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좋은 도둑질. (2) >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던데. 너는 말 한 마디에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 세 곳이나 있네?”
청문방의 소방주인 우소광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일견하기에 병장기도 없이 향락에 젖어 지내는 한량처럼 보였다. 옆에서 걸신들린 사람처럼 요리를 먹어재끼는 하인 또한 정상은 아닌 듯했다.
검을 조금 더 밀어 넣으며 외쳤다.
“하하, 술은 마셔도 주정뱅이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 건가? 술주정뱅이, 주제, 감히. 뭐 이런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을 만큼 귀하게 자랐나 보구나!”
이훤은 턱 끝에서 느껴지는 예기를 무시한 채 말했다.
“술꾼에게 주정뱅이란 존칭이나 마찬가지지. 주제, 감히, 그리고 훔쳤다는 말이 잘못 됐어.”
우소광은 ‘주제’와 ‘감히’의 차이를 생각지 못한 채 마지막 말에만 신경을 썼다.
“서찰이 네 손에 있잖아. 도둑놈 주제에 현장을 걸린 이상 무슨 변명도······.”
이훤은 우소광의 말을 끊고, 좌측에 앉은 고천락을 가리켰다.
“훔친 건 이 녀석이야.”
고천락은 고개도 들지 않고, 삶은 채소를 입안에 우겨넣으며 말을 건넸다.
“훔친 건 나야. 그리고 이쪽은 우리 형님이지. 그런 식으로 검을 겨누고 그러면 안 돼. 우리 형님을 존중했으면 좋겠어.”
“역시 내 동생이 예의를 알아.”
“그 정도는 못 배운 저도 알지요. 전후사정도 따지지 않고 검부터 뽑는 건 매우 무례한 행위잖아요.”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지금 매우 무례한 상황을 겪고 있어.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아.”
우소광은 두 사람이 맞물리듯 대화를 주고받자,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 여전히 화는 머리끝까지 치솟았고, 조롱을 당하는 듯하여 참기 힘들었다. 게다가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상황이 만들어졌다.
“씨발, 그냥 뒈져라!”
짜증 섞인 일갈과 함께 검을 찔러 넣었다.
텅!
하나 예기치 못한 반발과 함께 검이 밀려났다.
우소광은 눈을 끔뻑였다.
자신의 검이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막힌 것이다.
이훤은 우소광의 공격을 서찰로 막았다.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찢어져야 할 종이가 검을 막은 것이다. 우소광을 비롯한 청문오룡은 지금까지와 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 이훤은 타이르듯 혀를 찼다.
“네 아버지가 은밀하게 전하라고 했던 물건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막 찔러도 되는 거야?”
우소광은 몸에 힘이 풀린 듯 검을 놓쳤다.
하나 검을 주워들 생각도 없이 황급히 손을 모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강호의 고인을 몰라보고 결례를······.”
이훤의 신위에 서찰을 빼앗겼다는 사실마저 잊은 듯했다. 청문오룡 역시 무기를 내리고, 이훤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왔다.
이훤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일단 네 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했던 물건부터 받아라.”
우소광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내밀었고, 서찰을 받아 화려한 통에 챙겼다.
“감사합니다.”
“쯧쯧, 나이 차가 많지는 않지만 오랜 강호의 경험을 나눠주겠다.”
“세이경청하겠습니다.”
청문오룡은 어느새 건들거리던 자세를 바로 했다.
“강호의 오랜 격언이지. 강호초출들이 조심해야 할 사람은 노인, 아이, 그리고 술주정뱅이다.”
고천락마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자 아닌가요?”
이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아직 여자였던가? 괘념치 마라. 조만간 여자 대신 취객이 들어갈 거니까.”
고천락은 이훤의 호언장담을 귓등으로 흘린 채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훤의 말을 모두 신경 쓰지 않아도 됨을 깨우친 게다. 장차 천하제일의 대도가 될 동량답게 눈치가 매우 빨랐다.
“이건 가는 길에 여비나 해라.”
이훤이 은자 백 냥짜리 전표를 건넸다.
우소광이 대표로 전표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좋은 다짐이다. 다른 길로 새지 말고 빨리 가. 그리고 당당하게 무림맹의 정문으로 들어가라. 외단주를 찾으면 그가 알아서 너를 안내해줄 것이야.”
“아! 역시 모르는 것이 없으시군요. 한데 어디의 고인이신지 존성대명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훤은 눈을 끔뻑였다.
그를 대신해 고천락이 슬쩍 허리춤을 걷었다.
우소광을 비롯한 청문오룡의 표정이 죽은 사람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고천락의 허리춤에는 철패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겉면에 적힌 다섯 글자가 두 사람의 신분을 증명했다.
종남지은하(綜南之銀河).
종남파라면 당금 무림에서는 화산보다 윗줄로 평가되며 섬서제일문파로 추앙받지 않던가. 섬서성 북부의 청문방으로서는 종남파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당연했다.
