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마신-61화 (61/226)

< 25, 나비처럼 날아서 술을 마셨다. >

25, 나비처럼 날아서 술을 마셨다.

낙안봉에 오르는 순간 별세계가 펼쳐졌다.

정상에 발을 들이는 순간 휘몰아치던 광풍은 과연 기러기마저 쉬어가야 한다는 낙악봉의 이름값과 걸맞았다. 하나 주원경이라 새겨진 바위를 지나 진법을 통과하는 순간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봄날의 따스함이 가득한 망아취자의 공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천락은 개랑 잘 놀 테고.’

이훤은 고천락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가 익힌 귀호영체술은 사술의 경지에 올랐을 정도였다. 그러니 초절정의 고수만 만나지 않는다면 옆을 지나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신출귀몰했다.

“형님!”

고향에 찾아온 것처럼 밝은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왔느냐? 밥은 먹었고?”

노군은 아침에 집을 나갔던 아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온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맞이했다. 이훤은 고개를 내저었다. 노군은 술에 약할 뿐 요리를 하는 재주가 뛰어났다. 그렇기에 일부러 아침까지 거르고 찾아온 길이 아닌가.

“뭐 있는데요?”

노군은 이훤의 위아래를 훑어본 후 별 일 없다고 여겼는지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냥 차려주는 대로 먹어.”

부모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만약에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가벼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내키는 대로 해도 되는 곳이 집이라더라. 이제는 자신의 자리처럼 되어버린 평상에 엉덩이를 붙인 후 언제나 만개한 매화 숲을 바라봤다.

‘예쁘긴 예뻐.’

이훤은 피식 웃으며 평상 주변을 살폈다.

언제나 손만 뻗으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곳곳에 술항아리가 비치되어 있었다. 마치 물처럼 준비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긴장마저 풀릴 정도였다.

“이래서 집이 최고라는 말이 있구나.”

표주박에 술을 가득 퍼낸 후 마시는 순간 노랫가락이 절로 흘러나왔다.

“오늘 당신의 옛집을 찾으니 스승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 당신의 술 항아리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당신의 주도가 그리운 것도 아니라네.”

술 한 잔 마시고.

“명성과 이권을 버리고, 화산과 매화의 품에서 자유롭게 살아간 당신이 그리울 뿐이라네.”

취음선생 백거이가 도연명의 고향이 시상에 부임한 후 옛집을 찾아와 읊조렸다는 시구였다.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빗대어 부르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콧방귀를 뀌었다.

“겉은 멀쩡해 보이더니 내상이라도 입은 게냐? 개가 똥을 끊지. 네가 어떻게 술을 끊어.”

이훤은 노군이 밥상을 내어놓으며 비웃는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아! 분위기 좋은데 형님은 또 왜 이러실까?”

하나 속으로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훤의 화두는 술보다 신마의 깨달음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을 지녔고, 벌로 반주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안보이시네요. 낙안봉을 내려가셨을 리도 없잖아요.”

노군은 마침 잘 됐다는 듯 봇짐과 검을 챙겼다.

“산 너머 마을에 큰 잔치가 있다. 그곳의 촌장이 내 오랜 지기이니 가서 축원을 해줄 생각이야. 한데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때마침 네가 왔구나.”

이훤은 탄성을 내뱉었다.

노군은 화산의 상징인 매화검주(梅花劍主)인 동시에 장문인의 사형이 아니던가. 망아취자를 제외하고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는 사람이니 교류하고자 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을 터였다. 한데 일개 촌부와의 인연을 이어가려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녀오세요. 돌아오실 때 맛있는 것 많이 사오시고요. 그나저나 스승님은 어디 가셨는데요?”

노군은 짐을 챙긴 후 처소의 뒤편을 가리켰다.

낙안봉의 정상에서도 혹처럼 튀어나온 구릉이다. 하여 이훤도 가끔 구릉에 올라 미친놈처럼 날뛰면서 술을 마셨던 장소였다.

“며칠 전 폐관에 드셨다.”

이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폐관이라니요.”

망아취자를 설득할 방법을 찾기 위해 게으름을 피운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폐관이라면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낼 일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깨달음을 전해 듣고 싶었던 이훤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하나 노군은 이훤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건강은 평소보다 좋으시다. 그저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고 하시더구나. 이제 좀 덜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으면서 들어가셨어.”

“아, 다행이네요. 언제쯤 나오신다는······.”

“첫 눈이 내리기 전에 끝내시겠다고 했다. 그나저나 네가 있으니 산적한 일을 끝내고 돌아와도 되겠구나. 달포 정도 걸릴 것이니 사숙을 잘 부탁한다.”

겨울의 초입이라면 생각보다 오래지 않다.

여차하면 여산의 관음동이라도 다녀올 생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아! 그리고 노군동에 애가 하나 있습니다. 고천락이라고 하는데······.”

이번만은 노군도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다.

