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절명곡의 날씨는 외부와 상관없이 늘 광풍이 휘몰아쳤다. 광풍으로 인해 눈을 가늘게 떴고,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가운데 한참동안 절명곡 너머를 바라봤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쳤다.
이훤은 버릇처럼 술병을 입에 댔다.
입안에서 맴돌던 한 모금의 술을 넘기는 순간 미세하게 미간이 꿈틀거렸다.
“춥네.”
그는 이미 한서불침의 경지에 올랐다.
그러니 폭설이 쏟아지고, 한풍이 몰아치는 북해라면 모를까 절명곡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결국 한 마디 말속에 숨은 진짜 의미를 행동으로 드러냈다.
“추울 때는 따뜻한 술이지.”
이훤은 휘파람을 불며 혈륜오괴가 자리를 잡았던 술상으로 다가섰다. 그 와중에 거치적거리는 오괴의 시신을 들어서 절벽 너머로 던져버렸다. 자신이 어지른 건 자신이 깨끗하게 치워야 하는 법이다. 술을 기분 좋게 마시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나 마찬가지였다.
불을 피웠다.
술을 따뜻하게 데워서 마시려는 게다.
하지만 절명곡의 황량함은 불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모닥불은 불씨만 흩날렸기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훤은 술병을 감싼 채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오랜만에 낭만 가득한 술 한 잔 마셔보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삼매진화(三昧眞火)다.
몸속의 내공 중 양기를 극대화하여 열기를 흩뿌리는 절예였다. 회귀 전에도 고수가 되는 순간 매일 같이 술을 데워 마시며 자축하지 않았던가. 삼매진화로 술을 데우는 건 고수라면 누구나 꿈꿀 낭만이 분명했다.
이훤은 성공을 기원하며 입맛을 다셨다.
“되어라. 돼라. 돼!”
삼매진화를 펼치려면 섬세한 기의 운용은 물론이고, 정순한 내력이 필수조건이다. 마지막으로 음양의 기운을 골라내기 위한 심법이 있어야 할 터였다.
첫 번째 조건은 이미 선결됐다.
육신 그 자체인 혈륜은 섬세한 기의 운용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두 번째 조건도 개미굴에서 해결한 상태였다.
공청석유로 만들어진 이 갑자의 내력은 더없이 정순했다.
문제는 세 번째였다.
심법(心法)
회귀 전 탈마가 훔쳐다 준 혼원일기공은 안정적인 심법으로 유명했다. 안정적인 심법이 음양의 조화를 강제로 깨는 행위를 용납할지 모르겠다.
“자! 스님도 술 마시잖아. 알게 모르게 다 마시는 거 알고 있어. 그러니 가자!”
혈륜이 외부로 발현되는 순간 붉은 기운이 일렁였고, 후끈한 기운이 술병에 전해졌다. 여기서 더 주입하게 되면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 병이 깨지거나, 술을 뜨거워지는 순간 실패였다. 그렇기에 기의 운용을 극도로 조심스러우면서도 섬세하게 진행했다.
소마를 죽일 때에도 이렇게 열심히는 아니었다.
이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리고 마침내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술병의 주둥이에서 김이 솔솔 나면서 풍부한 향이 전해졌다.
“됐다.”
이훤은 부리나케 절벽으로 달려가 걸터앉았다.
다시 한 번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는 순간 따스한 술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아이가 물장구를 치듯 절벽 밖으로 나간 두 다리를 번갈아 흔들었다.
입안 가득한 향만으로도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꿀꺽.
술을 데우니 목넘김도 좋았다.
아닌 말로 술을 데우면 신맛의 변화는 적지만, 단맛과 감칠맛이 증가했다. 특히 이훤이 마시려던 노주(蘆酒)는 황주의 일종으로 따뜻하게 마실 때 풍미를 더할 수 있었다.
“즉묵노주가 아닌 게 아쉽지만, 이 또한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정취가 아니던가!”
지난 번 망아취자와 마셨던 즉묵노주는 노주 계열에서도 최상급의 품종이다. 하나 절명곡의 황량한 분위기는 따뜻한 노주만으로도 충분한 분위기를 선사했다.
“하아! 좋구나.”
이훤은 혀끝에서 달달하게 퍼지는 주향을 음미하며 백거이의 시구(詩句)를 읊조렸다.
“숲속에서 단풍잎을 태워 술을 데우고, 돌 위에 푸른 이끼를 쓸어 시를 짓네.”
- 임간난주소홍엽(林間暖酒燒紅葉)
- 석상제시소록태(石上題詩掃綠苔)
당대에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 불린 백거이가 지은 유선유사리의 한 구절이다.
누군가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논하거나, 애틋함을 전하려 할 것이다. 하나 이훤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이백이나 백거이는 그런 상황에서도 단풍을 태워 술을 마실 궁리를 했다.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그래! 나도 시를 쓰자.”