“결,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우소광은 절을 할 것처럼 굽실거렸다.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라 했어. 급해 보이니 어서 가라고. 무림맹까지 열심히 가!”
“네!”
청문오룡은 보약이라도 지어 먹은 것처럼 힘차게 대꾸한 후 한데 엉키다시피 하여 자취를 감췄다.
고천락은 그 모습이 우스운지 한참을 웃었다.
“저래서야 무림맹까지 갈수나 있을까 모르겠네요.”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그건 어디서 났냐?”
“보고요. 몇 개 있기에 유명한 것들로만 챙겨뒀지요.”
“쯧쯧, 종남파면 구파의 주축 중 한 곳인데 명패나 팔아먹고 잘하는 짓이다.”
“어차피 구파라고 별 거 있습니까? 다 사람 사는 동네잖아요. 오히려 겉으로만 허허 웃으면서 꿍꿍이를 숨기는 게 더 무서워요.”
이훤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상대하기 힘든 쪽은 언제나 정파의 무인들이다. 실리를 챙기지만, 명분을 거론하는 건 예삿일이다. 심지어 체면을 핑계로 사마외도를 도외시하거나 약자를 괴롭히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오히려 상대하기에 수월한 쪽은 사마외도였다.
‘그 놈들은 그냥 나쁘니까 쳐 죽이면 됐는데 말이야.’
이훤이 혀를 차며 술잔을 채우는 사이 고천락이 물었다.
“의외네요. 형님 성격이면 반쯤 죽여 놓을 줄 알았는데 여비까지 챙겨주실 줄이야.”
“저런 애송이들을 때려봤자 뭐가 남겠냐? 저런 건 술자리 화젯거리도 안 돼. 생각해 봐라. 내가 종남파 문도를 두들겨 팼어. 그럼 종남파와 때린 이야기만 하면 돼. 하지만 저것들은 청문방이 어디에 있고, 뭐하는 곳이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까지 설명해야 한다고.”
고천락은 눈을 끔뻑이다가 수긍했다.
“진짜 그러네요. 술자리에서 말 길게 하면 집중 안 되지요. 핵심만 딱딱 짚어서 떠들어야 재미가 있지.”
이훤은 키득거리며 술잔을 비웠다.
“너도 조금씩 주당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구나.”
“술은 취미고요. 그래도 얼마든지 훔쳐다 드리지요. 그나저나 새외에 전쟁이 나면 이 동네도 위험하지 않아요? 빨리 산동인가 어디로 가서 제 무공을 찾아야 할 텐데······.”
고천락이 배를 두드리며 지나가듯 말했다.
이훤은 회풍화주를 빈 잔에 채우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그거다!”
“뭐가요? 이제 제 무공을 찾으러 갑니까!”
“아니. 그건 내년이야.”
“아씨······.”
고천락이 거듭 물었지만, 이건 비밀로 해야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망아취자를 설득할 계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대막과 북해가 전쟁을 할 것이 여길 터였다. 하지만 이훤은 자신과 소궁주의 인연을 거론하며 적의 칼끝이 섬서성을 향할 수도 있다고 설득할 요량이었다.
‘쫓겨났다는 놈이 나와 화산을 원망하고, 빙령단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급습을 할 것이라고 하면······. 말이 돼!’
거기에 개미굴에서 알아낸 정보와 소마, 배후의 신비조직을 더하면 망아취자도 귓등으로 흘릴 수 없으리라. 무엇보다 천문진인이 깨달음을 남겼지만, 다른 곳의 생존자들은 모르고 있지 않던가.
이훤은 고천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이것이야 말로 진짜 좋은 도둑질이었다. 그러니 가자!”
고천락은 점소이를 부르려다 미간을 좁혔다.
“잠깐 만요. 입가심이라도······.”
이훤은 회풍화주를 병 째 건네며 말했다.
“그걸로 해. 상이야. 지금부터 쉬지 않고 화산으로 간다!”
고천락은 술병을 든 채 입맛을 다셨다.
“어떤 생각을 지녔으면 이게 포상이 된다는 거지?”
*
화산을 떠난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하나 초겨울에 다시 마주한 화산은 예전과 같았다. 마치 인간의 짧은 헤어짐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험준한 봉우리와 녹음이 우거진 산림을 유지했다.
“역시 화산 정도 되니까······.”
고천락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훤은 고천락이 화산의 산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고 왜인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
“숨어들 곳이 많네요. 아! 도전 의식이 마구 샘솟네.”
“그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담긴 거냐? 절경을 보고 도둑질부터 염두에 두다니······.”
고천락은 적반하장의 상황에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보면 형님이 화산파 문도인 줄 알겠어요.”
“쳇! 그냥 화산에 같이 사는 거지.”
이훤은 거침없이 산을 올랐다.
