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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63화 (63/226)

<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2) >

쩡!

노군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훤은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초도각의 평범한 관도였다. 한데 지금은 자신과 싸워도 밀리지 않을 만큼 성장하지 않았는가. 마르지 않는 내공이야 기연을 얻었다고 치자. 아니 그것도 의아하기는 했다. 도대체 무슨 기연을 얻어야 부작용 없이 저렇듯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백전노장처럼 노련하게 싸우는 모습은 아무리 높이 쳐줘도 스무 살의 청년처럼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강기까지!’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검기(劍氣)를 통해 절정을 경험한다면 검강(劍罡)이야 말로 독보강호(獨步江湖)의 초석이 될 수 있는 절예였다.

초절정의 상징.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경지.

그것이 강기로 시작됐다.

강기는 존재한다는 것만 알지, 평생 구경도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구파오가를 비롯한 명문의 후예라고 해도 선택받은 소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신위였다.

한데 약관을 겨우 넘긴 무소속의 술주정뱅이가 어려움 없이 펼치고 있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다. 두 번째 강기가 한 번 더 내리꽂혔다.

텅!

처음과 다름없이 강맹하고 정순한 기운이 빛무리처럼 전신을 짓눌렀다. 자신의 강기와 비교해도 부족함을 느낄 수 없다. 아니 정순함만 논하자면 화산의 기공(氣功)으로 만든 내공보다 나을 정도였다.

“끄음.”

노군은 침음을 흘리며 밀려났다.

제아무리 노회한 그라고 해도 갑작스럽게 펼친 강기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강호의 오랜 경험으로도 쉬이 적응하기 난해했다. 다행히 작은 손해를 봤을 뿐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

‘만약 살의를 담았다면 더 위험했을 수도······.’

두 사람 모두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어쨌든 대결의 계기는 암천군림보(暗天君臨步)라는 것의 시연이 아니던가.

노군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예전에 네가 펼치던 보법은 공간을 장악하는데 탁월했다. 즉 내공의 우위를 바탕으로 기세를 드러내니 힘은 가득했으나, 움직임 자체는 단조로웠지. 한데 이것은 의와 형이 제법 균형을 이뤄 속도까지 끌어올렸구나. 암천군림보라고? 기세 좋은 이름이로구나. 그리고 어울린다!”

이훤은 노군의 평가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생각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비록 암향표의 초식은 버렸지만, 상승 경공의 운용에 대한 깨달음은 잊지 않았다. 그것을 활용하여 군림압보를 개량했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암천(暗天)과 군림(君臨)을 동시에 취한다.

이훤은 이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 성과가 연이어 펼쳐졌다.

쩡-

강기가 충돌할 때마다 공간에 파장이 일었고, 숲은 요동을 치며 잎사귀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장소를 옮기자! 주원경이 뿌리째 뽑히겠구나!”

노군의 장소성이 광풍과 함께 주원경에 울렸다.

삼십 년 전부터 망아취자를 위해 술을 주조하기 위해 강제로 은거하다시피 했던 그가 아닌가. 그렇기에 전력을 다해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즐겁기만 했다.

“크하하! 단순히 보법만 얻은 건 아니로구나!”

“형님도 술 빚으시면서 잊지 않으셨군요.”

터터터터터텅!

“엇! 다시 눈깔이 빨개진 것을 보아하니 이번에는 제대로 오려는 게냐?”

“하하하! 예전과 다를 겁니다. 이제는 오가 아니라 칠이 되었거든요!”

이훤의 폭소에 노군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뭐가 됐든 칠 성에 이르렀다면 좋지 아니한가. 잊지 마라. 정사마의 구분보다 중요한 건 펼치는 자의 마음이다. 네가 올곧다면 마공을 펼쳐도 올곧을 것이다! 네가 흔들린다면 정공을 펼쳐도 삐뚤어질 것이야!”

쇄애애애애액!

검 끝에 맺힌 붉은 강기가 더더욱 거세게 일어나더니 마치 전신을 휘감을 것처럼 타올랐다.

“취!”