이훤은 휘청거리면서 절벽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절혼지를 펼쳐 바위에 네 글자를 새겼다. 그것만으로도 흥취가 절로 일어났고, 소마가 남긴 말 따위는 광풍에 휘말린 것처럼 저 멀리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슬픔이 찾아온다면 슬픔을 안주로 삼아 술을 마시면 될 일이다.
강호의 안위?
“그런 거 하라고 구파오가와 무림맹이 있는 거잖아.”
각자 좋아하는 걸 하면 될 일이 아닐까 싶다.
정파는 강호를 구하고, 이훤은 술을 마신다.
“훗날······.”
이훤은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봤다.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 죽은 주선 이백.
단풍을 태워서 술을 데우는 취음선생 백거이.
어디 그 뿐이랴?
왕희지와 도연명, 그리고 두보는 더 했다.
어쩌면 술 때문에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그들에게서 비롯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 이훤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읊조렸다.
“당신들처럼 기억되기를.”
주선 이백을 떠올리며 한 잔, 취음선생 백거이를 기리며 또 한 잔을 마셨다. 그 외에 수많은 주당들을 기리며 밤새도록 술병을 비웠다.
*
이훤은 어용협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무림맹 산서지부의 무인들이 개미떼처럼 득실거렸다. 적의 기습이나, 무당파의 보호를 했어야 할 자들이다. 한데 이미 일은 끝났고, 각자 흩어졌으니 어찌할 줄을 몰라 아예 노숙을 한 듯 보였다.
“어! 너는.”
어용협에 대기 중인 무인들은 모두 산서지부 소속 명위대(明衛隊)에 속했다. 그 중 화려한 무복을 입은 자가 이훤을 보고 윽박을 지르듯 소리쳤다.
“네 놈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인가? 정작 사람을 불러놓고 어디에 다녀온 것이야? 무당파가 이미 강을 건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이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가 겨우 눈을 뜬 상태였다. 그런데 누군가 천둥이 치듯 소리를 질러대니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지금이라도 혈륜을 운용한다면 한순간 주독을 빼낼 수 있고, 취기까지 날려버릴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밤을 함께 보낸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누구지?”
“산서지부 명위대주 탁발현이다!”
이훤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봐, 탁 형. 꼴을 보아하니 무당파를 만난다고 때 빼고, 광까지 낸 모양이군. 다행히 일은 잘 해결됐고, 할 일은 없으니 조식이나 먹고 돌아갑시다.”
탁발현은 얼굴을 붉힌 채 소리쳤다.
“놈! 무림맹을 능멸하는 것이냐?”
이훤은 대꾸 없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쿵!
그를 중심으로 삼 장 내의 공간이 울리며 모래알이 허공으로 춤을 추듯 솟구쳤다.
후두두두두둑-
탁발현은 초절정 고수나 보여줄 법한 기사에 말을 잇지 못했다. 모래알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가운데 서늘한 한 마디가 전해졌다.
“위태교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못 들었어? 이렇게 늦게 온 걸 보면 너도 한통속인가?”
탁발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또한 이훤이 위태교의 멱살을 잡고 흔든 것을 들은 상태였다. 무림맹 외단의 부단주도 그렇게 대한다면 자신을 때려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이훤은 탁발현을 향해 걸었고, 걸음마다 한 숨을 내쉬었다.
‘하! 술이 상했나? 황주가 왜 이렇게 독한 거야.’
반면 탁발현은 이훤이 인상을 쓰며 다가오자 슬쩍 길을 내줬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듯한 표정만 봐도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가 분명했다.
“크흠. 뭐 일이 잘 해결됐다니 다행이오. 크흠! 그럼 모두 아침을 먹고 귀대한다!”
대주의 외침에 대원들은 별다른 기색 없이 불을 피우고, 물을 끓였다. 곡식을 빻아 만든 가루를 잔뜩 넣고, 풀뿌리 몇 개에 말린 고기조각도 잘게 썰어서 넣었다.
이훤은 가장 냄새가 좋은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해장은 필수였다. 다행히 대원 중 한 명이 대주의 눈치를 보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잘하셨소. 저 인간이 오랜만의 출동이라고 어지간히 요란을 떨었어야지.”
“죽 한 그릇에 한 대 때려주는 것도 가능한데?”
“에이, 그래도 상관인데 봐줘야지. 어차피 지부장의 친척이라 알아서 못 버티고, 떨어져나갈 게요. 그냥 드시오.”
이훤은 히죽 웃으며 대원이 퍼준 죽 그릇을 받아들었다. 한 입 먹는 순간 용암이 몸속을 휘젓는 듯했다. 뜨끈한 기운이 배를 채우는 순간 운기조식을 한 것처럼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술이 취했다가 깰 때의 간극 또한 주당이라면 즐길 수밖에 없는 쾌감이 아니던가.
“아! 좋다.”
소마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하루가 시작된 느낌이다.
이훤은 기분 좋게 술병의 마개를 뽑았다.
“반주나 한 잔 합시다.”
