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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59화 (59/226)

< 24, 좋은 도둑질. >

24, 좋은 도둑질.

절명곡(絶命谷)은 예전과 같았다.

피 냄새도, 술 냄새도 흩어진 채 늘 같은 풍광을 자랑했다. 검은 방갓에 검은 면사까지 두른 흑의인이 느긋한 걸음으로 절명곡의 협도(狹道)를 지나쳤다.

“여긴 언제 와도 아름답군요.”

박자를 타듯 흘러나오는 목소리.

흑의인은 어용협 정상에서 소마를 퇴각시킨 장본인이었다. 그의 곁에는 두 노인이 뒤따랐다. 한 명은 유달리 머리가 큰 대머리 파계승이었고, 다른 한 명은 혈륜오괴의 생존자인 일괴였다.

“저쪽입니다.”

혈륜일괴는 의제들의 죽음이 떠오른 듯 이를 악 물고 절벽 쪽으로 안내를 했다. 반면 흑의인과 대두노인은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로웠다.

“이훤이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네요.”

대두노인은 배꼽까지 기른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크하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이 언제 그렇게 강해졌을까? 일 년 전만 해도 쓰레기였다며?”

“그래도 막내가 죽었어요. 웃을 일이 아니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흑의인이 방갓을 슬쩍 들어 올리자, 호선을 그린 눈매가 드러났다. 대두노인은 그 모습을 보고 방정맞게 키득거렸다.

“크큭! 막내는 개뿔, 그 놈 관상을 보아하니 올해가 끝날 무렵 자네에게 맞아죽을 상이었어.”

흑의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혈륜일괴를 따랐다. 대두노인은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짧은 다리를 놀려 흑의인의 곁에 섰다.

“어떤가? 자네가 나설 텐가?”

“글쎄요.”

“내가 해도 괜찮은데.”

혈륜일괴가 눈치를 보다 말을 건넸다.

“놈의 무공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괴했습니다. 마치 불덩이가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쉴 새 없이······.”

흑의인은 입술 가운데에 검지를 댔다.

“쉿. 양보할게요.”

혈륜일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배후에서 수장(手掌)이 내리꽂혔다.

콰직!

금빛이 아른거리던 손바닥이 일괴의 정수리를 강타하는 순간 놀랍게도 손이 두어 배는 커진 듯했다.

“크헉!”

혈륜일괴의 턱이 쇄골에 닿을 만큼 머리가 주저앉았다.

그는 칠공에서 피를 흘리면서 흑의인을 응시했다.

“왜, 왜?”

“왜긴 왜야! 늑골이 가루가 됐으면 평생 누워서 살아야 할 놈이니 정리해야지!”

대두노인은 깔깔 웃으며 재차 손바닥을 펴고,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혈륜일괴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퍽! 퍽! 퍽! 퍽!

“적당히 하세요. 이미 죽었습니다.”

흑의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두노인은 장삼을 슬쩍 들어 올린 채 달려오더니 시신을 걷어찼다.

퍽!

대두노인은 혈륜일괴의 시신이 절명곡 너머로 사라지자 박장대소를 했다.

“크하하! 그 놈, 참 잘 날아간다. 그런데 너는 뭐하냐?”

흑의인은 팔짱을 낀 채 절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대두노인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내비치며 흑의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에이, 안보이잖아. 어디 보자. 뭐야? 이거.”

절벽에는 괴발개발 아무렇게나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이일일래거(李日日來去).

“이일, 이일, 이훤 왔다가 갔다고?”

대두노인은 폭소를 터트렸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크하하, 술주정뱅이라고 하더니 연기가 아니었네.”

하나 흑의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동안 낙서를 응시했다.

“일과 일의 거리가 멀어요. 훤(昍)이 아니라 일부러 떼어놓고 쓴 것처럼 말이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글쎄요. 궁금하네요.”

대두노인은 이훤이 새긴 낙서를 기억에서 지운 채 손바닥을 비볐다.

“후훗! 이 놈, 죽일 거지? 내가 죽이자. 내가 할게.”

흑의인은 침음을 내뱉었다.

“이훤은 화산으로 갔습니다. 이제 와서 쫓기는 늦었어요. 종사를 홀로 화산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대두노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두 눈에 금광이 맺히면서 점멸을 반복했다.

“지금 밀법대종사인 노부를 무시하는 건가?”

하나 흑의인은 딴청을 피우며 말을 덧붙였다.