노군동을 포함한 사대동천은 화산의 금지로 제자들의 출입을 불허했다. 하물며 외인이라면 사문의 법규를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놈! 방약무도한 건 알고 있지만 선을 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야!”

“형님, 그게 아니고요.”

“형님이라고 하지 마! 화산의 법도가······.”

어쩔 수 없이 이훤은 청문오룡을 대할 때처럼 연기를 해야 했다. 강호에서 만난 고천락은 종남파의 제자이며 의형제를 맺었으니 집에 데리고 올 수도 있지 않느냐며 떼를 썼다.

“종남파?”

“네.”

노군은 잠시 수염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의 제자가 일개 술주정뱅이와 의형제를 맺었을 리 없지. 분명 화산의 이름을 빌렸으리라. 그렇다면 녀석도 슬슬 화산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겠어. 차라리 잘 됐다. 다녀온 후에 틈을 봐서 본 파의 제자로 들어오게끔 설득을 해봐야겠군.’

그는 다른 꿍꿍이를 지닌 채 고천락의 방문을 허락했다.

“하나 이곳은 안 돼. 노군동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안주를 좋아하더라고요. 잘 지낼 겁니다.”

“알았다. 그럼 믿고 다녀오마.”

뒷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고천락의 눈치와 재기라면 상황에 맞게끔 잘 행동할 수 있으리라.

“그나저나 내가 문제네요.”

이훤은 혼잣말을 하며 술잔을 들었다.

망아취자가 없는 주원경에서 홀로 지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엉덩이가 근질거렸다. 하여 쉴 새 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냈다. 물처럼 들이켰고, 밥처럼 꼭꼭 씹어 마셨다. 내공으로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고 술을 마시다보니 제아무리 그라고 해도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너도 참 신기해.”

이훤은 자신의 가슴팍을 매만지며 키득거렸다.

천공혈륜겁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혈륜은 육신의 최적화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평정심을 유지하게끔 만들어줬다. 한데 몸에 좋지 않은 술을 밤새도록 마셔도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가 하겠다고 하면 무조건 따르는 충견처럼 느껴졌다.

“그래, 인생 한 번 더럽게 살아봤잖아. 한 번 더 살게 되었으니 이제는 마음 편히 살아봐야지. 안 그러냐?”

백주와 황주, 과실주를 가리지 않았다.

독한 술과 순한 술을 따로도 마시고, 섞어서도 마셨다.

“내가 술이고! 술이 곧 나다! 신마! 꺼지라고 해!”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이훤은 혼자만의 세상에서 마음껏 술을 마셨다.

어느새 시간의 흐름을 잊고, 망아취자와 고천락의 행방도 지웠다. 그저 노군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달포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할 뿐이다.

“그래! 누가 이기는지 한 번 보자!”

술을 자신과 동일시하던 며칠과 달리 오늘은 술을 적대시했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호승심을 지닌 채 항아리 째로 들이부었다. 이제는 마시는 술이 반, 흘리는 술이 반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술꾼에게 술을 흘리면서 먹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니던가.

“크하하하하!”

이훤은 목젖이 보이도록 껄껄 웃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허공에서 노란 것이 살랑였다.

한참을 바라봤더니 나비가 아닌가.

주원경은 진법과 기관으로 출입이 통제되기에 나비는 물론이고 새와 들짐승도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자신과 노군이 드나들 때 함께 딸려온 듯 보였다.

이훤은 나비를 보며 호접지몽을 생각했다.

“장자가 그러더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장자 또한 도가의 기틀을 마련한 성인이지만, 옆집 아저씨를 부르듯 거침이 없다. 무료함을 달랠 수 있다면 태상노군과도 바지 벗고 놀 수 있을 만큼 심심했다.

“오늘 한 번 확인해 보자!”

이훤은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술에 찌든 옷이 펄럭일 때마다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하나 그조차 이훤에게는 여인이 몸에 뿌리는 향유(香油)나 품고 다니는 항낭(香囊)처럼 향긋했다.

나비가 훈풍을 타고 날아올랐다.

이훤은 나비를 따라 몸을 날렸다.

몇날며칠 동안 술에 절어 있었지만, 혈륜은 언제나와 같이 제 역할을 했다.

파팟!

가볍게 몸을 띄운 후 나비를 쫓다보니 어느새 나무 위를 오르고 있었다. 나무 위에 오르는 순간 아래와 달리 색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매화나무로 가득한 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솜뭉치처럼 출렁거렸다.

나비가 도망치듯 그 위를 살랑거리며 날았다.

하나 이훤에게는 유혹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나무 위에서 걷기 시작했다.

일대종사라면 나비의 움직임을 보고 무공을 창안하기도 할 터였다. 하나 이훤은 여전히 천공혈륜겁의 성취가 오 성에 머물렀다. 그렇기에 초상비를 흉내 내며 나무 위를 걷는 것이 고작이다. 심지어 만취 상태로 걷고 있으니 매순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하하!”

