한 마디로 조종하는 기이한 관계도 목격한 바였다.

‘저 소름 돋는 새끼가 왜 여기서 나타난 거지?’

이훤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소마는 어용협에서 무당파를 급습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이훤에게 걸려 도망쳤고, 절명곡에서 죽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천락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여간 술 좀 작작 쳐드시라니까! 원수라면서 제대로 죽이지도 못한 거요?”

그는 의형을 탓하며 바삐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노군동을 지나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서야 했다. 낙안봉으로 통하는 장공잔도는 제대로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오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고천락은 철심에 발이라도 올렸다가 광풍에 쓸려갈지도 모를 만큼 위태로웠다.

쉬이이이이잉-

고천락은 슬쩍 상체를 내밀었다가 바로 물러났다.

따귀를 때리는 듯한 바람에 혼이 쏙 빠지는 듯했다.

결국 옆구리에 끼고 있던 육포를 씹으며 한참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건 의욕이나 의리의 문제가 아닌데······.”

그 때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컹컹!

*

강기와 강기는 어느새 검기와 검기로 바뀌었다.

거친 숨소리가 주원경에 가득했다.

그리고 검기마저 사그라진 후 두 자루의 검이 맞부딪쳤다. 부딪치고, 흘려내고, 빗겨서 치고, 올려치고, 내려치는 가운데 파열음이 들려왔다.

쩡!

이미 날이 상할 대로 상한 검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검신의 중간부분이 거미줄처럼 금가더니 결국 두 동강이 났다.

“후우, 더 하기 힘들겠는데요.”

“흥! 하루 종일도 할 수 있다!”

이훤은 호기로운 노군의 대답에 턱짓을 했다.

그곳에는 노군의 부러진 검이 꽂혀 있었다.

“맨손으로 하시게요?”

결국 노군은 침음을 내뱉은 후 콧김을 뿜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이훤이 먹다 남은 술병을 들고 목구멍에 들이붓는 것이 아닌가.

“형님!”

“크아아아아아아! 잘 놀았다!”

이훤의 만류에도 병을 다 비운 노군이 괴성을 질렀다. 그러더니 그 말을 끝으로 대자로 누운 채 금세 드렁드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

홀로 남은 이훤이 주변을 살폈다.

몇날며칠 동안 쉬지 않고 비무를 했더니 주변은 아수라장이 됐다. 마치 태풍이 갈대밭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다.

“나 혼자 치워야 하는 건가?”

승리에 대한 기쁨은 잠시도 누리지 못한 채 싸리비를 챙겨야 했다.

쓱쓱쓱쓱쓱-

보통 사람이라면 더러운 것을 치웠을 때 깨끗해지는 광경이 즐거울 터였다. 하지만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급성장하고, 일생의 숙원이었던 경공까지 완성했다. 그러다 보니 싸리비를 흔들면서도 한 숨만 흘러나왔다.

“형님, 자는 척 하는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기분 좋을까봐 일부러 깽판치시는 거죠?”

하나 노군은 취기로 인해 시뻘게진 얼굴로 낙안봉이 떠나가라 코를 골아댈 뿐이다.

“아! 역시 나를 알아주는 건 술뿐이로구나.”

그 때 주원경 밖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고천락이 사색이 된 채 손을 흔들었다.

평소였다면 허락 없이 올라온 녀석을 혼내줬으리라. 하나 허망한 마음을 달래기에 저만한 녀석이 또 어디 있으랴. 그 마음을 담아 진법을 개방했다.

“형님!”

“어, 그래! 잘 지냈지? 노군동에는 별 일 없었고?”

이훤이 반갑게 웃으며 말하자, 고천락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거짓말이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그러다 보니 전후사정을 밝히지 않고 대뜸 놈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형님, 그 새끼가 살아 있던데요.”

“그 새끼?”

“소마요. 그 때 인왕부에서 문후라고 불렸던 그 웃는 새끼요. 그 새끼가 살아 있어요. 제가 봤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훤의 밝음은 산산이 깨졌고, 그 자리를 어둠이 채웠다. 어둠은 불같이 노했고, 그 증거로 귀화(鬼火)가 폭발하듯 번져나갔다.

“그 개새끼가 어떻게 살아 있어!”

한순간 모든 감정이 사라진 채 분노와 살의만이 전신을 가득 채웠다.

수십 대를 때렸다.

혈륜을 밀어 넣어 혈맥을 찢었다.

그 결과 뇌가 뭉개지고, 칠공에서 피를 흘렸다.

놈은 오줌과 똥을 동시에 쏟아내면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던가. 하나 그냥 내버려두었다. 결국 놈은 업화의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놈의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심장을 으깨고, 목을 부러트렸다. 절벽의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쳐 사지가 이리저리 꺾이면서 사라진 것이 놈의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살아있다고?’

