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명문정파를 가리켜 구파오가라 칭했다.
하나 강호의 흥망은 여인의 마음과 같아서 구파오가라는 명칭만 유지될 뿐 속한 문파는 매순간 바뀌었다. 그러니 누대에 걸쳐 이름값을 유지하는 문파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파 중에서 소림과 무당, 화산은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당금 섬서성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종남파조차 어느 때에는 구파에서 밀려났을 정도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화산은 화산이로구나.’
소림과 무당, 화산은 올곧은 정신과 신념은 물론이고, 상고의 기공으로도 유명했다. 그 중 화산의 상징을 논하자면 천하의 모든 호사가들은 셋을 헤아릴 터였다.
검법의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樹梅花劍法).
심법의 자하심결(紫霞心結).
그리고 보법의 암향표(暗香飄)였다.
암향표는 고금제일인을 손꼽을 때 늘 거론되는 매화검신이 창안했다. 수백 년 전의 인물로 암향표를 창안하게 된 과정이 범상치 않았다. 어느 날 스승과 담소를 나누던 중 방에 걸린 족자를 보다가 창안했단다.
족자에 적힌 시가 바로 임포의 산원소매였다.
매화를 사랑한 시인의 시구이니 화산의 제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 소영횡사수청천(疏影橫斜水淸淺)
-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
‘성근 가지 그림자가 얕은 물에 비껴들고, 달 오른 저물녘에 그윽한 향기가 떠돈다.’
이훤은 나무 꼭대기에 선 채로 화산을 바라봤다.
망아취자는 주당들의 시만 즐겨 읊던 이훤과 달리 시문에 능통했다. 하여 수십 번이나 임포의 산원소매를 읊조렸기에 인에 박혔을 정도였다.
‘기가 막힌 경공이야.’
때마침 저녁노을이 봉우리 사이에 걸쳐 묘한 색으로 산세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주홍의 빛을 뿜어야 할 노을이 오늘따라 자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훤은 손바닥만한 가지 위에 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는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요지부동이다. 암향표는 그윽한 향기가 그림자를 따라 퍼져나가듯 속도와 은밀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런 기분 처음인데. 낯설고. 그런데 나쁘지 않아.’
이훤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해가 지는 광경을 지켜봤다.
매화숲 위에서 매화를 존중하다가 길을 찾았고, 그 길이 암향표의 투로(套路)일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쁘지 않아.’
무공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지만, 천하오대보법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다. 소림의 금강부동신보와 무당의 제운종, 곤륜의 운룡대구식과 마교의 천마군림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암향표다.
‘고작.’
천하에 손꼽히는 보법을 얻게 되었으니 기연이 분명했다. 그 중 이훤에게 가장 시급한 경공술이 해결됐으니 지금쯤 환호성을 지르며 술을 마셔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하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고작 해야 나쁘지 않다는 감정인 건가?’
처음에는 좋았고, 중간에는 의아했으며,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아.”
장탄식을 흘리는 순간 술 냄새가 안개처럼 퍼졌다.
술 냄새가 매화향을 뒤덮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야 미소를 지었다.
“좋은 것만 하고 살아도 아쉬운 삶이다!”
이훤은 마치 매화향과 노을을 향해 선언하듯 일갈을 내지른 후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 암향표는 익히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천하오대경공에 손꼽히는 암향표라 할지라도 내키지 않으면 익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망아취자의 허락 없이 얻어걸린 것처럼 익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인연이 닿지 않았다고 여길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한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기억이 스쳐갔다.
버리고 난 후에야 채울 수 있다는 허의 깨달음처럼 암향표를 버린 후에야 기다렸다는 듯이 떠올랐다.
‘엇! 노군의 암향표는 이것과 달랐어.’
이훤은 화들짝 놀라며 매화 숲을 응시했다.
망아취자는 수십 년 동안 매화 숲을 가꿨다. 주원경을 유지하는 건 기관과 진법의 힘이지만, 내용물 자체는 공을 들여 키워낸 것이 아니던가. 그렇게 공을 들여 키운 숲의 꼭대기에 암향표의 투로가 존재하는 건 우연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이훤은 눈을 끔뻑거렸다.
회귀 전과 달리 회귀 후 빠르게 천공혈륜겁을 수련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좋아졌고, 나아가 머리도 좋아졌다. 그렇게 좋아진 머리가 이제는 기억력만 좋은 것이 아니라 정보의 조합까지 이뤄냈다.
망아취자와 화산, 매화 숲, 그리고 암향표.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생각하는 순간 핵심 단어로 이어지는 옛 기억이 연이어 떠올랐다.
‘노군이 그랬다.’
망아취자가 갑작스럽게 폐관을 하게 된 이유는 작은 실마리를 얻었기 때문이라 했다. 이제는 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고도 했다.
이훤은 매화 숲의 전경을 한 눈에 담았다.
‘수십 년 동안 덜어내기 위해 이걸 만드신 건가?’
그 말인즉슨 매화 숲이야 말로 망아취자가 절명곡에서 주입받은 신마의 깨달음일 터였다.