“그럴 리가요. 그분께서도 종사의 행보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이신답니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갖춰서 멋지게 등장시켜드려야지요.”

“크흠, 그래? 그분께서 정말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가?”

“그렇답니다. 일단 최근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북해의 후계자가 대막으로 도주를 했답니다. 북해와 전쟁을 준비하려 한다니 그쪽의 칼날을 섬서성으로 돌릴까 해요. 그럼 종사께서도 움직이시기 편할 겁니다.”

“대막이라면 그 놈들을 말하는 건가?”

“네.”

대두노인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그 놈들이라면 부릴 만 하지.”,

흑의인은 날아간 방갓을 쓰면서 눈을 가렸다.

서장의 삼대고수 중 한 명인 밀법대종사(密法大宗師) 또한 바둑판의 흑백 알 중 하나일 뿐이다.

“그쪽의 칼끝을 돌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러니 일단 여산의 온천에서 푹 쉬고 계세요.”

*

이훤은 산서지부를 떠날 때와 달리 느긋했다.

“술 맛 좋네.”

섬서성에 진입한 후 맞이한 첫 번째 객잔이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각이었고, 객잔에 묵기에는 일렀다. 하나 객잔을 지날 때 흘러나온 술 냄새는 없던 여독(餘毒)도 만들어냈다. 그렇게 방을 잡고, 객잔에 딸린 주루의 꼭대기 층에 올랐다. 주루의 명물인 회풍화주(回風花酒)를 마시는 순간 입안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본래 이훤은 과실주나 화주를 즐기지 않았다.

한데 오늘따라 묘하게 회가 동했다.

주루의 꼭대기 층에서 창문 너머로 넓게 자리한 들판이 보였고, 그 너머로 수려한 산세가 화폭처럼 펼쳐졌다.

“아! 그새 정이 들었다고 섬서성의 경치마저 반갑네.”

이훤은 히죽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반면 고천락은 쉴 새 없이 젓가락을 놀리며 탄성을 흘렸다.

“하아, 은자 두 냥 짜리 요리는 또 처음 먹어보네요. 살살 녹는다. 녹아!”

“도둑질을 그렇게 하면서 이런 건 또 처음 먹냐? 그럴 거면 뭐 하러 도둑질을 해?”

이훤의 물음에 고천락은 히죽 웃었다.

“거기 있기 때문이지요.”

“뭐냐? 도둑놈도 도(道)가 있냐?”

“그냥 숨을 쉬는 거랑 똑같아요. 훔칠 때까지는 너무 좋은데 훔치고 나면 정이 뚝 떨어져요. 마치 더러운 걸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 이렇게 비싼 걸 먹어볼 일이 있었겠어요?”

참 희한한 도벽이다.

이훤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후 다시 창밖 풍광을 바라봤다. 고천락의 말처럼 두 사람이 자리한 객잔과 주루는 하룻밤 즐기는데 은자 스무 냥 이상을 필요로 했다.

“형님, 한 그릇 더 먹어도 됩니까?”

“너 얼마 있는데?”

고천락은 잠시 손가락을 헤아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육만이천하고도 백마흔두 냥요.”

“그럼 네가 그냥 시켜서 쳐드세요.”

“네!”

이훤은 고천락이 점소이와 대화를 하는 내내 창밖을 바라봤다. 섬서성 자체가 산지였기에 아무 곳이나 바라봐도 즐기기에 충분했다. 하나 화산과 비교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산이 보고 싶기는 한데······.”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시간을 끄는 이유는 비단 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낙안봉에 올라 망아취자를 설득할 계기가 필요했다. 아닌 말로 무작정 찾아가서 신마의 깨달음을 알려달라면 지금까지의 관계까지 망가질 터였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념이 있어. 그렇기에 한 번 정한 건 절대로 어기지 않지.”

고천락은 똥을 본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아! 나도 술은 좋지만, 형님은 진짜 미친 사람 같소.”

“네가 진짜 술꾼을 몰라서 그런다. 뭐가 됐든 미치면 다른 미친 자와도 통할 수 있어.”

“아, 그러시겠지요.”

이훤은 침음을 흘렸다.

‘노군 또한 매화검법의 절반을 원한다. 노군을 설득해볼까? 아니지. 그 양반은 더 고지식해. 화산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각오할 사람이야.’

방법이 없다. 방법이.

하지만 느긋함을 잃지 않았다.

시간은 이훤의 편이다.