정사마(正邪魔)로 대변되는 세상에 취(醉)를 더하겠다는 술꾼의 결의였다.

“그래, 오너라! 내가 정이다!”

*

고천락은 하품을 했다.

눈 덮인 화산을 보며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이게 얼마만의 여유더라?’

그 또한 이훤처럼 화산에서 보내는 안전한 시간에 젖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회귀 전 고난을 겪었던 이훤과 달리 고천락은 아직 혈기 왕성한 청년이 아니던가. 그의 손가락은 며칠 전부터 저절로 꼼지락댔다. 옆구리에 낀 안주는 고천락의 손놀림을 즐기듯 늘어지게 하품을 연발했다.

“안 되겠다!”

고천락은 벌떡 일어났다.

화산 근처를 돌며 뭐라도 하나 훔쳐야겠다는 의무감이 가득했다. 이훤의 당부가 있었지만, 이미 그는 면죄부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장문인은 이훤이 암향표를 대성했다며 장래가 기대된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방해를 하면 안 되니 자신이 다녀간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대신 노군이나 이훤이 하산할 때 전갈을 해달라며 명적을 주고 떠났다.

‘후훗, 이 몸은 화산 장문인하고 어깨동무하던 사이란 말이지!’

고천락은 윗옷을 들어 요대를 살폈다.

종남파의 명패 외에 화산의 명패가 함께 엮여 있었다.

화산 장문인이 선물로 주고 간 것이다.

“이러다가 구파의 명패를 모두 모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는 키득거리며 안주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도둑질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만에 하나 걸리더라도 믿는 구석이 생긴 게다.

“노군 형님도 낙안봉에 올라갔으니 더 이상 찾아올 사람도 없겠지?”

고천락은 혼잣말을 하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는 자연스럽게 창룡령을 따라 내려갔다.

컹컹!

안주가 만류하듯 짖었다.

“맛있는 거 훔쳐올게!”

고천락의 도벽은 이훤의 술처럼 끊을 수 없는 기행이다. 하나 이훤이 미친 듯이 술을 마시는 것과 달리 항상 단계를 거쳤다. 상대를 확인하고, 목표를 설정한 후 처소를 살폈으며 퇴로까지 만들어놔야 행동했다.

오랜만의 일거리니 쉬운 것부터 할 생각이다.

“일단 형님한테 들었던 초도각의 주방부터 시작을 하자!”

도가문파인 화산파는 기부를 통해 초도각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러니 풀떼기 외에도 자신과 안주가 먹을 만한 상품의 재료가 즐비할 터였다.

“아! 젠장, 왜 이렇게 미끄러운 거야?”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내공 없이 균형감각만으로 창룡령을 지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된 무공을 익혀야겠다는 다짐을 백 번쯤 했을 무렵 창룡령을 탈출했다.

“후아, 인왕전에 숨어들 때보다 더 힘들었다.”

초도각은 일 년 동안 많이 변했다.

일단 새로운 관도들을 받지 않았다.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들은 노군의 등장 이후 화산의 중흥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기에 외부의 자금을 통해 운영하던 초도각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이 필수였다. 결국 온건파의 대표였던 초도각주 소요자와 강경파의 대표였던 유리검 유건평이 삼일 밤낮을 토론한 끝에 노선을 정했다.

“지금 관도들은 챙겨주되 다음부터는 예전과 같이 제자를 받아들이도록 결정했습니다.”

현재 수련 중인 관도들은 성품과 자질을 중심으로 평가하여 본산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그 외에는 속가방파와 연계하여 살 길을 열어줬다. 그리고 차후에는 이대제자들이 강호에 나가 인연이 닿는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옛 화산의 기풍(氣風)으로 돌아가게 된 셈이다.

“다 좋게 되었지. 우리만 빼고.”

초도각 정무관도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방 숙수는 뜨끈한 차를 마시며 한 숨을 내쉬었다. 정무관주 양통을 이해해줬던 그는 이훤에게 닭을 고아주기도 했을 만큼 성품이 좋았다. 하나 일 년 사이 그는 십 년 이상 늙은 것처럼 초췌하기만 했다. 그 앞에는 웃는 낯이 인상적인 사내가 화답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고인들도 다른 뜻이 있으시겠지요.”