“하아.”
이훤은 힘 빠진 걸음으로 망아취자가 사라진 구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로 통하는 토굴의 입구에 앉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입구에 새겨진 글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변화란 작게 시작한다. 변하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면 네가 변하고······.”
누군가 변하면 또 다른 누군가 변하게 되어 장차 우리가 변한다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세상을 변하게 만드는 건 작은 움직임이며, 그 날갯짓을 하도록 화산의 제자라면 응당 힘써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하나 실천하기에는 이만큼 어려운 말도 없으리라.
“그래서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신 게요?”
이훤은 망아취자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망아취자는 지난 수십 년 간 포기하지 않고, 화산의 무공을 되찾고자 애썼다. 노군에게는 전하지 않을 것처럼 냉담했지만, 남몰래 원형을 되살리려고 했다. 비록 화산의 성세가 예전 같지 않더라도 급하지 않게 천천히 나아가려는 게다. 그것이 화산파였고, 화산에 자리 잡은 후 누대에 걸쳐 변하지 않은 신념일 터였다.
무당조차 신마의 깨달음을 비급으로 남긴 상황이다.
망아취자의 신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이훤의 목소리에는 경외(敬畏)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존경심의 발로가 아니라 낯선 감정에 대한 두려움까지 섞였다. 회귀 전 그가 마주했던 정파의 무인 중에도 신념을 지닌 자들이 존재했다. 하나 저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올곧은 신념을 유지하는 자가 있었을까 싶다. 아무리 물어봐도 폐관하고 있는 망아취자가 대꾸할 리 없다.
그렇기에 입구에 새겨진 글귀만 보고, 또 읽었다.
“영웅이 아니라 협객이로구나.”
협객(俠客).
회귀 전도, 회귀 후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 저는 그렇게 살지는 못할 것 같아요.”
본래 망아취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하나 이제야 명확하게 알게 된 느낌이다.
이훤과 망아취자의 길은 다르다.
그렇기에 화산에 오면서 생각해뒀던 방법도 버렸다.
그저 낙안봉에 처음 올라왔을 때처럼 술잔을 나누면서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다. 그래도 되지 않는다면 이훤도 훌훌 털어버릴 요량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도 바쁜 세상이더이다. 그러니 스승님도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세요. 저도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보겠습니다.”
이훤은 망아취자가 큰 성과를 얻고 나오기를 기원하며 포권을 했다. 그리고 올 때와 달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화 숲에 들어섰다.
“자! 나오실 때를 위해서 술이라도 한 병 담가볼까?”
그렇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매일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눈이 내렸다.
*
“놈! 이게 무슨 꼴이야?”
노군은 낙안봉에 돌아온 후 일갈을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훤에게 맡겨놨던 낙안봉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술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고, 빈 병과 깨진 항아리가 곳곳에 놓였다. 심지어 술을 담그려다 실패한 흔적이 가득하니 매화 숲인지 주림(酒林)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술을 담그려고 했거든요.”
이훤의 말에 노군은 미간을 좁혔다.
“새 술? 그런 것이 어디 있단 말이냐.”
“실패했습니다.”
노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술에 대한 지식만은 천하에 손꼽히던 이훤이다.
그런 그가 술을 주조하지 못했다니 의아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훤은 노군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망아취자의 검을 들었다.
“이걸 좀 빌려야겠네요.”
“뭐하자는 거냐?”
스릉-
이훤은 망아취자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나 봐요. 술을 못 만든 대신에 다른 걸 만들어버렸습니다.”
노군은 눈을 부릅떴다.
이훤의 말과 자세를 보아하니 무공을 창안했다고 하는 듯했다. 하나 제아무리 이훤이라고 해도 무공을 창안하는 건 일대종사나 할 법한 일이 아니던가.
“진짜?”
“저도 긴가민가해서 확인이 필요합니다.”
노군은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던졌다.
이곳에서 안주를 만들며 소일거리를 하지만, 그 또한 바탕은 무인이 아니던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그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달려들었다.
표홀하기 그지없는 암향표를 펼치는 순간 그윽한 향기가 그림자처럼 사방을 물들였다. 보법의 영향으로 잔영(殘影)이 사방에 남는 게 마치 분신(分身)처럼 보인다. 장공잔도를 건널 때 선보였던 암향표와는 궤가 달랐다.
이훤은 놀라는 대신 감탄하듯 탄성을 흘렸다.
‘호, 역시 제대로 펼친 암향표는 놀랍구나!’
하나 부럽지 않았다.
아쉽지도 않았다.
더 좋고, 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발을 강하게 굴렀다.
쿠쿵!
그를 중심으로 대지가 균열을 일으키는 듯하더니 자갈과 모래가 암기처럼 전방으로 비산했다.
파파파파파팟!
노군은 예상치 못한 반격에 잠시 입술을 오므렸다.
하나 가볍게 검을 휘돌리는 순간 자색의 물결이 소용돌이처럼 일어나면서 모든 것을 튕겨냈다.
따라라라라라랑!