회귀 전보다 몇 배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처럼 술을 즐기다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열릴 터였다.

그 때 반대편 창문에서 소란이 일었다.

“크하하! 내가 가는 곳이 바로 길이라니까?”

“대형, 이번에 무림맹에 가시면 한 자리 하시겠어요.”

“당연하지! 본방이 이런 큰 공을 세웠으니 외단의 대주 자리 정도는 주지 않을까 싶다!”

이훤은 인상을 썼다.

시끄러운 녀석들이다.

그 중 가장 시끄러운 녀석이 키득거렸다.

“드디어 청문오룡이 강호에 이름을 올리는군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대형인 내가 너희들까지 모두 입성시켜 줄게!”

고천락이 청문오룡의 대화를 엿듣다가 혀를 찼다.

“산서북부의 유림현 망나니들이네요.”

“알아?”

“예전에 잠깐 인연이 있었지요. 저 대형이라는 놈이 청문방의 소방주인데 아비나 자식이나 여자를 엄청나게 밝혀요. 그래서 방주가 기녀에게 주려고 산 귀중품을 훔쳐서 마누라 치마폭에 넣어줬지요. 그 후로 방주가 아직까지 기루에 출입을 못하고 있데요.”

이훤은 피식 웃었다.

“역시 술이 최고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주도(酒道)를 논하려는데 비명이 들려왔다.

“어! 어! 어! 없어. 어디 갔지? 아버님의 서찰이 없어!”

청문오룡의 대형은 화려하게 수놓은 통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변방의 방파가 무림맹에 전해야 할 소식이라면 시급을 요할 터였다. 한데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눈에 띄는 통에 넣어도 들고 다니는 걸 보면 제 정신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머저리 같은 놈이네.’

이훤은 코웃음을 친 후 다시 창밖을 바라보려 했다.

화산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나마 잊고, 술로 시름을 달래려는 게다. 한데 지금껏 요리를 먹는데 집중하던 고천락이 키득거렸다.

“왜 웃어?”

“저 놈이 화를 내는 게 제 아비랑 똑같아서요.”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설마?”

고천락은 서찰을 슬쩍 내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똥줄 좀 타면 조용해지겠지요.”

도둑놈이 도둑질을 했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놈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피식 웃으며 서찰을 펼쳤다.

하나 서찰의 내용은 웃을 일이 아니었다.

「빙궁의 주인이 바뀌었고, 유력한 후계자는 도주.」

일전에 화북장에서 북해빙궁의 소궁주와 거래를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빙령단을 얻은 후 자신의 오라비를 궁주로 올리겠다고 장담을 했다.

한데 다음 줄의 내용도 예상 외였다.

「빙궁의 새 주인은 약관을 갓 넘긴 여인으로······.」

이훤은 혀를 찼다.

권력이란 부모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처음 결심이야 어찌됐든 막상 권좌가 눈앞에 보이니 그녀 또한 생각이 달라졌으리라. 두 번째 줄이 예상 외였다면 세 번째 줄은 심상치 않았다.

「북리광천의 외가는 대막의 혈천궁으로······.」

이번만은 이훤도 탄성을 흘렸다.

대막의 혈천궁(血闡宮)은 북해의 빙궁과 달리 중원과 접점이 많다. 장성을 넘어 노략질을 하기도 하고, 돈을 받고 경쟁방파를 멸문시키기도 했다. 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무림맹의 공적으로 선포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성 밖의 혈천궁을 누가 징치할 것인가. 결국 목록 상의 공적으로 남아 간간히 회자될 따름이다.

“호오, 자칫 하면 혈천궁하고 빙궁하고 한 판 붙겠는 걸?”

이훤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소궁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와의 거래는 훌륭했다. 서로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었으니 더 이상 인연도 미련도 없을 터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 이겨라.”

서찰을 내려놓고 술잔을 들었다.

때마침 할 일도 없으니 소궁주를 위해 건배라도 하려는 게다. 한데 뒤통수가 뚫어질 것처럼 따가웠고, 누군가 콧김을 뿜으며 다가왔다.

“내 서찰이 왜 거기 있는 거지?”

이훤은 눈을 끔뻑이다가 서찰을 곱게 접었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찰을 건넸다.

“아! 잘 봤어.”

하지만 청문오룡은 서찰을 받는 대신 검을 뽑았다.

“술주정뱅이 주제에 감히 내 서찰을 훔쳐?”

< 24, 좋은 도둑질.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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