이훤은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밟고 뛰어올랐다.

그러자 숲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껏 보지 못한 화려한 것을 보게 됐다.

백매(白梅)와 적매(赤梅)가 뒤섞인 매화가 화사하게 핀 사이로 매실과 녹빛 잎사귀가 보였다.

“헛! 스승님이 아끼는 매화를 밟으면 안 되지.”

이훤은 자신의 경로사상을 한껏 드러내며 잎사귀만 밟고 뛰었다. 간간히 비틀거릴 때마다 매실을 따서 안주로 먹었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술동이를 기울여 술을 마셨다.

나무 위를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숲 전체를 몇 바퀴나 돌면서 술을 마시던 중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첫 째는 나비였다.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종적을 알 길이 없다.

두 번째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거 뭐야?”

이훤은 뭐에 홀린 것처럼 매화를 피해 나무 위를 걸으며 읊조렸다. 수십 바퀴를 돌면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길이었어?”

그리고 경악할 만한 현실이 뇌리를 강타했다.

매화 숲 위를 걷는 내내 혈륜은 단 한 번도 발동하지 않았다.

*

“그래. 네가 종남파의 제자란 말이지?”

장년인의 말에 고천락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쩐지 기척을 숨기는 모습이 범상치 않다 했어. 종남의 어느 고인에게 사사했느냐?”

고천락은 잠시 멈칫 했다.

눈앞의 장년인은 화산의 장문인인 서화종이다.

그런 그가 지금이야 웃고 있지만, 노군동에서 처음 봤을 때에는 외인이라며 칼을 뽑지 않았던가. 만에 하나 허리춤의 종남파 명패를 꺼내지 않았다면 끌려가서 뇌옥에 갇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잠시 머리를 굴린 후 송구하다는 듯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스승께서 사문의 비전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이름을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장문인은 탄성을 흘렸다.

“아! 혹시 천강은하심법이더냐?”

고천락은 말을 아낄 때임을 직감했다.

신분이 높고, 머리가 좋은 이들은 대충 화두만 던져두면 저들끼리 알아서 묻고, 대답하지 않던가. 아니나 다를까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청목, 그 친구가 천강은하심법을 수련하면서 기척에 엄청 민감했었지. 너를 보아하니 그 친구가 제법 대공을 이룬 듯하구나.”

“송구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클클, 제자를 잘 받았구나. 스승의 명을 잊지 않고 끝까지 조심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장문인은 장공잔도로 향하며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네 말이 사실이렷다? 매화검주께서 진정 제자를 들이셨다는 게지?”

고천락은 목뼈에 무리가 갈 만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이 그를 용서한 까닭은 비단 종남파의 제자라는 연기 때문이 아니었다. 종남파가 됐든, 소림이 됐든 사문의 금지를 침범한 외인을 용납할 리가 없지 않은가.

‘형님, 미안해요. 나부터 좀 살아야 하지 않겠소.’

결국 노군과 이훤을 엮어 사제관계라 칭했다. 그렇게 되면 고천락은 외인이 아니라 형제의 집을 방문한 손님이 된다. 아닌 말로 매화검주를 형님으로 삼았다고 하면 진위 여부를 떠나서 무례함에 칼을 휘둘렀으리라.

“네, 매화검주께서 며칠 전 하산하실 때 형님이 대공을 이루고 있으니 접근에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쯤 해서 물러갔으면 해서 하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장문인은 지금껏 화산파를 멀리 하던 노군이 제자를 받았다는 말에 화색을 띄었다.

“일단 가보자. 사형의 제자라면 내 사질이 되니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천락은 장공잔도를 앞두고 너스레를 떨었다.

“엇! 제가 공부가 약하여 여기를 지나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나 장문인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린 후 말했다.

“이미 노군동에도 왔거늘 낙안봉을 오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더냐? 하하! 내가 도와줄 테니 함께 가자꾸나.”

고천락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삐죽였다.

‘젠장! 반신반의하는군.’

결국 장문인이 고천락의 몸을 감싼 채 장공잔도를 건넜다. 그리고 낙안봉에 오르는 순간 저 멀리 매화 숲 위를 뛰어다니는 이훤이 보였다.

‘빌어먹을! 망했다. 망했어. 저 형님은 오늘도 술에 절어 있네. 저걸 보고 매화검주의 제자라고 누가 믿겠어?’

고천락은 그 순간 자신의 어깨를 감쌌던 장문인의 손길이 느슨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려는 찰나 장문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허허, 어린 나이에 암향표를 대성하다니!”

고천락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훤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장문인은 ‘역시 사형이시다.’라거나 ‘배분 정도는 어떻게 되겠지.’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하나 그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술 취한 사람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화산에 오른 후 만난 사람 중에 정상이 없구나.’

< 25, 나비처럼 날아서 술을 마셨다.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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