미간이 저절로 내 천(川)자를 그렸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하나 이훤 역시 죽은 후에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불사지체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를 아우르는 지혜를 지녔고, 죽지도 않는 자가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현생에서만 그랬다면 확신할 수 없다.

하나 회귀 전의 소마도 그러했다.

놈은 앞으로도 이십 년 동안 누군가의 밑에서 명령을 받고 움직일 터였다. 죽지 않는 자가, 또는 죽었어도 다시 살아나는 자가 그렇게 살 리 없다.

“자세히 설명해 봐.”

고천락은 웃음기를 지운 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상세히 전했다.

“그리고 떠났어요.”

이훤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제아무리 술이 좋아도 마신 것보다 마시지 않았을 때의 머리가 더 맑았다. 혈륜이 휘도는 순간 숙면을 취한 것처럼 몸이 개운했고, 사소한 정보들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노도(怒濤)와 같이 거세게 몰아치던 기억은 회귀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놈인가?’

회귀 전 소마와 인왕전에서 본 소마는 달랐다.

그저 웃는 얼굴이 너무 인상적이기에 무심코 넘겨버린 기억이었다. 회귀 전 이훤과 십 수 년을 함께 한 그는 조금 더 키가 컸고, 허리가 구부정했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변했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다르다. 확실히 달라!’

이훤은 절명곡에서 소마가 죽었을 때를 떠올렸다.

놈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 가면이 깨진 것처럼 웃음을 잃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하여 인왕의 수족이었던 좌우사자와 초도각의 숙수였던 방 씨의 언행이 더해졌다.

‘방 숙수는 경박한 사람이 아니야. 정무관주 양통이 돈을 밝히는 것처럼 보였어도 관도들을 끔찍이 아낀다는 걸 끝내 숨겨주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기부금을 몇 푼 냈다고, 매화검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털어놓을 리 없어. 이건······.’

마침내 정보의 물결이 답을 내놨다.

“분명 미······.”

노군이 벌떡 일어나 이훤의 말을 낚아챘다.

“헉! 미혼술이더냐?”

이훤은 눈을 흘겼다.

‘역시 안 잤군.’

하나 지금은 그것을 탓할 여력이 없다.

그래, 노군의 말처럼 미혼술(迷魂術)이라면 모든 의문이 해소됐다. 누군가 소마에게 웃는 탈을 씌웠고, 소마는 거기서 받은 능력으로 필요한 이들을 세뇌해서 부려먹었으리라.

‘그렇게 부려먹으려면 많을수록 좋지.’

소마가 여럿이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훤은 결연한 표정을 한 채 노군에게 다가갔다.

“형님, 저 하산해야겠습니다.”

“사숙을 뵙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냥 내려가도 되는 것이더냐?”

하늘을 올려다봤다.

얼마 전에 첫 눈이 내렸고, 곧 겨울이 찾아올 터였다. 하지만 폐관수련장의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급한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옳으리라.

“지금은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함께 가자! 방 숙수를 홀렸다면 화산을 능멸한 것이나 다름없어.”

“그럼 스승님은 누가 챙기고요?”

노군은 침음을 흘렸다.

이훤은 빙긋 웃으며 싸리비를 건넸다.

“걱정하지 마세요. 매화검주보다 강한 사람이 하산할 것이나 금세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뭐라고? 이 놈아! 검이 부러진 거지. 승패가 어디 있더냐? 다시 한 번 붙어보자. 이번에는 내가 매화검을 가지고 올 것이야!”

“다녀온 다음에 제대로 해보자고요. 저도 몸이 덜 풀린 것 같아서 아쉬웠습니다.”

“흥! 제대로 하면 너 죽어. 그나저나 어디로 갈 건데?”

“여산에 갑니다.”

노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여산은 왜?”

“뒈지고 싶은지 초대장을 보냈더라고요.”

이훤은 그대로 포권을 한 후 돌아섰다.

노군은 황급히 산 아래서 짊어지고 온 보퉁이를 뒤지더니 말린 고기와 검 한 자루를 내놓았다.

“이거 가지고 가.”

“간식이야 이해할 수 있는데 저 검은 뭡니까?”

이훤은 일견하기에도 거금을 주고서야 살 수 있을 법한 검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노군은 헛기침을 연발하더니 턱짓으로 검을 가리켰다.

“화산에 입문하지 않을 거라며? 그래서 오다가 그냥 샀다. 아무리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선물 받은 검을 놓고 다니진 않겠지?”

이훤은 검을 움켜쥐었다.

회귀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선물 받아보지 못한 물건이다. 검집을 휘감은 가죽과 손잡이에 멋들어지게 엮인 수실로 보아 한두 푼으로 살 수 있는 검이 아닐 터였다.

