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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마신-57화 (57/226)

<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2) >

고천락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아. 형님은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이훤은 피식 웃었다.

회귀 전 탈마도 처음에는 저랬다.

놀람과 허탈함, 그 단계를 지나면 해탈하여 본인도 즐기게 될 터였다. 그 때부터는 이훤이 원치 않아도 제가 몸이 달아서 어디선가 좋은 술을 훔쳐올 것이 분명했다.

‘탈마는 좋은 술 공급원이었지.’

언제쯤이면 녀석을 신뢰할 수 있을지 잠시 고민을 해봤다. 하나 이런 일은 늘 그렇듯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며 회귀 전과는 다른 관계가 이뤄질 터였다. 고천락은 그대로지만, 이훤이 회귀를 하면서 달라졌기 때문이다.

분주가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두 번째 비급을 펼쳤다.

제법 이름 있는 무공이다.

회귀 전에 들어봤을 정도였다.

‘한데 그 새끼도 공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수려광권(修麗廣拳)은 일견하기에도 불가의 색채가 가득했다. 비급을 서너 번 읽어봤지만, 어디에도 사공이나 마공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걸 익히고 광인이 될 수 있나?’

이훤은 미간을 좁혔다.

예상컨대 인왕부의 비급은 흑막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고, 꼭두각시가 익혔으리라. 칼이 무슨 죄가 있던가. 휘두른 놈이 잘못이지.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니 흑막의 일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고, 아까워. 형님.”

고천락은 수려광권이 불쏘시개가 되는 걸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술잔을 건넸다.

“하, 좋다. 따뜻한 백주가 황주보다는 못해도 나름대로 흥취가 있네.”

“이건 취하려고 마시는 술이니까요.”

이훤이 여섯 권 째 비급을 모닥불에 던져 넣는 것을 본 후에야 고천락은 술잔을 들었다. 아마 지금쯤 엄청나게 취하고 싶을 것이다. 맨 정신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흉악한 짓이 아니던가.

“네 것이 아니면 익혀봤자 몸만 상한다.”

“알았다고요.”

그러면서도 이훤은 비급의 내용을 기억했다.

본래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혈륜으로 인해 기억력까지 한층 좋아졌다. 그러니 회귀 전의 기억을 필요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것이리라.

서른 권 남짓한 비급이 사라졌다.

이훤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침음을 내뱉었다.

‘벌써 절반을 살폈는데도 없네.’

그가 찾는 것은 천공혈륜겁이다.

회귀 전 이훤이 개미굴에서 탈주했을 때 괴노인, 즉 무암자를 만났다. 그때 그가 이훤에게 건네준 건 천문진인의 비급이 아니라 천공혈륜겁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이삼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도 생겼던 것이다. 하나 무암자는 죽었고, 이미 미래는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서 안 나오면 이걸 또 찾아 헤매야 하는 건가?’

이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상 어딘가에 비급이 존재한다고 해도 크게 상관이 있을까 싶다. 자신은 이미 육 성의 초입에 이르렀고, 혈륜에 대한 수십 년의 경험치를 지니고 있지 않던가. 만에 하나 누군가 비급을 얻는다고 해도 염려할 이유가 없을 듯했다.

“그래도 있는 게 마음 편하지.”

따뜻한 분주 한 잔에 기운을 냈고, 모닥불도 호응하듯 뜨겁게 불타올랐다. 기특한 녀석에게 모이를 주듯 비급 한 권을 던져 넣었다.

“서른다섯.”

고천락은 아예 감흥 없는 표정으로 불쏘시개가 된 비급의 숫자를 헤아렸다. 마침내 여든네 권의 비급이 불쏘시개가 되었다. 강호인들이 보았다면 천인공노할 행위라며 손가락질을 했으리라.

하나 이훤은 침중한 표정을 지었고, 고천락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훤의 곁에는 여섯 권의 비급이 놓였다.

“형님, 그건 뭔가요?”

“돌려주는 게 낫거나, 제 주인을 찾아줘야 할 것들.”

고천락은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제 것도?”

이훤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니. 네 것은 여기 없지.”