숲 너머로 초도각 건물들의 지붕이 보였다. 잠시 반덕구를 생각했지만, 잘 살기를 빌어주며 노군동으로 향했다. 이미 수십 번이나 창룡령을 오가면서 지리를 익혀두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아무도 모르게 창룡령을 지나 노군동에 이를 수 있었다.
‘역시 안계시는군.’
이훤으로 인해 주원경의 결계가 풀린 후 노군은 대부분의 시간을 낙안봉 정상에서 보냈다. 그는 이훤과 함께 지내며 무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말년을 준비하며 망아취자를 봉양하는데 힘쓰고 있으리라.
그 때 낯익음 개 소리가 들렸다.
컹컹!
이훤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놈의 새끼는 나한테 천리추종향이라도 발라 놨나?”
잠시 후 나무 위에서 털 뭉치가 떨어졌다.
안주는 멧돼지처럼 커다란 덩치에 땅에 쓸릴 것처럼 기다란 털을 휘감고 있었다.
“아! 멋있어.”
고천락은 안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훤은 그런 고천락을 뒤로 한 채 안주의 턱을 잡고 물었다.
“형님은 위에?”
컹컹!
“알았어. 너, 이 놈이랑 놀고 있을래?”
고천락은 안주와 이훤을 번갈아보다가 헤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아이가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다.
“안주야. 나랑 놀자.”
하나 안주는 턱과 다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딴청을 피웠다. 그래봤자 도관을 청소하는 총채처럼 생겼지만, 고천락에게는 그 모습조차 멋있었나 보다.
“이, 이거 먹을래?”
이훤은 고천락이 주전부리로 안주를 유혹하는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타고 다니지도 못하는 개를 뭣 하러······.”
어쩐지 관계가 이상하게 형성되기는 했지만, 저들끼리 조금씩 어울리면서 잘도 논다. 고천락에게 주방과 뒷간의 위치를 알려준 후 장공잔도로 향했다.
“형님, 다녀오세요!”
고천락은 울상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하나 이훤이 자취를 감추자 냉큼 안주를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푹신푹신한 털이 얼굴을 휘감는 순간 탄성이 흘러나왔다.
“으아! 너 진짜 부들부들하구나. 멋있어. 아름다워!”
컹!
하나 안주가 몸부림을 치는 순간 고천락은 돌 위를 나뒹굴었다. 귀호영체술을 제외하면 별다른 무공을 익히지 못한 고천락이다. 타고난 눈치와 순발력도 안주를 대할 때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안주는 일정 거리 이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먹을 걸로 유혹하고, 딴청을 피워 봐도 요지부동이다.
다음 날 수염을 하얗게 기른 선풍도골의 노인이 노군동을 찾았다. 낙안봉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노군이 잠시 돌아온 것이다.
“네가 고천락이로구나.”
“네! 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막내가 노군동주 대형을 뵙습니다.”
노군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한 숨을 흘렸다.
“어휴,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훤은 나를 대신해 잠시 낙안봉을 지켜야 하니 너 혼자 이곳에 있어야겠다. 괜찮겠느냐?”
“네, 안주와 함께라면 괜찮습니다.”
하나 안주는 이미 노군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노군은 안주를 밀어내며 명령하듯 말했다.
“잠시 하산할 것이니 너는 이 아이와 함께 지내거라. 알겠지?”
안주가 주인을 따라 앓는 소리를 냈지만,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고천락만 희희낙락하여 노군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 이후로 안주는 고천락에게 곁을 내어줬다.
아무래도 노군의 명을 받은 이상 제 뜻대로만 할 수 없게 되었나 보다.
그 후로 며칠이 빠르게 흘렀다.
고천락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닌 말로 태어나서 이처럼 편안하고, 즐거웠던 적이 하루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안주가 벌떡 일어나 짖기 시작했다.
컹컹컹!
“뭔데?”
고천락은 잠시 노군동 아래를 보다가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귀호영체술을 운용하면서 죽은 사람처럼 호흡마저 감췄다.
잠시 후 누군가 노군동의 입구에 발을 들였다.
눈을 감고 있기에 상대의 외양은 확인할 길이 없다.
“누구냐?”
진중하면서도 짜증이 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날아와 고천락의 발아래를 스쳐갔다.
콰직!
딛고 있던 나뭇가지가 으깨졌다.
‘젠장! 초절정의 고수인 건가.’
상대가 초절정의 경지라면 귀호영체술은 무력했다.
“아으으.”
고천락은 허공에서 떨어진 후 나뒹굴었다.
그는 눈을 뜨고는 이내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온 몸을 억눌렀다. 마치 피 떡으로 만들 것처럼 엄청난 압력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스릉-
상대의 허리춤에서 검이 서서히 뽑혔다.
“곱게 보내 줄 수 없겠구나.”
< 24, 좋은 도둑질.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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