하나 녹슨 검이었어도 감사히 받았으리라.

“고맙습니다.”

“가! 급하다며? 네 말대로라면 무림맹 산서지부를 통해 소문이 퍼졌다면 화산도 대비를 해야 할 터, 나는 본산으로 가야겠다.”

이훤은 포권을 한 후 검을 품에 앉은 채 낙안봉을 내려왔다. 고천락이 쫄래쫄래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장공잔도 앞에 선 이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너 여기 어떻게 건너왔냐?”

고천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정도는 그냥 건너죠.”

그 때 맞은편 절벽에서 안주가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너 설마······.”

고천락은 고개를 숙였다.

하긴 나무 위도 뛰어다니던 안주가 아닌가.

이훤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저 놈의 개는 도대체 정체가 뭐야?’

노군동을 지나는 순간 입가의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북풍의 한설처럼 냉랭한 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좋았던 기억은 남겨둔 채 회귀 전의 더러운 기억만 가진 채 하산하는 셈이다. 그러던 중 절명곡의 소마가 죽을 때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 슬픔이 다가와 너를 슬프게 하리라.

그렇지.

기쁜 놈이 있으니 슬픈 연놈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누가 됐든 소마와 관련된 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베어버릴 것이다.

‘하! 새끼들, 재밌게 노네.’

이훤은 고천락에게 말했다.

“넌 여산 주변에서 정보 좀 모아봐.”

“형님, 나도 조금은 무섭단 말이오. 무공이라도 가르쳐주시던가.”

“일단 이 일부터 해결하자.”

고천락은 투덜거리면서도 하오문과 인근 중소방파의 동향을 살피러 떠났다.

이훤은 암천군림보를 극성으로 펼치며 내달렸다.

단순히 한정된 공간에서만 신위를 발현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들판을 질주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파파파파파팟!

*

화산을 내려왔던 흑의인(黑衣人)은 여산 근처의 안가로 들어섰다. 그는 문을 닫자마자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오셨소이까?”

악기를 연주하듯 고저가 분명한 목소리는 듣기가 좋았다. 하지만 흑의인의 물음에 대답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비통함이 가득하여 듣는 사람을 서글프게 만들었다.

“흑, 우리가 이렇게 내외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기둥 뒤에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인(美人)이다.

얼굴에는 명가의 기품과 창기의 교태가 공존했고, 특히 눈꼬리가 쳐져서 눈물이 맺힌 듯한 눈매가 시선을 끌었다. 일견하기에도 화사한 처자의 느낌보다 낭군을 잃은 미망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내외하지 않으려면 정체를 알아야 할 터. 누구라고 불러드리오리까?”

흑의인의 물음에 여인은 소매로 들어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소매 끝이 펼쳐지며 명사가 그린 듯한 난초가 찰나간 모습을 보였다.

“애난께서 어인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애난(哀蘭)이라 불린 여인은 시름 가득한 한 숨으로 말문을 열었다.

“먼저 두 가지만 물을 게요. 백의인이 죽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개미굴에서 무당의 유산을 얻을 뻔 했다지요. 사색사도(四色使徒) 중에서 으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웃는 얼굴로 그러니까 이상해요.”

“애난께서도 슬픈 얼굴로 좋아하시니 이상하군요. 어째서 사군사도(四君使徒) 쪽에서 사색사도의 일에 관심을 보이실까요?”

“그 쪽은 한 명이 사라졌지만, 이쪽은 사군자가 모두 남았거든요. 부럽고, 애달프고, 지치네요.”

흑의인은 환하게 웃었다.

“제가 관음동의 일에 개입한 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애난은 아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거푸 한 숨을 흘렸다. 범인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가산을 탕진하고, 조강지처를 버리고, 스승을 배신할 수 있을 만큼 고혹적이었다.

“밀법대종사에 혈천궁까지 불러들이셨으니 화산은 이번 위난을 넘기기 어렵겠네요. 다른 아이가 저보다 앞서 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요.”

흑의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밀법대종사와 혈천궁의 개입까지 알고 왔다면 바라는 것이 있으리라.

그는 입꼬리를 귀에 건 채 말했다.

“화산의 유산을 애난에게 달란 의미인가요?”

“흑의처럼 거기에 더하여 사군자 중 한 명이 사라진다면 더더욱 괜찮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해드리지요.”

애난이 눈을 흘기듯 흑의인을 노려봤다.

그 모습조차 심장이 멈출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신 줄 몰랐는데요?”

“저는 따로 가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화산에 신마의 유산말고도 남은 물건이 있던가요.”

흑의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을 하나 가지고 싶어서요.”

<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3)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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