“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보고에서 비밀통로나 찾아볼 걸.”

“뭐라고?”

고천락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밀통로요.”

이훤은 바짝 다가앉으며 물었다.

“비밀통로가 있어?”

“모르지요.”

힘이 쭉 빠지려는 찰나 고천락이 말을 덧붙였다.

“보니까 누가 살던 석실을 창고로 개조한 것 같더라고요. 폐관수련장 같았으니 뭐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이훤은 탄성을 내뱉었다.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전환이다.

인왕부 자체는 급조하여 만들어진 전각군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창고도 최근에 들어서 만들었다고 여겼다. 한데 원래 있던 것이라면 주인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생겼기에······. 아니다! 눈으로 보자.”

남은 분주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고찬락이 모닥불을 비벼 끄면서 말했다.

“형님, 이 보물들은 어쩌고요?”

“네가 알아서 좀 옮겨놔.”

이훤은 그 말을 남기고, 절벽 위로 솟구쳤다.

홀로 남은 고천락은 방을 가득 채울 법한 보물들을 보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젠장! 훔치는 건 재밌어도 지키는 건 재미없는데.”

전설에나 나오는 포대화상의 자루가 있으면 모를까 저것들을 언제 다 옮긴단 말인가. 고천락은 슬쩍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몇 개 버릴까?”

*

이훤은 소마가 도망쳤던 통로를 역이용하여 인왕부에 이르렀다. 어둠이 짙게 깔린 인왕부는 조용했고, 분지였기에 음산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통로에도, 인왕부 입구에도 감시를 하고 있는 산서지부의 무인들이 가득했다.

“들어가도 됩니까?”

“됩니다.”

안 되면 담을 넘으려 했다.

한데 인왕전에 들어설 때까지 누구도 길을 막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개미굴 소탕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이 아니던가. 화산파의 문도라는 소문이 도는 것과 별개로 위태교나 탁발현을 대하는 태도도 널리 알려졌다.

미친 개, 내지는 술주정뱅이.

신분은 확실하니 얽혀서 좋을 것이 없다.

그렇기에 이훤은 단 한 번의 제지 없이 인왕부에 발을 들였다.

“후우.”

술아, 미안해.

오늘만은 외부의 방해 없이 목적을 이뤄야 했기에 혈륜을 극한까지 발현했다. 두 눈에 일렁이는 귀화가 전신에 퍼져나갈 무렵 취기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이내 손가락 끝을 타고 몸속의 주정(酒精)이 맺혔다. 술꾼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하고 있음에 안타깝기만 했다.

‘흠.’

이훤은 주정을 털어내려다 생각을 바꿨다.

비어 있는 술병에 몇 방울의 주정을 담았다.

‘이건 무슨 맛일까?’

생각해보니 주정을 다시 맛본 일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자신의 몸속에서 나온 것이니 거부감도 없다. 또한 술에 대한 미안함까지 상쇄시킬 수 있는 좋은 생각인 듯했다.

이훤은 입맛을 다신 후 재차 천공혈륜겁을 끌어올렸다.

극대화된 오감이 주변의 소리와 기척, 냄새를 전했다.

단전에 똬리를 틀고 앉은 내공까지 끌어내는 순간 인왕전 밖의 움직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없네.’

인왕전 외곽에서 경계를 서던 무인들은 조금 전 지나칠 때와 같은 움직임이다. 그리고 숨어서 인왕전을 지키는 자도 찾지 못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단상의 기관을 조작하여 보고(寶庫)로 내려갔다.

‘진즉에 내려와서 확인했어야 했는데······.’

만약 소마가 무당파를 습격하려 하지 않았다면 고천락이 보고를 비웠을 때 찾아왔으리라. 다행히 보고의 내부에는 외인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텅 빈 공간을 보고 있자니 고천락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은 창고로 쓰기에 좁다.

하나 누군가 무언가를 골똘히 궁리하면서 수련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반듯한 돌을 쌓아서 만들어진 벽을 천천히 더듬었다.

‘무암자가 발견했다면 나도 발견할 수 있지.’