*
이훤이 돌아왔을 때 개미굴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였다. 산서성과 개방에서 파견된 무인과 거지들의 수색도 끝났기에 오가는 이가 드물었다.
“형님!”
하루 사이에 반쪽이 된 종초홍이 이훤을 반겼다.
“얼굴이 왜 이래?”
“사문의 안위가 달린 일이잖습니까.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지요. 형님과 백암사백이 전해준 정보를 토대로 산서성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중입니다. 한데 이미 흩어져서 찾을 길이 없군요. 아무래도 점조직이거나 예상 보다 덩어리가 큰 듯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종초홍은 이훤이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루 전 탈명선협 위태교의 멱살을 잡고, 무당파를 구하러 가지 않았던가. 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일 대하듯 하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아! 혈륜오괴라는 노괴들도 있더라. 그래서 죽였어.”
이훤의 말에 종초홍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혈륜오괴가 작정하고 합공을 하면 초절정의 고수도 감당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있지 않던가. 소문은 과장되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혈륜오괴가 만만한 상대일 리 만무했다.
“형님! 대단하십니다.”
“알아 두라고. 이제 뒷일은 무림맹에 맡길 테니 고생해. 아! 천락이는 어떻게 됐지?”
“형님 말을 전했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습니다.”
“좋아. 잘했어. 나중에 보자.”
이훤은 종초홍의 처소를 나오다가 예상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헙!”
탈명선협 위태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멱살을 잡혔고, 뒤통수가 깨지도록 머리를 내려찧은 상대였다. 하지만 무당파를 노린다는 적의 기습으로 인해 벌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죄를 청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상부에 보고하면 안 되는데······.’
다행히 이훤은 귀찮음에 인상을 썼고, 손을 내저으며 위태교를 지나쳤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노인네보다 급한 일이 있지 않은가. 개미굴을 찾아온 이유는 하나를 마시고, 하나를 먹고, 하나를 죽이기 위함이다. 공청석유를 마시고, 인왕을 죽였으니 이제 하나를 얻어야 할 때였다.
‘있어야 할 텐데. 없으면 귀찮아지는데.’
저자에 나온 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죄송한데 용중사가 어디 입니까?”
“용중사는 문을 닫은 지 오래됐는데. 아마······.”
이훤은 오태산으로 향했다.
행인이 가르쳐준 곳에 이르자 잡초와 넝쿨로 뒤덮인 폐사찰이 보였다. 용중사라고 적힌 현판을 확인한 후 소로(小路)를 따라 걸었다. 잠시 후 시야가 탁 트인 절벽이 나타났고, 절벽가에 기대어 아래쪽을 확인했다.
관목에 가려진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절벽 중턱에 있는 동굴이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든 장소가 분명했다.
이훤은 히죽 웃은 후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형님!”
화산으로 떠났어야 할 고천락이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가 이훤을 반겼다. 이미 고천락에게 밀어를 전해준 상태였고, 노군동을 거론한 의미는 인왕부의 보고를 숨긴 곳에서 보자는 뜻이었다.
“가신 일은 어떻게 잘 됐습니까?”
“그럭저럭.”
이훤의 말에 고천락은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을 정리했으면 자신의 무공을 논할 차례라고 여겼다. 그가 비켜서자 동굴 내부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오, 제법 양이 되네.”
인왕부의 보고에서 옮겨온 건 보물과 비급이다.
보였다. 은자와 같이 무게만 나가는 것은 무림맹에 넘겼고, 전표는 이미 고천락과 나눠가졌다.
하지만 이훤은 보물과 비급보다 입구에 놓인 술 한 동이를 바라봤다. 항아리에 붙은 밀지에는 행화촌주(杏花村酒)라고 적혀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하거나 부호가 아니라면 구하기 어려운 명주였다.
“훔쳤냐?”
“이런 건 하루면 충분하지요. 형님은 술을 좋아하시니 산서성에 온 이상 행화촌의 분주는 드셔야 할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아주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했다.
이훤은 귀엽기만 한 고천락의 배려에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내 동생이다.”
그는 수십 권의 비급을 가져온 후 자리를 잡았다.
산서성의 명물인 분주(汾酒)를 머금고, 양치를 하듯 주향을 음미하면서 서책을 펼쳤다.
‘일륜대검법이라.’
찾는 물건이 아니다.
심지어 허황된 내용에 잡다한 기술만 늘어놓았다. 십 수 년 동안 열심히 익히면 절정의 반열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이런 물건이 강호에 흘러나가면 피바람이 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비급을 불구덩이에 던졌다.
화르륵!
일륜대검법을 집어삼킨 모닥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형님! 그걸 왜 태워요?”
고천락이 귀신을 본 것처럼 눈을 치켜떴다.
이훤은 대수롭지 않게 술동이를 향해 턱짓을 했다.
“왜긴? 술 데워야지.”
< 23, 여섯 명이 아니었어! > 끝
ⓒ 김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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