방 숙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초도각의 무관주들은 각기 본산에 오르거나, 인근 방파의 무사부로 자리를 옮길 터였다. 하나 각 관을 담당하는 숙수와 총관은 살 길이 막막했다.

“있기야 있지. 화음현에서 유명한 주루에 추천을 해주겠다더군. 하지만 말이야.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넘겼네. 지천명이라지?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나이잖아. 하여 나는 화산에 뼈를 묻을 생각으로 여기에 왔던 것이야. 한데 나만의 소망이었던 게지.”

“어르신의 희생 덕분에 관도들도 편히 지냈을 겁니다.”

방 숙수는 고개를 내저은 후 사내의 손을 맞잡았다.

“아니지. 자네와 같이 남몰래 선행을 베풀던 이들로 인해 초도각이 유지되었던 거지.”

사내가 환히 웃었다.

눈은 활처럼 휘었고, 입술은 귀에 걸릴 듯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방 숙수는 사내의 웃음에 중독된 것처럼 방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겠는가? 어떤 관도와 인연이 있기에 후원을 하고 있는 겐가?”

“바삐 살다보니 옛 의형이 돌아가신 것도 몰랐습니다. 형님이 남기고 가신 아들을 찾다가 이곳에서 발견했지요. 하나 천박하게 돈이나 조금 벌었을 뿐 화산의 품에 들어간 아이에게 내세울 것이 없더이다. 하여 자그마한 성의 표시만 했던 것이지요.”

사내가 짐짓 겸손하게 말했지만, 방 숙수는 오늘따라 끈질기게 캐물었다.

“하시게. 괜찮아. 일 년이지만 다 내 손자 같은 아이들일세. 자네가 말한다고 하여 편애하고 그러지는 않아.”

“이훤이라 합니다.”

방 숙수는 탄식했다.

사내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혹시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끄음, 그게 아니라······.”

방 숙수가 말끝을 흐리자, 사내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동안 저를 보셨다면 믿을만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사내의 설득이 효과를 보았을까.

방 숙수는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이훤은 초도각을 떠난 지 오래라네. 언제였더라? 원가휘와 비무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지. 그 후 사라졌어. 한데 일전에 각주께서 훈시를 하실 때 관도들의 장래성을 논하셨지. 그 때 이훤을 예로 드셨네.”

그는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코를 벌름거렸다.

“잠깐! 어디서 육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이런 날씨에 육포 냄새가 날 리 있겠습니까. 지금 하시던 말씀을 계속 해주시지요.”

“어! 아, 그렇지. 어쨌든 이훤은  노군의 눈에 들어 낙안봉에 올랐다지. 하여간 자네는 잘 됐어. 자네의 조카는 앞길이 창창하다네. 축하해. 하하! 나까지 기분이 좋군. 이거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하는 건가?”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노군이라고요? 매화검주요. 그 분 말고 다른 사람은 없나요? 예를 들면 더 나이가 많은······.”

방 숙수는 손사래를 쳤다.

“어이쿠! 당금 화산의 큰 어른은 매화검주시지.”

“그렇군요. 잘 되었습니다. 아! 눈이 더 내리기 전에 떠나야겠군요.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하하하! 자네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사내는 방갓을 쓰고, 추위를 피하려는 것처럼 복면까지 둘렀다. 온 몸을 검은 옷으로 꽁꽁 싸맨 후에야 방 숙수에게 목례를 했다.

“그럼 이만.”

방 숙수는 자식이라도 보내는 사람처럼 사내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어이쿠! 추워라. 얼른 들어가야지. 그나저나 분명 얼마 전에 들어온 천품 육포 냄새가 났던 것 같은데.”

고천락은 유지에 쌓인 육포 꾸러미를 꼭 껴안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방 숙수가 주방으로 사라진 후에야 입안의 것을 씹기 시작했다. 장강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육포였지만, 가죽을 씹는 것처럼 질겼다.

그는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 씨발, 저 새끼는 분명 형님이 죽였다고 했는데.”

<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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