고천락이 인왕부를 감시하면서 습득한 정보 중에는 보고에 관한 것도 상당했다. 인왕은 거래 물품의 가치에 따라 일각에서 한 시진까지 보고를 개방했단다. 어차피 입구에 놓인 장부에 모든 기물이 적혀 있기에 약속된 것 이상을 훔치기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아마 천문진인의 무명비급이라면 한 시진도 열어줬으리라.

그렇기에 이훤은 느긋하게 보고의 벽을 살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약은 어떻게 됐나 모르겠네. 어떻게든 됐겠지. 그것보다 무암자처럼 생각을 해보자.’

무암자는 딸을 살리기 위해 약을 얻으려 했다.

이미 목적한 것이 있었으니 보고에 들어서자마자 약을 챙겼으리라.

이훤은 모닥불 형(刑)을 가까스로 피한 여섯 권의 비급 중 한 권을 펼쳤다. 이것은 보고 내에 상비되어 있던 장부로 보물의 명칭과 연원, 위치와 수량이 적혀 있었다.

“약재는 안쪽의 선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가정하여 걸음을 옮겼다. 빈 공간에 손을 뻗어 약을 챙기는 것처럼 움직였고, 이내 돌아섰다.

“목적한 것을 이뤘으니 이제야 보고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겠지. 돌아서면서 보이는 게 검도창이네.”

무암자가 구도자의 삶을 산다지만, 십 년 가까이 명룡사우와 강호를 떠돌았다. 그러니 신병이기(神兵異器)에 대한 호기심이 없을 수 없었으리라.

“여기서 팔검기객의 검을 한 자루 챙기고, 쌍둥이 덩치의 물건까지 챙겼으면······.”

이훤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벽은 평범했다. 하나 원래 이 자리에는 도가무공의 비급이 놓였었다. 이훤이 불쏘시개로 던져 버렸으니 무암자도 관심을 가졌으나 욕심을 내지는 않았으리라.

‘비울수록 채워지니······.’

허(虛)의 깨달음은 화산과 무당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유가와 불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암자 또한 관심을 버리는 순간 비급 너머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으리라.

이훤은 손을 뻗어 벽을 살폈다.

무암자가 보았던 것을 보기 위해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일어난 혈륜이 오감을 증폭시키고, 머리의 회전을 도왔다.

그 순간 이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없어.”

부정적인 말과 달리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이제야 무암자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강호에서 폐관수련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은 응당 구파오가였다. 특히 무당파는 화산파보다 정통 도가를 지향하기에 폐관수련을 밥 먹듯이 했다. 화산파처럼 징벌의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굴을 파고 들어갈 정도였다.

“바람 구멍이 없어.”

이훤은 웃었다.

폐관수련은 보통 굴을 파거나, 지하에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호흡의 유무였다.

이훤은 고개를 돌려 다른 삼면을 확인했다.

돌과 돌 사이에 흙을 채우면 바람이 스며들 수 있다. 하나 눈앞의 벽은 흙 대신 다른 것을 채워 넣었다. 하여 벽 앞에 서는 순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던 게다.

석실에 숨겨진 밀실.

고천락의 예상대로 무언가 존재했다.

이훤은 문을 열기 위해 애쓰는 대신 아예 문을 뜯어내기로 마음 먹었다. 돌과 돌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고, 절혼지를 펼쳤다. 작은 공간이라도 만들어지면 삼초나락수를 흡(吸)의 묘리로 펼쳐 돌을 뽑아냈다.

쿠쿠쿵-

나직한 울림과 함께 석실 너머가 보였다.

손은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발까지 활용해서 공간을 넓히기 시작했다.

이훤은 밀실에 들어서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

이곳은 침소(寢所)였다.

돌판 위에는 기이하게도 형태를 유지한 해골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해골의 무릎 앞에는 이훤이 그토록 바라던 책자가 놓였다.

“······.”

겉면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십 년 전 무암자가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에게 전한 천공혈륜겁이 분명했다.

하나 이훤은 어느 순간부터 해골의 머리맡에 새겨진 아홉 글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초월여절명신마지념(超越如絶命神魔之念)

“설마 당신도 거기에 있었던 거요?”

<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2)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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