이훤이 재차 발을 굴렀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더니 한순간 노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새끼를 꼬듯 두 사람이 어우러지는 순간 위치가 바뀌었고, 두 개의 검기가 공간을 짓누르면서 폭발했다.
콰콰쾅!
두 개의 검기가 충돌하는 순간 밀려나는 건 이훤이다. 하나 노군은 자리를 지켰으면서도 미간을 좁혔다. 한순간 검의 기운이 자신과 비등할 만큼 거세게 몰아쳤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뒷목을 내어줄 정도였는데······.’
노군은 놀란 마음을 감춘 채 말을 이었다.
“크흠! 아직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걸? 매화검법을 펼쳐야겠구나!”
이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그거 반쪽짜리 아닙니까?”
“이 놈! 반쪽이어도 넌 이겨!”
“망아취자께서 나오시면 분명 매화검법의 원형을 알려주실 겁니다.”
“그, 그래?”
금세 혹하는 노군이다.
어찌됐든 매화검법의 복원은 화산의 오랜 숙원이 아니던가. 그는 금세 자신의 주책없는 표정을 숨기고 헛기침을 연발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일단 한 번 보자!”
노군의 기세가 급변했다.
지금까지는 웃어른과 같았다면 이제는 호적수를 상대하듯 신중하게 움직였다. 매화검법은 오지(五枝)와 육근(六根), 일주(一株)와 구엽(九葉), 삼화(三花)로 구성된다. 매화검법의 이십사 초식은 한 그루의 온전한 나무를 의미했다. 하나 당금 화산에 남은 건 일주까지였다.
“흡!”
이훤은 망아취자가 술을 마실 때마다 검법을 펼쳤기에 어느 정도 초식의 형태를 알고 있었다. 한데 허공을 향하는 것과 자신을 향하는 것은 궤가 달랐다. 오지를 지나 육근에 이르는 순간 노군의 검은 중검(重劍)이 되어 전신을 억눌렀다. 한 그루의 나무를 떠받치듯 강맹한 검격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하나 이훤은 피하지 않았다.
마치 어느 쪽이 부러질지 시험하듯 맞상대를 했다.
텅! 텅! 텅! 텅!
이훤은 망아취자의 검을 휘돌리면서 노군의 공세를 빗겨 쳤다. 검기와 검사, 검막까지 맞물리듯 휘몰아치는 가운데 매화 숲은 태풍을 만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휘이이이잉!
노군은 자신과 대등하게 버텨내는 이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초식이더냐?”
“글쎄요. 그냥 손이 나가는 대로 펼치는 거지요.”
이훤은 노군을 놀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도 노군의 검로와 검격에 맞춰 매순간 본능적으로 검을 휘돌렸다. 그저 혈륜을 극대화하여 초식의 유무 없이 맞상대를 하는 중이다.
“네 눈이 더 이상 빛나지 않는구나?”
“그것도 그냥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훤은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후 대지를 박찼다.
콰쾅!
전력으로 혈륜을 펼치고 있음에도 눈은 붉게 빛나지 않았다. 천공혈륜겁의 경지는 육 성에 이른 지 오래였다. 술을 빚으려다가 얻어걸린 깨달음 때문이다.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더라.
마음이 내키는 일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혈륜으로 인해 몸이 완성되면 부수적으로 머리 또한 좋아진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하나 망아취자가 남긴 암향표를 버리고, 스스로의 길을 쟁취하는 순간 혈륜의 경지가 저절로 육 성에 이르렀다. 마음이 일면 머리가 좋아지고,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몸이 좋아졌다. 회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생각해 보면 낙안봉에서 내가 얻은 건 암향표가 아니라 폐관수련장에 있던 그 글귀였군.’
스스로 만들어낸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적혀 있었다. 그러니 이훤의 마음가짐은 제아무리 사소해도, 천공혈륜겁 자체를 활성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간다!”
노군이 검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자하심결과 매화검법이 동시에 활성화되었고, 이내 암향표가 극성으로 펼쳐졌다. 노군의 신형은 마치 분신술을 펼치듯 네 개의 잔영을 남긴 채 사방에서 이훤을 옥죄었다.
콰쾅!
이훤의 두 눈이 붉게 타올랐다.
스스로의 의지로 혈륜을 끌어낸 것이기에 어느 때보다 더욱 핏빛처럼 일렁였다. 대지를 박차고 달려드는 순간 이훤의 몸뚱이가 찢기듯 두 개로 나뉘었다. 그것은 이내 한 번 더 갈라졌고, 마침내 불덩이에 휘감긴 잔영이 여덟 개가 되어 노군을 포위했다.
“헛! 이것이 무엇이더냐?”
이훤의 대꾸는 마치 육합전성처럼 사방에 들려왔다.
“이름 붙이기를 암천군림보라 정했습니다.”
그 순간 여덟 개의 잔영이 하나로 합쳐지듯 흐트러지더니 노군의 머리 위로 핏빛으로 번뜩이는 강기(罡氣)가 내리꽂혔다.
< 26, 버리고 나니까 얻더이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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